달콤하고 씁쓸한
8_씁쓸하면서도 달콤한

훈승전결
2023.04.18조회수 11
그 이후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정한에게 애인이 생겼다던가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던가. 하지만 절대로 약점이라고 볼 수 없었던 건 정한의 애인이라고 들려오는 사람이 원우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들 근처에 오지 않았다.
그들의 계획대로 원우는 자유를 얻고 정한 역시 귀찮은 일을 덜어낼 수 있었다. 가끔은 정한의 그 성격이 원우를 가만히 두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조직 내에서의 의심은 저 멀리 사라져갔다. 감히 저들의 보스를 그렇게 냉혈안으로 보는 사람은 원우 한 사람뿐일 테니까.
오늘도 정한은 원우를 불렀다. 제 조직원들 앞에서 대놓고 부른 건 보여주기식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호기심은 되려 욕심이 되어 찾아온다고. 조직원들의 귀가 하나둘 정한의 방으로 모여들었다. 당연히 정한이 모를 리가 없었지.
"원우야. 안 그래도 지금 듣는 귀가 많아."
"뭘 더 원하시는 건데요."
이것도 이미 진작에 눈치챈 그들의 대화였다. 원우가 뭘 더 원하냐는 말에 더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 소리는 물론이며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뭔가 떨어지고 난 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던 것.
조직원 서로가 눈을 마주치다 다시 문에 귀를 대더니 놀라며 문 앞에서 도망치는 조직원들. 그 문 너머에서는 성인 남자 두 명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짜식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건 줄 알지 뭐 이리 의심이 많아."
"조직원들한테도 사기를 좀 쳤어야죠."
"네가 뭘 안다고. 됐고 애들 갔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자."
정한은 메모 하나를 원우에게 건냈다. 원우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메모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변화가 잘 없던 원우의 차가운 표정이 더욱 식어갔다. 도저히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메모 내용은 별 다를 게 아니었다. 이런 조직물이라고 하면 당연하게 나오는 요소들 중에 하나. 조직 내 스파이가 있다는 것. 그 당연한 이야기에 원우의 표정이 식어가던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 바로 승철 쪽의 사람이다.
소문이 더욱 빠르게 퍼질 수 있었던 이유. 지금 이 행동들이 승철 쪽에서 빠르게 알 수 있었던 이유는 이거였다. 원우는 왜 이 중요한 걸 이제야 말했냐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는데. 정한은 이럴수록 모른 척 그 녀석에게 미끼를 던져야 된다고 했다.
생각을 해보자. 조직 보스가 사랑 따위에 빠져 일도 제대로 못하고 스파이 분간도 잘 못한다고 하면 넌 그 보스를 용서할 수 있겠냐고. 당연히 용서할 수 없겠지. 그걸 반기는 사람은 당연히 제 사람이 아닐 거라고 했다. 덕분에 승철 쪽에는 미끼를 던지고 처리할 사람을 볼 수 있었던 거지.
"근데 우리 쪽에는 그걸 처리해 줄 사람이 없어."
"저한테 지금 칼을 쥐라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그래도 하나뿐인 연인인데 안 되는 건가?"
"당치도 않는 소리를 잘도 내뱉으시네요."
정한이 원우의 말을 듣더니 크게 한 번 웃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돌아가고 싶지 않던 과거를 내뱉는 정한. 원우가 지금껏 죽인 정한 쪽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적어도 열 손가락을 넘어갔을 것이다. 그럼 정한 쪽이 승철 쪽 사람을 죽인 횟수는? 그것도 역시 원우로 인해 실패했다. 그럼 정한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큰 걸 바라는 건 아니다. 죽이라는 소리도 아니다. 정한에게 처리란 사회적 매장이었다. 정한은 원우를 테스트하고 싶었다. 과연 원우가 자신 곁에 머무는 것이 합리적인가. 정말로 승철 쪽에서 원우가 완전히 벗어난 것인가. 지금까지의 행동이 증명해 주어도 결과가 없으면 믿기는 어려운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절차였던 것이다.
하지만 승철 쪽에서만 처리라는 단어를 배운 원우가 당연히 정한의 말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원우는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면서 뒤돌아서는데 정한이 결국 이 테스트의 의미를 원우에게 직접 말했다. 안 그러면 진짜 나쁜 쪽은 자신이 될 것 같았으니까.
"죽이라는 게 아니야."
"그럼 뭔데요."
"다시는 이 바닥에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자는 거지."
"그게 그거잖아요."
"사회적으로 망신 주는 거라고 생각하자."
사회적으로 주는 망신. 이미 온 세간에 떠들썩한 리스크 큰 사람을 조직에서 받아주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승철 쪽에서 열심히 일했다면 다른 조직에서 그 녀석을 처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있었다.
정한은 그 부분을 꿰뚫어 본 것이다. 저 자신이 하는 건 다른 쪽에서 합당하게 죽일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 것. 굳이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기꺼이 피를 묻힐 사람은 많다는 것. 예전에 그 사람 중 한 명이 원우였다는 것도.
"이젠 네가 죽일 필요 없어."
"꼭 다른 사람이 죽여줄 것처럼 말하네요."
"틀린 말도 아니지. 우리가 아니더라도 괴물은 많거든."
괴물, 그 단어 하나가 원우의 심장을 파고 들었다. 제 스스로도 저를 괴물이라 말했지만 괴물이란 말을 하면 부정 받고 싶었다. 정한의 말이 지금껏 자신이 괴물이었던 걸 직시해 주는 말이었으니. 꽤나 아팠을지도 모른다.
결국 원우는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정한이 내민 테스트를 받아드리기로 했다. 원우는 나이프 한 자루만 빌려줄 수 있겠냐 물었고. 정한은 이유도 묻지 않고 원우에게 나이프를 내밀었다. 남을 죽이는 데에는 쓰지 않을 것이고 그럼 저 나이프가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정한은 말을 아꼈다.
-
정한이 승철 쪽 스파이에게 일을 주었고 어쨌든 이곳에서 의심 받지 않으려면 일을 해야 될 것이라고 했다. 어차피 그 일은 가짜 거래였고 거래자가 나와야 될 자리에 원우가 나가면 될 거라고 정한이 정보를 넘겼다.
원우는 그 정보에 따라 가짜 거래 장소에 몸을 숨겼다. 마치 승철 쪽에서 일하는 그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잡힌 나이프는 항상 잡던 것과 달랐고 그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밝은 톤과 자유로운 착장이 변화를 인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흐르지도 않았다. 곧바로 나온 그 사람을 보자니 살의가 몰아쳤다. 저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승철 쪽에 있으면서도 승철은 원우에게 숨긴 패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 중 하나는 저 녀석이겠지. 원우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표정을 고치고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처음에는 그냥 정한이 자신에게 일을 넘겼다고 조직으로 돌아가보라고 했다. 그건 그 자가 조직에서 배제 당할 수도 있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나왔는데 돌아갈 수는 없다며 구겨지는 표정에 원우는 역시나 변함없는 표정으로 그에게 답했다.
"그 말 보스에게 그대로 전해도 되는 건가?"
구겨졌던 그 남자의 표정이 어느 순간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뀌었다. 저 녀석이 무서워하는 건 무엇일까. 아마도 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가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인 그곳이 무서운 것일 거다. 이렇게 제 표정도 관리 하나 못하는 것이 스파이라니. 원우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내뱉었다.
"이름."
원우의 말에 그가 살려달라며 무릎을 꿇었다. 제 자신이 정한의 오른팔이니 그 정도 부탁은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빌고 또 빌었다. 원우는 단단히 착각한 그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다. 그리고는 원우가 그에게 나이프를 건냈다.
"그럼 네가 잘하는 거 해봐."
자신을 찔러보라는 것이었다.
그 남자도 어느 정도는 파악했을 것이다. 원우가 저 자신이 승철 쪽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진 않았다. 지금 이 행동도 원우가 너 같은 녀석들은 이런 걸 잘하잖아. 같은 걸로 행동하는 것 같진 않았다. 완전히 승철 쪽으로 단정짓고 원우도 승철 쪽 사람이었기에 같은 기류를 느꼈을 것이라고 그래서 내뱉은 말일 거라 추측했다.
결국 그 남자는 나이프를 들었다. 원우는 나이프를 든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 상황을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만약 원우가 이 상황에 놓였다면 할 행동은 한 가지밖에 없었을 것이다.
"권순영. 내 이름이야."
그리고는 나이프의 끝이 순영, 자신에게로 향했다.
-
정신이 하나도 없다. 눈을 뜨니 정한의 방이다. 옆에서 민규가 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우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정한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용감한 건지 대담한 건지. 아니면 살 마음이 없는 건지."
원우는 순영이 목숨을 던질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이프를 건내준 건 정한의 말대로 순영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함이었다. 그 행동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정한은 순영과의 대화로 승철 쪽 사람이라는 걸 제 입으로 들었고 결국 순영의 절대적인 충성을 받아냈다.
문제는 다음부터다 생각보다 다급하게 제 몸에 나이프를 찔러넣은 덕분에 원우는 중상을 입었다. 이대로면 회복하기 전까지는 움직이는 것도 힘들 건데. 더 문제는 움직이기 힘든 몸이기에 민규의 잔소리에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우형 미쳤어? 정한이형도 그래 왜 그런 걸 하자고 해서."
"난 괜찮아 민규야."
"이걸 보고도 괜찮다는 말이 나와?"
"진짜 괜찮다고."
거짓말은 아니었다. 승철 쪽에서 저지른 일보다는 이 일이 훨씬 덜 아프고 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한 번 더 했다가는 자신이 정말 죽겠구나 싶은 것도 알았다. 원우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다고. 정한에게도 이제 자신도 좀 소중히 여겨주면 안 되냐고 말했다.
정한도 이 일 이후에 뭘 더 시킬 생각도 없었고 앞으로는 원우의 자유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걱정 가득한 한숨을 내쉰 민규는 원우를 더 혼내지는 못하니 정한을 혼냈다. 정한이 웃으며 넘어가려고 하면 민규가 또 정한에게 잔소리를 내뱉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이 정도면은 잘 마무리 된 것 같아서. 원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내뱉었다.
"형 지금 웃음이 나와?"
"미안. 그치만 다행이다 싶어서."
일을 끝내고 나선 한 번도 웃은 적 없던 원우가 처음으로 웃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