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에게 연락을 해달라는 다니엘의 부탁에 병원 1층 로비로 내려가 전화를 빌리려고 할 때였다.
"낯이 익는 얼굴이네? 진짜 오랜만이다. 와이."
다니엘을 제외하고 성우의 코드네임이 불리는 건 처음이었다.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온몸에 힘이 들어간 채 뒤돌아 보았다.
"....너..?"
한편, 병실에 혼자 누워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시간이 흘러가는 걸 보고 있던 다니엘은 성우가 누구를 만난 건지도 모른 채, 모든 게 끝이 났고, 이제는 지아와 함께 행복할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세상 기쁜 미소를 지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어느날 그렇게 죽거나, 살아있다면 하염없이 싸우고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병원에 누어있는 제 모습이 낮설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세상이 이제 나를 모르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게.
모두의 삶 속에서 사라진다는 게, 생각보다 홀가분 했다.
지아, 너에게 가기 위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너의 삶 속에서만 존재하기 위해, 나는 모두의 기억에서 죽었다.
그 때, 밖에서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누군가 다니엘이 있는 병실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쾅--!
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달려오던 발소리의 주인이 성우였다는 걸 증명해주듯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성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옷갈아 입어..!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무슨 상황인지는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우리를 아는 누군가, 우리를 찾아버린 것.
팔에 꽂혀 있던 링거를 떼어내고 전에 성우가 가져다 준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성우는 여전히 문 앞에 서서 바깥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떼어낸 링거로 침대시트는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빨리 좀 해!"
"다 입었아. 어디로 가면 돼?"
"..창문으로?"
"여기서 뛰어내리면 못 도망갈 것 같은데..?"
"아씨.. 그럼 어떡해..! 지금 오는데!"
어떡하냐며 두 발을 구르며 탄식을 뱉는 성우에 이해가 안된다는 듯 피식-하고 웃으며 말하는 다니엘이다.
"야. 넌 A조에 난 보슨데. 뭐가 문제야? 정면돌파. 그게 우리 주특기잖아?"
사실 성우도 방법이 그거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왠지 그 방법만은 피고하고 싶은 느낌이었다.
"너 실밥도 안풀었어. 잘 못되면 어쩌려고."
"다른 방법 없잖아. 늦으면 안돼. 여길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나가야 해."
어쩔 수 없음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두 소매를 걷어올린 두 사람이 자신있게 문을 열었다.
"주머니에 마스크 있어. 가려."
"마스크를 쓰고 싸우라고?"
"잔말말고 해."
성우의 말에 콧방귀를 뀐 다니엘이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썼다.
익숙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흩어져 병운 내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최대한 부딪히지 않게, 자연스럽게 걸어가."
"미안하지만 그건 안돼. 아까 마주쳤거든. 나, 알아보더라."
작게 속닥였는데, 그 소리도 들은건지 검은 팀복을 입은 남자들의 시선이 성우와 다니엘, 두 사람에게 닿았다.
"그 마스크 좀 벗어보시죠."
"나? 싫은데?"
미간을 좁히며 슬금슬금 두 사람에게로 걸어오는 덩치좋은 사람이 귀에 손을 대더니 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는 안돼지. 최대한 빠르고 조용히 나가려면.
가볍게 손가락을 푼 다니엘이 먼저 덩치좋은 남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억..!"
몰려드는 요원들에 서우와 다니엘은 출구를 확인하고 손을 털며 싸울 준비를 했다.
"실밥 안터지게 살살해라."
다니엘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당장 윤하가 달려왔다. 부엌에서 같이 타르트를 만들고 있는 우리에게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 윤하가 제일 먼저 물었던 건, 성우의 소식이었다.
"성우는..? 성우는 어디있어...?"
"내가 다 설명할게."
다니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걸 본 지아와 윤하는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혹시나, 안 좋은 소식을 전할까봐..
"회장이 보낸 작전에서 인력은 인력대로 부족하고 무기마저 다 떨어져서 내 손에는 총알도 없는 총이랑 짧은 단검. 그뿐이었어. 이미 너무 많은 팀원들을 잃었었고, 그런데도 끊임없이 들어닥치는 총소리와 비명소리들에 어쩔 수 없이 난 단검하나를 가지고 싸우고 있었지. 그때 성우가 온거야. 우리에게 가장필요했던 무기들을 가지고.. 성우가 나를 도와주러 온거야..."
지아와 윤하는 성우가 카페로 찾아와 타르트를 먹고간 그 날 이후, 다니엘을 도우러 갔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게다가 두 명이 모두 사라졌으니, 당연히 알 수밖에. 하지만 훨씬 심각했던 상황과 단검 하나로 총과 싸웠을 다니엘, 그리고 그런 전쟁터에 스스로 들어간 성우. 여기까지는 상상도 못했기에 다니엘의 말에 마음이 아려올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마무리는 극소수의 우리 팀원이 살아남았어. 그리고 성우가 가지고 온 차에 팀원들을 태우고 다시 돌아오려고 했지. 사실 난 이번 작전을 끝으로 비밀요원들의 보스를 끝내려고 했어. 이젠 이 일,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팀원들이 탄 차에 타기 전에 얘기를 나눠야 했어. 나는 이 전쟁에서 죽은 걸로, 회장이 그렇게 알도록 해야했거든. 아무도 모르게 가짜로 죽으려고 했던 그 작전 때문에 성우와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야. 팀원들이 타고 곧, 그 차가 통째로 폭발해버렸거든.."
끔찍한 상황에 윤하는 고개를 숙였고, 지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살아남긴 했는데, 나는 팔에 총을 맞은 상태였고, 주변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더라..
그러다가 회장이 만일의 상황에 나만 빠져나오라고 세워둔 차를 타고 근처 병원을 찾아갔지. 나는 거의 일주일을 병원에 누워있었고, 성우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옷도 구해주고 지리도 좀 익히고 그랬어. 한 달. 그렇게 한 달이면 여기,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정말 몰랐던건, 회장이 준 그 차. 위치추적기가 붙어있었던 거야. 난 수술한 게 다 아물기도 전에 또 그렇게 도망다녀야 했어. 그렇게 1년이나 지나고.. 이제서야 이렇게 돌아올 수 있게 된거야.."
지아는 다니엘이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해 돌아오고 있을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노력하고 있는데 자꾸 일이 꼬이나보다.
그렇다면 연락 한 통이라고 해줄 순 없는 걸까..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아무리 안좋은 상황이라도. 고작 전화 한통, 문자 한통,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걸까. 잘 있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곧 가겠다고. 그 한 마디만 해줄 순 없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안좋은 상황이 아니라, 단순히 일이 꼬였던 게 아니였다. 다니엘은 저에게 돌아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몇 번을 죽을뻔 해도, 이렇게 돌아오기 위해, 죽을 고비를 넘고 넘어 온 것이었다.
"나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차마 다니엘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살아있다는 연락 한 번. 그게 그렇게 어려웠냐고.. 나 너무 힘들었다고.. 네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이 가만히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그 답답함을 아냐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 지아 자신이었다. 늘 다니엘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1년이란 긴 시간동안 목숨을 받쳐온 다니엘에, 한 없이 작아졌고, 또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지아는 두 손을 모아 얼굴을 가리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윤하는 놀라서 그 자리에 주저 앉은 채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제 옆에서 온몸을 떨며 우는 지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토닥여주었다.
"회장으로 부터 도망 다니는 동안, 성우는 나를 정말 많이 도와줬어. 그런데 우리 둘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지. 완전히 벗어나는 거 말이야. 우리는 선택을 해야했어. 둘다 죽거나, 둘다 회사 요원으로 돌아가거나.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과 같진 않겠지만. 난 어떻게든 둘다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어. 그러다가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나 버린거고. 그런데 성우는 선택을 한거야. 내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것도 다 성우 덕분이야."
병원을 탈출한 성우와 다니에은 차를 타기 전, 이 병원을 찾아온 요원들에 수상함을 느꼈다.
"이 차 때문인 것 같지..?"
두 사람이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고, 차키를 바닥에 던져버린 채 달리기 시작했다. 요원들이 나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최대한 멀리.
미리 길을 익혀놓은 성우 덕에 이리저리 동선을 바꾸며 요원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위치추적기를 박아놓은 차를 나한테 준거야? 하, 참 미치겠네.."
"근데 이제 어쩌지..?"
"살아있는 걸 들켰으니.. 이제 돌아가지도 못하겠네.. 다시 죽어야지. 그들이 믿도록."
사람들이 보는 사이에서 죽은 척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일반 옷을 입었고, 장비도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 말은 즉슨, 죽는 연기를 하다가 자칫하면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 골치아프게 됐네.."
"우리나라에서 회장의 손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 얼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하는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 '방법'이라는 건 떠오리지 않았다. 아마 성우도 다니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정도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거라고.
"정면돌파.. 또 해?"
"아니.. 이건 아니야. 이건 불가능해."
'불가능'이라는 말을 다니엘이 직접 뱉게 될 거라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마저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이제는 최선을 다하려고 해도,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대책도 없이 도망만 다녔다.
하루종일 도망만 다녔다.
밥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먹는 중에 밖이 소란스럽기라도 하면 바로 짐을 챙겨 달아나야 했다.
잠도 한 명씩 돌아가며 자야했다. 둘다 잠들면 그 사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이렇게나 도망쳐다녔는데 무방비 상태에서 쉽게 당할 순 없었으니까.
사실 지아나 윤하에게 연락을 할 길은 많았다. 공중전화도 있었고, 전화 한통할 여유정도는 있었다.
그런데 혹시나 우리랑 연락이 닿았다는 이유로 우리 주위를 맴도는 이 요원들이, 너희들에게 갈까봐. 우리가 또 너희를 위험에 빠뜨리게 할까봐.
당장 여기서 죽는 것보다, 그 두 사람이 우리로 인해 위험에 빠진다는 게 더 무섭고 두려웠다.
그래서 한 통의 연락도 할 수가 없었다.
많이 기다릴 걸.. 알면서도...
서로가 지쳤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이렇게 무작정 도망만 다녀서는 답이 없다는 것 또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병원에서 성우가 만났던 그 요원과 마주치고 말았다.
"여기있었네? 하... 많이 찾았잖아. 그러게 왜 회사의 비밀 정보들을 전부 다- 알고 계신 분이 배신을 하고 그래?"
"
"그러니까 보스에서 배신자로 급하락하지. 보스는 신분도 높은데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그는 예전에 다니엘이 가르쳤던, 비밀조직에서 다니엘의 제자였던, 요원들 중 한 명이었다.
아무런 무기도 없는 두 사람 앞에서 총을 꺼내 손장난을 치며 말했다.
"맨손인 사람이랑 총을 들고 싸우는게 좀 자존심 상하긴 하는데, 그래도 보스잖아. 이정도는 돼야지. 안그래?"
세 명의 사이에서 숨막히는 긴장감이 돌았다. 곧 있으면 근처에 있는 요원들이 모여들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말 희망이 없는거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성우가 재빠르게 총을 빼앗아 들었다.
"악..!"
성우의 팔꿈치로 명치를 세게 맞은 그 남자는 길 바닥에 주저 앉았다.
"이게 미쳤나..?!"
총을 장전한 성우가 그 남자에게 총구를 겨구자 두 손을 들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성우의 총구는 그 남자에게서, 다니엘에게로 옮겨졌다.
남자는 눈이 동그레져 상황을 살피고 있었고, 다니엘은 놀라서 성우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난 이미 예전에 회사에서 벗어났었고, 이번 작전에 투입된 것도 아니었어.
그런데 다 케이, 너 때문에 내가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는거야."
성우의 말을 들은 다니엘은 오히려 표정이 더 침착해졌고, 주저 앉은 남자는 먼지를 털고 일어나며 재밌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아 맞다! 너네 둘 사이 안좋았지? 막 라이벌이었잖아, 그깟 여자 하나 두고. 풉,"
그 남자는 또 다시 미친 듯 웃기 시작했다.
그 남자에게서 나온 '그깟 여자'라는 말에 성우의 미간이 작게 좁혀졌지만 총구는 여전히 다니엘을 겨누고 있었고, 다니엘은 천천히 두 손을 머리위로 올렸다.
시끄럽게 웃는 그 남자를 보다못한 성우가 총으로 남자의 머리를 세게 내려쳤고, 남자는 기절해 바닥에 뒹굴었다.
"야, 이제 그만해. 얼른 도망가야지."
하지만 성우의 총구는 내려오지 않았다.
"우린 선택을 해야해. 둘 다 회사로 가거나, 둘 중 하나만 회사로 가거나."
"아니, 우리 둘다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일단 진정하고 총부터 내려놔."
"아니. 방법 같은 건 없어. 애초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거든. 여기서 최선의 방법은, 내가 너를 죽이고, 난 회사로 돌아가는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