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끝난 것 같았다. 이제야 현재를 사는 것 같았고, 이제야 내가 내가 된 느낌이었다.
이젠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뜨겁게 사랑했던, 마지막까지 나를 사랑해줬던, 의건이를, 작별인사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웃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성우가 회사를 다녀간 후, 다니엘씨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안하다고 했다. 괜히 나에게 화풀이를 한 것 같다며.. 솔직한 마음도 드러냈다. 성우가 나에게 함부로하는 말이 너무 듣기 싫고 거슬렸다고. 그렇게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고 싱긋 웃어보였다. 그 감정 또한 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렇다고 말이다.
회사에서는 괜히 소문이 나고, 우리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점심 식사 수다거리가 되는 게 싫어서 일부러 알리지는 말자고 했지만, 다니엘씨의 눈빛으로는 아무도 속일 수가 없었다.
"여주씨, 팀장님이랑 다시 만나는 거야?? 뭐야 둘이?? 눈에서 아주 그냥 꿀이 떨어져~"
한 가지 착각했던건, 꼭 점심시간의 수다거리만 된다는 건 아니었다. 그냥 잠시 커피 한 잔 사러 다녀올 때도, 일하던 중 기지개를 펴면서도 한 마디씩 흘리곤 했다.
일 잘하는 잘생긴 능력자 팀장님에서, 남자친구인 팀장님은 어떤 스타일이냐며 물어오는 회사 여직원들에 부담스러움이 묻어 넘치는 미소를 지었지만,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아무도 나의 반응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냥 잘 해주시는 것 같아요.. 하하.."
이런 당연한 한 마디에도 환호성을 지르며 역시 팀장님이라는 감탄사를 마구 내뱉었다.
그때 마침 화장실을 갔다가 돌아오신 팀장님이,
"또 내 얘기 중이었죠? 지은씨, 여주씨가 뭐라던가요?"
"큼.. 그냥 잘 해주신다고..."
"나참, 그냥 잘 해 주기만 한답니까?
기왕 들킨거, 오늘 점심은 여주씨랑 단 둘이 먹어도 되겠죠?"
회사에서도 당당히 내 손을 잡고 점심은 뭘 먹고 싶냐며 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사람들 다 보는 데 왜이러냐며 밀어냈겠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보다 잡힌 손이 너무 신경쓰이고 떨려서 무어라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남들 시선을 신경쓸 겨를이 없게 되어 버렸다.
내 손을 잡은 채로 밖으로 나가던 팀장님이 직원들에게 점심 맛있게 먹으라며 손을 흔들었다.
"난 그냥 다같이 아무거나 먹어도 되는데요.."
"그건 내가 안 돼."
다니엘씨와 의건이는 얼굴은 닮았지만 말투와 행동은 전혀 달랐다. 내가 이 두 사람을 왜 헷갈렸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오늘 밥 먹으면서 그 얘기 좀 해줘요.
전에 아쿠아리움에서 잊으려고 왔다는 추억."
"그래요."
"내가 물어봐도.. 괜찮은 거죠?"
"이제 정말 괜찮아요."
당신이 채워줬으니까. 너무 공허해서 아팠던 내 삶을 당신이 채워줬으니까..
여주씨와 단 둘이 점심을 먹으러 나와서 회사 근처 식당에 앉아 식사를 했다.
"그 아쿠아리움은 의건이랑 처음 만난 장소에요. 초등학교 때 처음 갔었는데, 선생님만 따라 다니라고 했는데 제가 넋놓고 보닥 길을 잃었거든요. 그 때 의건이가 도와줬어요. 그래서 그 때부터 쭉 친구였고."
"친구였다가 연인이 된거네요?"
"그렇죠."
여주씨가 내게 아쿠아리움에서 그렇게 말했다. 이 곳에서 있었던 소중한 추억을 이제는 잊으려고 다시 온거라고. 이제는 잊고 놓아주려고. 그건 죽은 의건씨와의 첫만남이라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내가 다니엘씨한테 거기를 가자고 했던건, 거기서 또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곳에서 있었던 예쁜 추억이 하나가 더 생기면 옛 추억은 좀 가벼워질까봐."
"그래서, 가벼워졌어요?"
"글쎄요. 하지만 분명한건 이제 이렇게 옛날 일을 말하고 떠올려도 눈물은 나지 않으니까."
여주씨가 옛 일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건, 나로서는 거의 모든 바람을 이룬 것이었다. 나의 한 가지 목적, 이거 였으니까. 이제는 웃을 수 있는 여주씨가 되어서, 웃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앞으로 더 많이 남은 날들이 기대되었다.
"앞으로 예쁜 추억, 내가 많이 만들어 줄게."
보고싶었던 미소, 그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여주씨였다.
"아, 말 나온김에 우리 오늘 회사 마치고 영화관 갈까? 전에 가자고 해놓고 못갔잖아.."
"미안하다는 말 할거면 안 가. 진짜 괜찮다니까 그러네. 오늘 야근 없어요? 그럼 난 좋아요."
데이트 약속이 잡힌 퇴근 시간은 평소 보다도 더 시간이 안가는 것 같았다. 기어가는 시계 바늘을 보며 속으로 이리저리 욕도 했다. 제발 좀 일어나서 뛰어라고.
그렇게 하루종일 시계와 컴퓨터만 번갈아보다가 드디어 6시에 긴 바늘과 짧은 바늘이 도착했다.
"다들 수고 했어요! 내일 봅시다~"
그리고는 다시 여주씨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근데 무슨 영화 볼거에요?"
"뭐든."
"보고 싶은 영화 있었던 거 아니었어요?"
"없는데. 난 그냥 여주씨랑 같이 영화관에 가고 싶었던 게 다야. 여주씨는 보고 싶은 영화 있어?"
"아뇨.. 저도 없는데.."
도착한 영화관에서 나는 여주씨의 손을 잡고 상영중인 영화를 둘러보았다.
액션은 정신없고, 슬픈건 별로. 귀신은 무슨 귀신.
그러다가 보게 된건 범죄 스릴러 영화였다.
옛날에는 경찰에 되는 게 꿈이었다며 영화가 정말 기대된다고 들뜬 얼굴로 말을 하는 여주씨, 오늘 따라 진해진 립스틱 색이 예뻤다.
아, 지금 무슨 생각을..!
영화보러 온 거잖아. 나란히 앉아서 영화보는 동안은 꼼짝없이 앉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영화관. 여주씨가 영화에 집중한 얼굴 실컷 보려고 오자고 한 거잖아. 정신차려!
들뜬 건지 평소보다 말이 많아진 여주씨는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큰 사이즈의 팝콘과 각자 음료를 하나씩 들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좌석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을때 까지도 여주씨는 엄청 들떠 보였다.
"영화관 오랜만에 오나봐. 되게 신나하네."
"아마 고등학생 이후로 처음일걸요."
영화가 시작될 것인지 불이 꺼지고 깜깜해졌다.
이렇게 깜깜한데, 여주씨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아직도 웃고 있네. 영화관에 온 이후로 계속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네, 여주씨.
영화는 스릴러답게 긴장되는 배경음악에 빗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여주씨는 내 손에 들린 팝콘을 하나씩 꺼내 먹으며 영화에 집중했고, 나는 또 집중하느라 약간의 힘이 들어가는 여주씨의 입술에, 팝콘을 오물거리는 여주씨의 입술에 눈길이 갔다.
정말 미친거 아니야..? 이 정도면 병인데.
아무래도 집중하는 여주씨를 실컷보려는 이번 계획은 접어야 할 것 같았다.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후... 심호흡을 하며 팝콘을 입에 집어 넣었다.
영화나 보자, 영화나..
아무런 기대 없이 보게 된 영화가 생각보다 재밌었다.
조용한 마을에 갑자기 생긴 사건과 아직 감도 안잡히는 범인.
사실 영화를 즐겨보는 성격은 아니라 가만히 보고만 있었는데 그때 여주씨가 내 귀에다 대고 말했다.
"다니엘씨는 범인 누구 같아요?"
내가 놀라서 옆으로 돌아보자 방긋이 웃으며 말했다.
"난 범인이 누군지 알것 같아요. 니엘씨는요?"
범인은 누군지 난 하나도 모르겠고, 하나도 관심 없다.
"마을 이장님이 범인이에요. 내 말이 맞을 걸요? 기다려봐요."
어두운 영화관에서 화면 빛에 비쳐 보이는 빨간 여주씨의 입술에 나도 모르게 입을 맞췄다.
깜짝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뭐에요! 공공장소인데!'라며 내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미안해요.. 나도 끝까지 진짜 참으려고 했는데..
"그러니까 귓속말 하지 마요. 한 번만 더 그러면 뽀뽀로 안끝날지도 모르니까."
내 마음이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나도 완벽히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난, 내 마음을 남들에게 잘 숨길 수 있어서 이때까지 잘 숨겨왔고, 그래서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물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여주씨에게는 내 마음을 숨길 수가 없는지. 속으로 생각만 하던 것들이 이성을 거치지 않고 말로, 행동으로 드러나 버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내가 어릴적에 아버지가 재혼을 했었다. 우리집에는 새어머니가 왔고, 그때부터 나는 남들에게 나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감춰오기 시작했다.
그게 내가 11살때였으니까 벌써 15년쯤 되는 일이었다.
우리엄마가 새엄마라는 것도, 진짜 엄마는 어디 계신지도 모른다는 것도, 사실은 우리엄마가 정말 보고 싶다는 것도. 11살의 난 너무 잘 숨겨왔다. 엄마 애기만 나오면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셨으니까.
새엄마의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도 잘 먹어 왔고, 그렇게 억지로 먹은게 채해서 밤새 토를 하다가 잠을 못자고 아침에 등교를 할 때도 피곤한 티도 내지 않았다.
그렇게 사는 게 적응이 되어서 학교에서도 기분이 나쁜일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반응했고, 몸이 안좋아도 수업도 빠지지 않고 들었다.
그렇게 살아온 지난 15년동안 내가 얻은 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 뿐이었다.
기분 나쁜일이 있어서 사람들과 다투는 일도 없었고, 다른 이유로도 기분이 상해있다고해서 남들에게 드러내지도 않았으며, 늘 웃으며 늘 젠틀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삶의 변수는 여주씨를 만난 후부터 시작되었다.
당장으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것만 같은 슬픈 눈으로 나더라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의 답답함. 아니, 그날 아침 눈을 떳을 때 본 잠든 여주씨의 얼굴. 그때부터일 것이다.
그 사람을 깨워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전날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내 집에 있었던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건지 조곤조곤 물어야 했을 내가 도망치듯 그 집을 나왔고, 회사에서 여주씨를 다시 만났을 때도 나답지 않게 답답한 마음을 온전히 언성을 높이며 드러냈다.
여주씨에게 죽은 애인이 돌아온 것이 말이 안되는 일이지만, 그 만큼 여주씨에게 있어서 내가 하는 나답지 않은 반응들도, 나에게는 심각하게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 번, 또 '뽀뽀해도 됩니까?' 속으로만 생각하던 그 말을 내 뱉은 것으로 두 번, 정말로 여주씨 집으로 올라가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은 그 날로 세 번. 그리고 옹성우라는 남자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한 것으로 네 번, 마지막으로 영화관에서 여주씨에게 입을 맞춘 다섯 번.
다섯 번이나 말도 안되는 일이 내게 일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