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 비가 내리는 날 밤

지난 세 명


"이제 거의 3년이 지났는데. 이제서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야?"

"꼭 이유가 필요하나."

"우리가 이렇게 만날 사인 아니지 않나.."

"내 행동이 잘 못 됐어. 이미 너무 많이 지나버렸지만, 후회해."

"네 말대로 너무 많이 지나가버린 일이야. 이제와서 뭘 하겠다는 건지."

"늦은 거 알아. 아는데, 그래도 내가 찾아왔잖아. 여기까지."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지난 2년처럼. 그냥 서로 모르는 채로 그렇게 살자."

돌아서버리는 여주의 팔목을 그, 옹성우가 잡아 세웠다. 

"그냥 이렇게 가버리면, 내가 뭐가 돼."

"네가 나한테 그렇게 말했을 때, 나 한 마디도 못했어. 정확히 기억도 못하고, 그래서 한 마디 반박도 못했고, 니 말은 오롯이 나에게 박혀서는 2년 동안 그렇게 나를 괴롭혔어. 더 해야 해..?"

여주의 손목을 잡고 있던 성우의 손에 힘이 풀리고, 두 사람의 손과 손목이 완전히 떨어졌다. 


"어? 여주씨 어디갔지? 팀장님 여주씨 어디 갔어요?"

"모르겠는데요."

"아까 누구 연락받고 나가는 것 같던데.."

"내가 가서 찾아볼게요."

여주를 찾으러 1층으로 내려간 다니엘이 본 건 여주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성우의 모습이었다. 찾아왔다는 사람이, 아까 만난 성우일 줄은 몰랐다. 

곧 성우의 손이 여주에게서 떨어질 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돌아선 여주의 시선에 바로 다니엘이 보였다. 눈에 눈물이 맺혀 앞이 일렁이는 와중에도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다니엘의 모습은 선명하게 보였다. 

"다니.. 팀장님..?"

"뭡니까?"

"지금 올라가려고 했는데..."

"회사까지 찾아와서. 무슨 말이 그렇게도 급했습니까?"

미팅 때부터 성우가 눈에 거슬리는 듯 날카로운 말들을 뱉던 다니엘이 거슬리는 걸 지나쳐 화가난 듯 보였다. 

"2년동안 그렇게 힘들었다더니. 옆에 새사람도 가져다 앉혀놨네."

"뭐?"

여주는 뒤에서 들린 그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지금 도대체 뭐라고 한 거야..?"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사과를 하러 용서를 받으러 온 것 같아서 하고 싶은 말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그저 너를 용서 할 수가 없다는 말 밖엔. 

하지만 그의 반응은 도저히 용서를 구하러 온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새사람을 가져다 앉혀놔? 예나 지금이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 사람의 마음을 헐뜯는 사악한 말들 뿐이었다. 

성우와 여주의 관계는 몰라도 여주의 사정을 알고 있는 다니엘은 성우의 말을 듣자 마자 화를 참지 못하고 그의 멱살을 잡았다.

회사에서 그의 행동을 말렸어야하는 여주도, 두 눈에서 눈물을 떨어뜨릴 뿐 말리지 못했다. 

"의건이가 그렇게 됐을 때, 나도 너무 심하게 다치는 바람에 그 순간 벌어진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어. 순간적인 충격으로, 마치 그 장면만 삭제된 것처럼. 그런데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의건이 나때문에 죽은 거라고. 의건이가 죽은 줄도 모르고 내가 왜 병원에 누워있어야하는 줄도 몰랐는데, 네가 나를 찾아와서 그랬어. 너 때문에 의건이가 죽었다고. 근데 너는 왜 살아있냐고. 의건이 데려오라고."

한 남자는 멱살을 쥔 채, 한 사람은 멱살을 잡힌 채, 여주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모든걸 내려놓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그 2년 동안, 단 하루도, 너의 말을 곱씹지 않은 적이 없어. 설마 그 말이 사실인건 아닐까. 나는 왜 의건이의 마지막 모습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한참을 그 생각으로 괴로워 하다가 정말 죽을 것 같아서. 혼자 집에서 소리소문 없이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외면하기 시작했어. 그런게 아닐거야. 그냥 사고였을 거야. 절대 나때문에 죽은 게 아니야."

성우는 잡힌 멱살을 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 상태로 바람빠지는 콧웃음을 쳤다.

"난 너를 그렇게도 원망했어. 그런데 얼마전에 딱 한 장면이 떠올랐는데,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더라. 의건이가 끝까지 나를 보고 웃고 있었어. 나는 울고 있는데. 그 때 뭔가 알겠더라. 의건이가 무슨 선택을 했다는 거. 그래서, 나한테 듣고 싶은 얘기가 뭐야? 이 정도면 돼?"

여주는 다니엘을 말렸다. 여주의 말을 끝까지 들어준 다니엘은 그녀의 손길에 순순히 성우를 놓아주었다. 

"이 정도로 끝날 거였으면 찾아오지도 않았어."

"더 해 그럼. 다 받아줄게."

처음으로 여주가 먼저 다니엘의 손을 세게 붙잡았다. 말은 세게, 마치 상처가 다 아문 것처럼 그렇게 말하지만 다니엘만 느낄 수 있었던 건, 잘게 떨리는 그녀의 손이었다. 

"나도 알아. 의건이 나한테만 특별했던 거 아니라는 것 쯤은. 네가 나한테 그렇게 했던 것도 이해는 돼. 그런데, 의건이는 후회 안한다고 했어. 수백 번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도, 또 다시 같은 선택을 할거라고. 그렇게 말했어. 그래서 난 이제 괜찮아졌어. 좋은 사람도 만났고."

성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말 중 가장 아프고 날카로운 말을 고르고 골라 여주에게 던졌다. 하지만 여주는 그러지 안았다. 2년전 본 그의 모습은 증오로 가득차 보였지만, 지금은 슬픔도 조금 보였기 때문일까. 

"이렇게 끝낼거면,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을 거라고.. 분명히 말했어.."

성우가 돌아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 앉은 여주를 다니엘이 일으켜주었다. 그리곤 넓은 품 가득히 그녀를 껴안았다. 

"미안해요. 내가 아직 여주씨에 대해 다 알지 못해서. 슬픔을 덜어주고 싶었는데, 나마저도 당신의 슬픔이 될까봐 좀 무섭네요."

"충분히 덜어줬잖아요. 아까 내 손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난 아무말도 못했어요."

의건이와 여주와, 성우는 가장 친한 친구사이였다. 

세 명이 모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나올 동안, 가장 친한 사이였던 의건이와 여주는 어느새 연인사이가 되어있었다. 가끔 마음이 그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평생을 친구사이일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마음이 우정으로 둔갑한 사랑이었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두 사람은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선택하게 된다.

여주와 의건이는 자신들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학원을 다니던 여주에게 마치면 학원 밑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늦은 밤길 혼자 가지 말고 저가 데려다주겠다고. 그렇게 말한 의건이는 여주가 학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작은 꽃다발을 내밀며 고백했다. 

"좋아해!

나랑 사귀자."

작은 꽃다발을 받아들고 밝에 웃던 여주였다. 

"여주야, 학교 마치고 떡볶이 먹으러 갈래?"

"나 빼놓고 가면 죽는다~ 둘이 사귄다고 나 몰래가기만 해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닐 때에는 세 명 모두가 자주 만나는 일은 없었지만, 사이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사고로, 세 명의 사이는 산산조각 났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의건이가 죽은 거라고! 야 김여주! 정신 차려! 의건이 살려내!! 왜 너만.. 왜 너만..."

여주의 병실에서 난동을 피우던 성우를 보며 여주는 무슨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낼 지, 그 마음을 이해해줄 사람이 없었다. 성우는 의건이에게도 친구였지만 여주에게도 오랜시간을 함께한 친구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성우가 여주도 힘들 걸 알면서, 목이 쉬어라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얼굴 붉히며 여주를 탓했고, 여주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 순간의 자신을 원망하고 후회하고 혼자 그렇게 슬픔을 삼켜낼 수 밖에 없었다. 

그 뒤로 한 번을 연락한 적 없던 성우와 오늘 다시 만났던 것이다. 

왜 그가 용서를 구하러 온거라고 생각했을까. 

여주는 어쩌면 성우는 여주를 용서하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 탓이 아니야. 절대, 그건 여주씨가 잘 못한 게 아니야. 운이 아주 나빴던 사고일 뿐이야."

다니엘의 한 마디에 여주는 머릿 속 지난 과거들의 기억이 모두 멈춰버렸다. 

그 말 한 마디가 가장 간절 했었지. 내 탓이 아니라고.

기억하지도 못하는 나를 원망하고 질책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괴로운 일었다. 

언제나 다니엘이란 사람은, 내가 필요한 말을 해주는구나.

나를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듣지 않고, 온전히 나, 김여주라는 사람 그대로를. 

그의 판단 속 모든 일은 나의 탓이 아니었고, 그의 판단 속 내가 가장 필요한 말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위로였고, 

그는 고민 없이 나에게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