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그룹 내 연애는 괜찮음

아이돌 그룹 내 연애는 괜찮음 1

아이돌 그룹 내 연애는 괜찮음
권순영 x 이지훈
 

   

   
   노래가 끝나자마자 무너지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격렬한 춤 끝에 오는 기분 좋은 탈진감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팔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고 이제야 산소가 들어오기 시작한 머리는 띵하게 아렸다.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쉴 때마다 내 등은 크게 오르내렸다.이마에 맺힌 땀 방울이 바닥으로 투둑 떨어졌다.운동화로 쓰윽 문지르자 바닥에 새겨진 동그란 모양을 한 내 노력의 증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지훈이형,아직 안 가세요?"



   나는 손등으로 땀을 훔쳐내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얼굴을 들었다.

   앳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엊그제 데뷔조의 막내로 결정된 15살 연습생 후배였다.



    "슬슬 가야지.넌 안 가고 뭐 했어?"

   
    "아,저는 노래 연습 좀 더 했어요.저희 쇼케이스 때 무조건 라이브로 올릴 거라고 앞으로 노래 연습 더 빡세게 하라고 하더라고요."



   술술 다 말해 놓고선 아차 하는 듯한 얼굴을 하는 후배.

   후배라고 하기도 뭣하긴하다.몇개월 뒤면 그는 정식데뷔를 하게 될테니까.그때가 되면 나는 저 어리고 어린,연습생으로 들어온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저 햇병아리에게 선배님이라고 깍듯이 불러야한다. 아니, 선배님이라고 부를 자격이 내게 있기는 한 걸까?여전히 연습생일 뿐인 내가.평생 아이돌을 지망만 해본 내가.

   그런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이 어색한 공기를 서둘러 환기하는 일 뿐이다.



    "실장님이 이번에 진짜 이 갈고 만들 거라고 하시긴 했거든.우리 실장님 감 좋은 거 알아주잖아.지금은 힘들어도 잘 될 거야."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끝까지 멋진 '연습생 선배'인 척.

   젠장.

   나를 보는 저 꼬꼬마의 눈에 미묘한 동정의 빛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여기 정리는 내가 하고 갈게.얼른 들어가."


   일부러 더 생긋 미소 지으며 말하자 꼬맹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그럼...형도 얼른 들어가세요.먼저 가볼게요...."


   쭈뼛거리다가 겨우 인사 한마디 던져 놓고는 열다섯 막내는 몸을 돌려 연습실을 나갔다.


   아마 쟤도 귀가 있으니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잘 알고 있겠지.


   
   이번에야말로 이지훈이 데뷔할 줄 알았는데 나이 때문에 잘렸다고.이번 보이그룹 컨셉을 청량한 소년,미성숙한 청춘 이런 걸로 정한 마당에 스물세살은 컨셉에 맞지 않는다고.그래서 회사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아직 연습해야 할 것이 한참 많지만 나이도 어리고 그룹색에도 잘 맞는 어린 열다섯살 막내를 대신 넣는 걸로 되었다고.


   물론 저 막내에게는 잘못이 없다.당연히 나에게도 잘못은 없다.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회사에게도 잘못은 없었다.회사는 그저 상품의 컨셉을 맞추기 위해 충실히 고민하고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니까.아이돌 연습생을 얼마나 오래 했느냐는 중요한게 아니다.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저 적절한 나이에 적절한 컨셉을 받아 타이밍 좋게 데뷔 할 수 있는가인 것이다.결국은 운빨이 다라는 얘기다



   하,시x. 술 땡기네.





*          *          *




   스물 세살.
  

   세상이 말하는 스물 세살은 젊은 청춘 그 자체로 밝고 열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며 매사에 긍정적이고 혹여나 실패를 하더라도 그 실패조차 아름다운 경험이 될수있는, 그야말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예쁜 나이라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


   적어도 이 바닥에서는 그렇다.


   스물세살은 데뷔할 수 있는 마지노선과 같은 나이였다.그나마도 데뷔하면 무조건 맏이에 리더 롤.하지만 나는 그마저도 실패했다.



   편의점에서 사 온 소주 두 병을 차가운 숙소 바닥에 내려놓고 안주 삼을 새우깡 봉지를 부욱 뜯었다.방 한 칸 딸린 아무도 없는 숙소는 어둡고 차가웠지만 굳이 불을 켜고 싶지는 않았다.원래는 4명이 살던 집이었는데 2명은 작년에 회사를 나갔고 남은 1명은 데뷔조에 들어가게 되어 데뷔 전 마지막 휴가차 본가에 내려갔다.그래서 만년 연습생인 나, 이지훈만 숙소에  홀로 남았다.



   뚜껑을 열고 병째로 소주를 꿀꺽꿀꺽 마셨다.이 시간에 이렇게 마시면 다음날 무조건 얼굴 팅팅 부을 텐데.하지만 연습생 따위가 얼굴 부기 같은 걸 신경 써 봤자지.와사삭,와삭.입안에서 부서지는 새우깡의 맛을 음미하며 나는 멍하니 핸드폰만 들여다보았다. 밥 잘 챙겨 먹으라는 엄마의 메세지와 아빠의 이름으로 몇십만원이 입금되었다는 알림창을 번갈아 보며 나는 다시 소주를 들이켰다.



   열다섯. 아이돌의 꿈을 꾸며 본격적으로 댄스학원에 다니기 시작한게 그 나이였다.그렇게 2,3년 정도 연습생 생활을 하다가 열일곱이나 열여덟 즈음에 데뷔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홀로 서울에서 생활하는 걸 안쓰러워 하는 눈들도 많았지만 나는 꿈을 향해 가고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괜찮았다.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스물세살.

   차라리 군대나 갔다 올까.군대 갔다와서 대학교에 들어갈까.실용음악과라던지 실용무용과 같은 데에 들어가서 졸업장이라도 따면 그다음에는 무언가 또 할 수 있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이제는 정말 한 식구처럼 된 회사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나에게 무어라 말하지 않는다.알고있다.쉽사리 위로할 수 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이제라도 다른 길을 찾는게 어떻겠냐고 하기엔 그들은 나의 노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소주 한 병이 금세 비었다.이럴 줄 알고 한 병 더 사 왔지.나는 망설이지 않고 마저 뚜껑을 열었다.제대로 밥 다운 밥도 먹지 않고 오랜 시간 땀 흘리며 춤추다 소주를 마시니 평소보다 더 빨리 취기가 올라와 어지러웠다.한숨을 내쉬자 뜨거운 알코올의 냄새가 풍겼다.



   그냥 자존심 따위 다 버리고 그냥,그냥 나 데뷔 안 해도 되니까,연습생 때려칠 테니까 취업이라도 시켜달라고 해 볼까.요번에 데뷔하는 애들 매니저라도 할수있지 않을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나를 오랜 기간 이뻐해 주었던 실장님과의 메시지창을 몇 번 띄었다 내리기를 반복하다 말고 나는 픽 웃었다.

   이지훈,정신차려.매니저라니.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고 있어.



   
   지이잉.

   내 손에 들린 핸드폰에 진동이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아 씨,설마 나 술김에 진짜로 실장님한테 메니저라도 하겠다고 메시지 보낸거 아니겠지?나는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몇 번 더 고개를 흔들었다.뿌옇게만 보이던 핸드폰 화면이 조금씩 하얗게 선명해졌다.핸드폰에 떠 있는 것은 다행이 실장님과의 메시지창은 아니었다.그 대신.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돌이 되고 싶어!]

     [어느날 눈을 떠보니 내가 아이돌의 인기멤버가 되어버렸다면?]




    ......나 이런 거 본 적 있다.

   저런 오타쿠스러운 문구로 그 뭐냐,빙의나 환생 같은 걸 하는 웹소설이나 웹툰이 요새 유행이라고 했던 것 같다.웹소설 광고같은 건가.그나저나 내가 아이돌이 되고싶어 하는 건 어떻게 알고 저런 맞춤 광고를 띄워 주는 거야?요새 알고리즘 되게 무섭네.

   어쩐지 소름이 돋아 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가만히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하얀 화면이 까맣게 전멸하다 이윽고 하얗게 변했다.그리고 누군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처럼 탁, 타닥 하는 효과음과 함께 한 자씩 생성되는 글자들.





     

      [예/아니요]




   이게 뭐야.알고 보니 웹소설 광고가 아니라 게임 광고였던 모양이다.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도 되는 모양이지.현실의 이지훈은 아이돌이 될 수 없으니까 게임 캐릭터라도 아이돌로 만들어 보라는 소리야,뭐야. 시x. 하다하다 진짜 별게 다 나를 놀리는 것만 같다. 당연히 No지.내가 아무리 데뷔조에 못들었다고 해도 그렇지 한가하게 게임 같은 걸 할 때가 아니다.나는 오른쪽 검지를 들어 액정을 꾸욱 눌렀다.

   아,시x

   


[예]




   잘못 눌렀다.이래서 술을 끊어야 하는 건데.
   아까부터 자꾸 어지럽고 눈앞도 흐려지는 것 같더라니만.에라,게임이야 지우면 그만이지.





   [이지훈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Dear my Carat에서 열두명의 멤버와 호감도를 쌓아 행복한 엔딩을 맞이하세요.]

   [새로운 퀘스트가 있습니다.]




   뭐야,아이디 만들기 이런 것도 없이 이 게임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바로 적용이 된거지?호감도는 또 무슨 소리야?이거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 아니었어?그리고 튜토리얼도 없이 바로 퀘스트?


   게임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여타 게임과는 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데 화면은 저절로 바뀌었다.





   [퀘스트 성공 조건 :

   <세븐틴>으로 데뷔하여 1년 뒤 신인상 받기!]

   [퀘스트 성공 보상 :

   <세븐틴> 인기도 +100000

   팬덤 의 충성도 +100000

   희귀 아이템 - ???]


   [이지훈 님의 훌륭한 활약을 기대합니다!]




   술 취한거 맞네,맞아.
   안 그래도 자꾸만 감기려 하는 눈에 그냥 힘을 풀어버렸다.그냥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이딴 헛것도 안보이고,잡생각도 안 하겠지.그래.일단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내 인생 어디로 
흘러가면 좋을지 다시 객관적으로 차분하게 고민해보자.


   절로 떨어지는 무거운 머리통을 가누지 못하고 나는 바닥에 웅크려 누웠다.빈 소주병이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이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이돌 그룹 내 연애는 괜찮음
권순영 x 이지훈







  '우리는 Drop it like HOT HOT HOT Oh 지금 Feelin' so HOT'


   갑자기 울리는 귀를 찢을 듯한 알람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익숙한듯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부스스 일어났다.머리를 양옆으로 살살 흔들며 털다가 눈을 비비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하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분명 어젯밤에 홀로 신세 한탄을 하며 소주를 마신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 묘한 기시감은 뭘까.나는 멍하니 방 안을 둘러보다 기시감의 정체를 금방 알아차렸다. 방 안을 꽉 차게 놓여있던 이층침대는 온데간데 없고 낡은 싱글 침대만 있었다.아무리 혼자 데뷔를 했다해도 그렇지,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침대를 빼 간다고?그것도 내가 술에 취해 잠든 사이에?말도 안되는 소리다.나는 벌떡 일어나 방 안 여기저기를 서성였다.



   '이 노래 Burnin' like HOT HOT HOT HOT Boom Brr Boom Boom'


   숙소에는 오롯이 내 짐만 남아있을 뿐이었다.작지만 나름 구색은 갖춘 거실과 현관까지도 나가 보았지만 마치 원래부터 나 혼자 살았던 집인 양 다른 연습생들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Drop it like HOT HOT HOT Oh 지금 Feelin' so HOT'


  게다가 이 기시감의 또 다른 이유.아까부터 시끄럽게 울려대는 저 모닝콜은 내가 설정한 것이 아니다.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 노래는,


'응, 난 너무 뜨겁게 달리고 있어 뜨겁게 뜨겁게 붐 브르 붐 붐'


   정말이지 깜짝 놀랄 정도로 구린 노래였다.나는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태양을 향해 불붙여라 아주 뜨겁게~!!'


   뭐가 계속 뜨겁다는 건지.나는 핸드폰 액정이라도 뜨겁게 만들 기세로 뚫어져라 쳐다보며 손가락이 다 꺾이도록 세게 알람을 껐다.일단 조용해지니 훨신 낫다.숙취가 올라오는 머리를 한쪽 손으로 꾸욱 누르는데
띠링, 경쾌한 종소리 같은 알림음과 함께 허공에 어떤 창이 나타났다.마치 SF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하얀 네모에 하늘색 테두리가 쳐진,꼭 홀로그램 같은 창이었다.



   
   [DAY1 미션 발생!]

   [이지훈 님은 하이브 엔터테이먼트에 길거리 캐스팅이 되고 출근하는 첫날입니다.]

   [미션 : 오전 9시까지 늦지않게 연습실로 출근하세요!]




   하이브 엔터테이먼트라니.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대한민국에 그런 엔터회사는 없었다.나는 손을 들어 내 뺨을 두어 번 짝짝 소리나게 쳤지만 오히려 정신이 더 말똥해질 뿐이었다.


   [오전 9시까지 늦지않게 연습실로 출근하세요!]



   내가 일어날 생각을 하지않자 재촉이라도 하듯 다시 한번 시스템 창이 눈 앞에서 반짝거리며 켜졌다 이내 사라졌다.핸드폰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전 8시.나는 멍하니 지도앱을 켜 하이브 엔터테이먼트를 검색했다. 내 위치에서 하이브 어쩌고 그 회사까지의 길찾기 경로를 찾아본 나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하이브엔터테이먼트는 내가 연습생으로 있는 플디엔터테이먼트와 정확히 같은 위치에 있었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회사 이름이라도 바꾼건가.그럴리가.나는 빠르게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일단 왜 회사 이름이 달라진건지, 저 비현실적인 시스템창은 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