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영혼의 발자취

07. 이상현상, 다가오다. (1)

뒷걸음질하다 차가운 대리석 벽이 나의 등을 가로막았다. 아,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간다면 이런 기분일까?
체온을 담고 흐르던 혈액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착각에 손끝이 차가워졌고, 빠져나간 피는 그대로 목구멍을 막아놓았는지 숨 한 줄기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포식자를 앞에 둔 생쥐가 된 기분은 절대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의 공포감에, 당장이라도 털썩 주저앉을 것 같았다.

“말 좀 해봐. 선배. 어떻게 날 그렇게 잘 알아? 응?”
“어…. 어어어….”

저것이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후들후들 떨리기만 하는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입으로 쉬는 건지, 코로 쉬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호흡이 불규칙하게 내뱉어졌다.
몇 뼘이 되지도 않는 가까운 거리에 내게 바짝 붙은 그것이 내 턱을 틀어쥐고 강제로 시선을 맞추게 했다.
하민이의 검은 눈동자와 달리, 보랏빛으로 번뜩이는 홍채 색깔을 담은, 나사 풀린 시선이 나를 꿰뚫을 듯이 보고 있었다.
그래, 저건 광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눈빛이었다.

“대답 안 해줄거야? 내가 물어보고 있잖아.”
“악!!”

어깨를 강하게 틀어쥔 손길에 비명을 지를 뻔 할 정도로 아파왔다.
그 손길이 나를 벽에 강하게 찍어 눌렀고, 돌로 된 벽에 머리가 부딪쳐 삐-하는 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뇌진탕 회복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이번엔 머리뿐만 아니라 눈이 꽉 감겨 도저히 뜰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강타했다.

“생명줄이 얼마나 버틸지 궁금한데. 실험 좀 해볼까?”

인간의 신체에는 명치라거나, 목, 관자놀이, 정수리 등 수많은 급소가 있다. 목이라는 급소에 커다란 손이 거침없이 파고들어 자비 없이 쥐어짜듯 힘을 주니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 나를 덮쳤다.
정맥에서 맥박 소리가 울리는 부분을 꽉 틀어잡고 있으니, 처음 느끼는 고통에 반사적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컥…. 그, 그만….”
“이렇게 숨통이 조여진 채로 네가 얼마나 버텨낼까? 나는 엄청 궁금한데, 너는?”

손톱을 세워 내 목을 틀어쥔 손을 긁어내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숨이 들어갈 기도가 꽉 막히는 상태가 지속되자, 머지않아 시야가 새카맣게 물들었다. 억지로나마 실눈을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나…. 여기서, 죽는 건가?’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느껴지는 건 절망이라는 감정과 죽음의 손길이 서서히 다가오는 순간에 몰려오는 공포감.
가지고 있던 기억이 책장을 냅다 엎어버린 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마등이 이런 걸까?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기억 사이에서 처음 보는 기억이 몇 장 떨어져 내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찾아갈게요.’

…. 나와 같이 있던 세 명의 또 다른 사람들에게 외치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어떤 모습이든, 어떤 사람이 되든 내가 꼭 찾아가서 내가 지켜줄게!! 그러니까…!’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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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떨어지는 눈물은 죽고 싶지 않다는 갈망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뭘까? 이건.

‘쾅!!’

꽉 막힌 숨통이 풀린 것은 아주 살벌한 소리와 동시에 목을 틀어쥔 손길이 사라졌고, 나는 땅바닥으로 처박히듯 쓰러졌다.
갑자기 폐에 가득 들어온 숨에 사레가 들렸다.

“콜록! 콜록!!”

목에 가해지는 압력이 사라졌지만, 고통은 그대로였기에 보호하듯 손바닥으로 내 목을 감싸며 숨을 골랐다. 어느새 끊겼다가 밀려 들어온 숨이 익숙해질 무렵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을 가득 채운 것은, 검은색이었다. 머리카락부터, 옷, 신발 끝까지 새까만 검은색.

“이 개새끼가….”

흠칫, 기억 속 목소리가 이런 욕설을 담은 살벌한 어투로 귀에 들어올 줄은 상상조차 못 했기에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분노에 가득 찬 숨소리는 마치 목을 긁으며 으르릉 거리는 포식자의 경고와 같았는데, 저 분노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감히 누구를 건드려?”

누워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앉아 고개를 쭉 올렸다. 그제야 차갑게 싹 굳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말랑하게 웃거나, 삐진 티만 낼 줄 알던 얼굴이 당장이라도 누구 하나 찢어 죽일 기세인 살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까뜨득, 하고 이 악무는 소리와 함께 목에 선명하게 올라온 핏줄이 그가 얼마나 분노에 차 있는지 나타내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목을 꽉 조이던 놈이 건너편 벽에 처박혀 있었다. 부서져 있는 벽에서 돌가루가 툭툭 떨어져 내렸다.

“뭐야…? 분명히 발이 묶였을 텐-”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하민이의 도플갱어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눈으로 쫓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 진짜 하민이?가 순식간에 그것이 처박힌 벽으로 이동해있었다.
살짝 틀어진 몸에 허공에 떠 있는 발, 그대로 몸을 뒤집어 반동을 담은 발차기가 도플갱어의 가슴 위에 명중했다. 정확히, 왼쪽 가슴으로.

“헉…!”

갈비뼈가 박살 날 것만 같은 타격음이 들림과 동시에 그것은 순식간에 부서졌다.
단순히 뼈가 부서졌다는 뜻이 아니다. 조립한 레고가 박살 난 것처럼, 몸의 형체가 뒤바뀌며 그것이 서 있던 자리엔 작은 짙은 녹색의 큐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땅 위를 구르던 큐브들은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마치 그것은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듯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부서진 벽과 내 몸에 남아 있던 고통이 지금까지 있던 일이 진짜라고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초현실적인 일들이 한두 개도 아니고 여러 번 들이닥치자 더 이상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앞에 있는 일부터 처리해야겠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상대가 사라졌음에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서 있는 까만 뒤통수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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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민이야?”
‘흠칫’

방금까지 살기 어린 기세로 욕설을 내뱉으며 공격을 가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움찔거리는 뒤통수만 봐도 깜짝 놀랐다는 게 다 보였다. 흠칫하며 떠는 몸을 따라 그의 새싹 같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내 목소리를 들은 게 분명할 텐데, 하민이는 아직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표정이 보이는 기분에 눈을 가늘게 뜬 채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 깜냥이를 자극하지 않고 뒤돌게 하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구별할 수 있으면서도 이쪽으로 오게 할 수 있을 만한 방법.

“아야….”
“!!”

울먹임을 섞어 아파하는 목소리를 내며 아까 졸린 목을 쓰다듬었다.
효과는 굉장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눈을 크게 뜬 하민이가 냅다 이쪽으로 뛰어왔기 때문이다.

“괘, 괜찮아요? 형? 많이 아파요? 어, 어떡해….”

안절부절못하며 차마 내 몸에 손대지 못하겠다는 듯, 양손이 허공을 휘적이고 있었다.
멍이 들었을 게 분명한 내 목을 뚫어져라 보더니, 본인이 당한 것처럼 울컥한 표정을 지은 하민이의 양 뺨을 냅다 손바닥으로 쥐어 눈을 맞췄다.

“잡았다.”
“어어…?”
“도망가지 마. 유하민이.”
“….”
“야, 나한테 할 말 없어?”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이 말하자, 하민이는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찐하민이 같은데?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의 눈싸움을 하고 나서야, 하민이가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져서 긴장 될 때 쯤에서야 작게 대답이 들렸다.

“…. 그….”

과연 사람들 머릿속에서 자기 존재를 싹 지우고 며칠을 사라졌던 저 초자연적 존재 유하민이는 오랜만에 본 나에게 과연 뭐라고 말할까? 긴장감이 돌아 식은땀이 날 것 같았는데….

“유 빼고 하민이라고 불러주면 안 돼여?”
“….”
“…. 야라고 하지 말구우….”

맥이 빠졌다.

확신한다. 쟤는 백 퍼센트 내가 아는 하민이가 맞다.
사고 친 어린이처럼 무릎을 곱게 꿇어앉고 눈알을 도르륵 굴리며 돌아온 말이 저거라니…. 어이가 없어진 기분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에라이, ‘며칠을 잠 못 잘 정도로 온갖 생각을 하게 만든 벌이다!’ 라고 생각하며 냅다 하민이의 양 볼을 쭉 잡아당겼다.

“흐어어- 아하여 혀어엉”
“이 쫘식이 말이야. 내가! 어? 얼마나! 어? 며칠을! 어!!? 생각을!! 어!!!”

말랑말랑한 볼따구를 쭉쭉 늘리며 그동안 쌓인 한을 풀어냈다. 하지만 조금 전 사람(?)을 벽에 처박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저항 하나 없이 그냥 당기면 당겨지는 대로 어리바리한 하민이의 모습에 조금씩 허탈감이 밀려왔다.

“으휴, 내가 얼마나…. 어?”

…. 어라? 지금까지 정신없어서 못 느끼고 있었는데, 진정된 지금 상태에서 다시 보니…. 하민이는 멀쩡한 모습이 아니었다.
목에 있는 빨간 실선…. 낚싯줄로 목을 감아 확 잡아당긴 것 같은 상처가 있었다.

“허어억…! 너, 너! 여기 왜 이래!!”

입을 떡 벌리며 경악하면서 붙잡고 있던 뺨을 놓고 천천히 하민이의 목을 감쌌다. 딱딱한 딱지의 감촉이 느껴지는 걸 보면, 다친 지 상당히 시간이 지난 모양인 듯하다.
목을 만지작거리고 있음에도 하민이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상처에만 시선이 갔던지라, 그 아이의 표정을 살피지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민이가 나를 냅다 꽉 끌어안았다.

“우왁! 뭐, 무슨-”
“형.”

품에 냅다 갇혀서 꽉 끌어안아지자 당황해서 하민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지만 끌어안는 힘은 더 강해졌고, 이걸 밀쳐내야 하나 고민할 때쯤에….

“….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 한마디에 몸이 굳어버렸다.

며칠 동안 수많은 망상에 잠 못 들게 했던 복수를 하고 싶었는데, 그 생각이 싹 사라질 정도로.

참 애처롭게 들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