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영화 보자]
일요일 아침에 온 문자였다.
나는 잠이 덜 깬 채 침대에 누워 눈을 끔뻑거리며 화면을 쳐다봤다.
음. 친구끼리도 영화는 보지. 그냥 영화 보자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고백을 들은 뒤에 이런 문자를 받으면 아무래도 좀 다르게 느껴지지 않나.
잠이 덜 깨서 눈을 잠시 감고 있다가 다시 잠들 뻔했다.
옆으로 떨궈둔 폰을 다시 들고 토독토독, 답장을 쳤다. 계속 손이 미끄러져 오타가 났다.
[무슨 영화]
기다렸다는 듯 답장은 금방 왔다.
[아무거나]
[나 방금 일어났는데]
[2시간 뒤면 충분하지?]
그 답장에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났다. [ㅇㅇ] 두 글자만 보내고는 후다닥 씻으러 방 밖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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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같으면 자주 입는 청바지를 입었을 것이다. 영화 보러 가는 데 치마까지 입을 일은 없었다. 그런데 옷장 앞에 서자 손이 이상하게 치마 쪽으로 갔다.
데이트면 … 이게 맞지 않나? 아니면 그냥 쪽팔려 죽어버려야겠다.
큼, 목을 가다듬곤 여성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는 원피스를 입었다. 나만 이렇게 꾸미고 나온 거면 창피하고, 그리고 억울해서 죽을지도 몰라.
약속 시간에 맞춰 대문 밖으로 나가자 골목 끝에 익숙한 검은 차가 서 있었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건호가 내렸다.
브라운 체크 셔츠에 재킷.
너무 차려입은 건 아닌데, 신경을 쓴 티가 났다. 머리도 평소보다 조금 정리되어 있었다.
흠, 얘도 꾸미고 나왔네. 어쩐지 입술 꼬리가 씰룩 올라간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게, 이게 설렘이구나 싶었다.
건호가 내 앞에 섰다. 얘도 살짝 얼굴이 상기된 느낌이었다.
“기다렸어?”
“방금 나왔어.”
건호의 시선이 잠깐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예쁘네.”
“ㅁ…뭐?!”
“예쁘다고.”
“너, 너도 배우 되더니… 옷 태가 장난 아니네.”
“고마워.”
“빨리 가. 영화 늦겠다.”
진짜 오글거리는, 아니 느끼한? 말을 내뱉는 그 모습에 당황해서 혀가 자꾸 꼬였다. 말은 왜 더듬어! 웃겼겠지. 건호는 내 모습에 웃으며 뒤따라 차로 왔다.
-
영화관은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다. 로비에는 예고편 소리와 팝콘 냄새가 섞여 있었다.
건호는 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동작이라 오히려 눈에 들어왔다.
“뭐 보고 싶은 거 있어?”
“예매해놨어.”
“보고 싶었던 영화야?”
“응, 재개봉한 거라.”
그러고 보니 무슨 영화인지 묻지도 않았네. 너무 데이트한다고 신나서 달려나온 것 같잖아! 그치만 표정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예매해둔 표를 끊고, 음료를 사고, 반반으로 시킨 팝콘을 들었다. 한쪽엔 음료, 한쪽엔 팝콘을 드니 꼭 욕심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한 손엔 표를, 한 손엔 음료를 든 건호가 손을 내밀었다.
“줘.”
“됐어. 너도 손 없잖아. 표 보여줘야 돼.”
“떨어뜨릴 것 같은데.”
그 순간 팝콘 몇 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떨어진 팝콘을 허망히 쳐다보다, 조용히 팝콘을 건넸다. 달달하면서 짭짤한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네가 표 들어.”
건호가 건네주는 종이 표를 받아들었다. 곧 상영 시간이 다가와서 입장하는 곳으로 가려는 순간,
작은 소리가 들렸다.
찰칵.
순간 내가 찍힌 기분이라 나는 고개를 돌렸다. 기분 탓인가? 셀카나 인증샷을 찍을 수도 있는 건데.
조금 뒤 또 소리가 났다.
찰칵.
이번엔 우리 쪽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휴대폰을 들고 있던 사람이 황급히 화면을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바로 시선을 피했다.
표정과 손끝이 조금 굳었다.
건호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걷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들어갈까.”
“응.”
상영관 안은 어두웠다.
자리에 앉고 나서야 조금 숨이 놓였다. 방금, 기분 탓이었을까? 아니면 듣기만 하던 파파라치나 사생 같은 거였을까.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틈도 없이, 귓가에 강렬하게 꽂히는 음향과 함께 광고가 시작되었다.
-
영화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거의 명작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마음이 찡해졌고, 그 느낌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뻗어 가는 기분이었다.
“재밌었어?”
건호가 낮게 물었다.
“응, 나 이런 거 좋아하는데.”
“난 벌써 세 번째야. 혼영만 했는데.”
같이 보니까 좋네. 뒤이어 들려온 말에 홱 고개를 돌려 건호를 쳐다보니, 건호는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다시 모자만 쓸 뿐이었다.
재밌는 영화를 같이 보고, 영화 토크도 함께 하고. 정말 데이트 같았다.
“밥 먹을래?”
“응, 배고프다.”
“근처에 괜찮은 데 있어.”
식당으로 가는 길에는 계속 영화 이야기를 했다. 어떤 부분은 연출이 좋았다. 그 부분은 CG가 아니라 실제로 촬영한 거라더라, 등등의 이야기를.
사람들의 소음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만의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도 중간중간 귀에 꽂히는 소음이 있었다.
“헉, 배우 안건호 아니야?”
그 말이 들려올 때마다 조잘거리던 입은 멈칫, 행동을 멈추게 되었다.
식당에서도 비슷했다.
처음엔 건호의 배우 생활 이야기를 들었다. 촬영장에서 문이 안 열려서 NG가 난 이야기라던가, 감독님이 술을 마시고 촬영장에 지각을 한 이야기라던가. 나는 웃거나 같이 분노를 해주거나 했다.
중간중간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쪽을 바라보면 꼭, 핸드폰을 우리 쪽 방향으로 든 사람들이 있었다.
건호를 쳐다보니 익숙한 듯 보였다. 나는, 처음인데도.
나온 음식들을 깨작깨작, 그리고 대화를 몇 번 이어가며 식사는 끝이 났다.
음식은 맛있었다. 아마도. 사실 조금은 피곤했다.
식사를 거의 끝낼 때쯤 여자애 둘이 테이블 근처로 다가왔다.
“저기… 혹시 안건호 배우님 맞으세요?”
건호는 짧게 나를 봤다가 그쪽을 봤다.
“네.”
“저 팬이에요…!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정중하게 묻는 질문에 건호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가 생긋 웃었다.
“죄송해요. 지금은 개인 시간이라서요.”
“아, 네…! 죄송해요. 진짜 팬이에요! 잘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들은 멀어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봤다.
나는 곧 포크를 내려놓았다. 직접적으로 다가온 사람 때문인지, 입맛이 싹 달아났기 때문이다.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분 정도 입에 대지 않은 음식은 식어갔고, 식기로 괜히 달그락거리기만 하고 있을 때 건호는 이제 일어나자며 물었다.
“카페 갈래?”
“오늘은 됐어.”
건호는 잠깐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집에 갈까.”
“응.”
차에 타자마자 공기가 조용해졌다. 그렇지만, 편안해졌다.
차가 큰길을 벗어나 조금 한산한 도로로 들어섰을 때 건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불편했지.”
멈춘 차 속에서도 나는 창밖만 보고 있었다.
데이트하는 동안에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 같아질까 봐. 그리고 정말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영화관 안에서 좋았던 것도 사실이고, 같이 밥 먹으면서 웃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응.”
건호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이야기를 했다. 이게 건호 잘못이라곤 할 수 없으니까. 그냥 속이 답답해져 갔다. 그럼 나는 이걸 누구한테 말해야 하는 건지.
“처음엔 내가 예민한 줄 알았어.”
“…….”
“영화관에서 찰칵 소리 났을 때도 그냥 착각인가 했는데.”
“…….”
우리 둘은 잠시 정적 속에 있었다. 서로 알고 있을 것이다. 말해도 풀릴 일은 아니라는 걸.
나는 애꿎은 치마 끝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 오늘 데이트인 줄 알았거든.”
“데이트 맞아.”
이번엔 건호가 바로 대답했다.
나는 그제야 그를 봤다. 건호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영화 보자고 한 거 그냥 한 말 아니야.”
“…….”
“근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미안한 건지, 눈을 피했다.
“나는 네가 일부러 그런 줄 알았어.”
“뭐가.”
“나한테 보여주려고 한 건가 싶었어. 너랑 있으면 이런 거 감당해야 한다고.”
“…그런 건 절대 아니야.”
건호는 나를 다시 똑바로 쳐다봤다. 그 눈동자엔 정말 진심이 담겨 있는 듯했다.
배우라고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의심은 이내 사라졌다. 안건호다. 내 앞에서는, 거짓말 같은 거 못 하는 안건호의 눈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곤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오늘 좋았어.”
“…….”
“근데 기분 나빴던 것도 사실이야. 네 탓을 할 수도 없는 일인 거고.”
“…….”
“그래서 복잡해.”
“…….”
“오늘은 그냥 들어갈래.”
건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차에서 내렸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데도 뒤에서 차가 출발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방으로 올라가 불을 켜지 않은 채 창가로 갔다.
커튼 사이로 밖을 봤다.
건호의 차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걸 보고 있다가 조용히 커튼을 쳤다.
침대에 누웠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문자를 받았을 때의 기분도, 건호가 예쁘다고 했을 때의 기분도, 꽤나 힘주고 나와 나를 설레게 했던 그의 머리와 옷차림도, 영화관 안에서 잠깐 편했던 순간도. 그리고 식당에서 내 자리를 잃어버린 것 같았던 기분도 전부 뒤섞였다.
좋아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더니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이리 어려운 일인 줄은 몰랐다.
-
골목 아래 차 안에서 건호는 한참 동안 시동을 끄지 못했다.
핸들 위에 팔을 얹고, 그 위에 이마를 묻었다.
이게 아니었는데.
한숨이 푹, 나왔다. 마치 땅이 꺼질 듯이.
그냥 같이 영화 보고, 밥 먹고, 웃고 싶었다. 남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 좋아하는 사람과.
그게 자신에게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잠깐 잊었다.
건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여주를 괴롭히나.
그 생각이 들자, 한동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