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가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습니다.
- 대체 무슨 글인지 작가도 모릅니다.
- 왜 썼는지 작가도 모릅니다.
-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 가볍게 읽어주세요... 어차피 개연성 개나 준 엉망진창인 글입니다...
- 여주의 원래 이름이 나오는 부분은 일부러 비워뒀습니다. 독자님들 이름 넣어서 읽으시면 될듯...
-TRIGGER WARNING! 2010년대 초에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어느 날 소설 속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W. 그쁨
시간은 멈추는 법이 없다. 설령 이곳이 현실이 아닌 소설 속 세계일지라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되려 이곳에서의 시간은 현실과는 다르게 들쑥날쑥하기까지 해서, 어떤 날은 하루아침에 이틀이, 어떤 날은 일주일이, 또 어떤 날은 두 달이란 시간이 흘러가버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1학년 3반이었던 내가 며칠 새 2학년 1반이 되고, 또 며칠 새 3학년 6반이 되는 불가능한 일들이 일어났다. 은하별고등학교 3학년 6반 김연주, 두 번째 고3이라는 끔찍한 일을 겪기 시작한 지 어연 한 달째, 드디어 김여주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나, …태형이 좋아하는 것 같아…!"
졸음으로 가물거리던 눈이 번쩍 뜨였다. 반쯤 놓고 있던 샤프를 움켜쥔 내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뭐라고?! 그 기세에 눌린 김여주가 주춤하며 뒤로 물러나는 것을 나처럼 핏발 선 눈을 부릅뜬 권연희가 막아섰다. 뭐, 뭐, 뭐? 너 방금 뭐라 그랬어?! 하며 묻는 목소리는 다급하기까지 해서, 당최 우리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김여주는 다시 한번 말했다. 나…,
"태형이… 좋아하는 것 같다구…,"
신이시여, 시발, 드디어…! 코 끝이 찡해지는 느낌에 급하게 콧잔등을 움켜쥐었다. 권연희는 고개를 젖힌 채 코를 훌쩍였다. 중간에 낀 김여주만이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그런 김여주의 옆에 찰싹 붙어 이 모든 상황을 가만히 구경하던 이유진이 끼어들었다. 뭐야, 뭐야,
"왜 이렇게 과민반응들이야? 여주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데, 싫어?"
"뭐?! 아니?!"
"싫을 리가 있겠어?!"
"어…, 그럼 다행이긴 한데…."
…혹시 너네 울어…? 당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이유진이 물었다. 넌 이해하지 못할만한 그런 사정이 있어…! 나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권연희를 바라보았다. 감격에 젖은 권연희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꼬옥 붙잡은 채 감격의 눈물을 한 방울 흘려보냈다. 시발, 드디어…!
그러니까, 여고생이라면 한 번쯤 할 법한 김여주의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발언에 우리가 이렇게까지 과민반응을 보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고등학교, 아니 어쩌면 중학교 시절부터 쭉 이어져온 김태형의 순정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질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생겼다는 데서 오는 감동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개인적인 사정이 잔뜩 들어간 이유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권연희와 나를 눈물짓게 만든 그 이유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자면, 시간은 나와 김여주의 납치 사건이 있던 날의 바로 다음 날, 내가 권연희의 집에서 뭉개진 베개를 얼굴에 올린 채 눈을 뜬 날로 거슬러올라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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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유독 특별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게 끝이야? 뭐 더 없어?"
"…없는데."
"그거 참 어디 웹 소설 사이트에라도 올렸으면 뭐 이런 허무한 결말이 다 있냐고 욕먹었을법한 결말인데."
"……."
권연희의 입이 댓 발 튀어나온 것도 같았지만 내 알바는 아니었다. 얼음이 반쯤 녹은 딸기 스무디를 쪼로롭, 빨아마셨다. 밍밍한 맛이 기분 나쁘게 입안을 맴돌았다. 아니 뭐, 오히려 좋을 수도…. 하는 내 말에 권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신 완결까지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뭐…."
"그러니까. 김여주랑 김태형이랑 사귀고 첫 데이트하고 키스 딱 하면 짠! 완결입니다! 이거 아니야?"
"…맞는 말이긴 한데 왜 기분이 나쁘지?"
"원래 사람은 너무 맞는 말만 들어도 기분 나빠한다잖아."
학교를 빼먹고 거의 한나절을 권연희와 붙어있었단 점에 있어서 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을 순 있겠지만, 그 한나절이란 시간 동안 산에 갇힌다던가, 납치를 당한다던가 하는 상황이 아닌 고등학생들이 시간을 보낼 법한 것들로 채워졌단 점에서 꽤 평범한 하루였다고 할 수 있겠다. 친구네 집에서 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고, 점심까지 또 늘어지게 누워 수다나 떨다가, 햄버거 먹고 싶다-, 하는 내 말에 먹으러 갈래? 하는 권연희를 따라 버거 왕에서 햄버거를 먹고, 그 뒤로 빙수와 티라미수 그리고 스무디까지 완벽하게 조져가며 수다를 떠는 하루가 그랬다.
"그냥 대충 '김여주와 김태형이 사귀기로 했다. 완벽한 데이트를 했다.' 이렇게 쓰고 치우면 안 되나?"
"되겠니? 나름 개연성이랑 줄거리가 있어야 이 세계가 내가 쓴 대로 흘러갈 수 있어."
"진짜 귀찮네…."
예전 이야기를 꺼내봤자 좋은 분위기로 흘러갈 리 없는 우리 사이에 대화의 주제가 자연스레 소설 쪽으로 흘러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젯밤의 대화로 소설 속에서 살고 싶단 생각이 바뀌기라도 했는지, 소설 밖으로 탈출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권연희 덕에 더더욱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뭐, 나도 소설 속에서 다시 한번 입시지옥에 빠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기꺼이 권연희의 장단에 어울려주었다. 실상 이 세계에서 나가는 방법을 모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소설을 완결시키는 일 말곤 없었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선, 하루빨리 이 소설을 완결시키는 게 꽤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권연희가 소설의 전개를 조금이라도 빠르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소설을 뜯어고쳐가며 말이다. 문제는, 소설을 뜯어고치는 것이 상당히 번거롭다는 점이었다. 김석진, 박지민, 그리고 전정국이 이 팬픽…, 아니, 소설에 대해 알고 있을 만큼 그때 그 시절 여고생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이 소설은 이미 완결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미 다 짜여진 이야기를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뜯어고쳐진 장면에 대한 나름의 개연성이 필요하고, 소설의 흐름이 자연스러워야 하며, 원래의 소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들이 존재하는 만큼 이야기를 뜯어고치는 게 까다로워진 것이다.
"그 조건들을 다 끼워 맞춰서라도 날 죽이려 한 거야? 진짜 지극정성이다. 이건 박수를 안 칠 수가 없는데?"
"아오, 미안하다고!! 평생 우려먹을 생각이지 너!!"
"당연하지~"
권연희의 매운 손바닥이 내 오른쪽 팔뚝을 강타하는 탓에 나는 악! 하는 비명을 질러야 했다. 아무튼, 그런 조건들을 다 고려해가며 소설을 뜯어고쳐야 하니, '완결'이라는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권연희는 말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하는 내 말에 권연희가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치? 그러니까 의견 좀 내봐.
"무슨 의견?"
"김여주랑 김태형을 이어줄 명분. 생각해 봤는데 딱히 떠오르는 장면이 없어서…."
"뭐…, 대충 남자친구랑 해봤던 것들 끼워 넣어도 괜찮지 않아?"
"……."
"…설마 모쏠?"
이번엔 왼쪽 팔뚝이었다. 팔뚝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아오, 아파. 그냥 대충 적어! 클리셰 다 때려부어, 뭐 출판할 것도 아닌데 그런 걸 고민하고 있어! 내가 여기 와서 본 장면만 몇 갠데, 그거 다시 우려먹어도 완결까지 금방이겠다!"
"뭐! 뭘 봤는데!"
"매점에서 염병하던 거! 짝피구 때 염병하던 거! 체육대회 때 염병하던 거!! 그런 거 잘 쓰더만! 덕분에 내 눈만 괴로웠다!!"
테이블에 엎어져 칭얼거리듯 내뱉은 말에 권연희는 딱히 납득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여전히 칭얼거리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는 내가 썩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안 드는지 됐다며, 꺼지라며, 나머지 줄거리는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을 내놓곤 자리를 뜨려는 것이었다. 스무디가 담겨있던 컵을 반납하며 툴툴거렸다. 도와줘도 난리야, 하는 말에 도움이 안 돼, 하며 권연희가 맞받아쳤다. 그러면서도 카페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내 손에 포장한 티라미수를 들려주는 꼴이 제법 귀여웠다. 츤츤대기는.
글을 좀 끄적여보겠다며 권연희가 훌쩍 가버린 탓에 시간이 붕 떴다. 하교 시간에 가까운 것을 보아하니 어쩌면 내 시간이 붕 뜬 게 권연희 때문이 아닌 권연희 덕분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김석진이나 만나 연애 놀음이나 하라는 그런 무언의 배려일지도…. 정처 없이 떠돌 뻔했던 발걸음이 정해졌다. 학교가 끝마칠 시간에 맞춰 정문에 도착해 터덜터덜 하교하던 김석진을 잡아챘다. 무슨 반사작용인 것마냥 날 보자마자 화르르 불타는 귀가 꽤 귀여웠다. 여느 풋풋한 커플 못지않은 데이트를 하는 내내 진짜 고등학생도 아니면서 고등학생인 것처럼 구는 김석진이 웃겨 한참을 웃었더랬다.
"고등학생 땐 교복 입고 놀이공원 데이트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안 해봤어?"
"…넌 많이 해봤나 보다?"
"……."
"야."
"아 농담이야, 농담."
열이 받아 치켜든 주먹을 김석진이 한 손으로 감쌌다. 장난, 장난, 하며 손깍지를 끼는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손등에 짧게 입 맞춘 김석진이 웃었다.

"너랑만 할게,"
그게 뭐든,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리며 말하는 그 모습에 나는 화도 못 내고 그의 손을 힘주어 잡을 수밖에 없었다. 왐마야, 여우가 따로 없어!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던 것 같지만 아무튼, 난 그날 하루도 빙의된 채 살았던 다른 날들과 별다를 게 없었던 날이었단 말을 하고 싶었다. 데려다주겠다는 김석진을 굳이 거절하지 않고 집 앞까지 달고 온 것도 그랬다. 거기서 안색이 아주, 아주 새하얗게 질린 권연희만 마주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끝까지 평화로운 날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뭐야, 권연희?"
한참 전에 집으로 돌아간 애가 남의 집 앞에서 안색이 새하얘진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으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목소리에 의아함을 담아 이름을 불렀더니, 어째서인지 그렁그렁 해진 눈을 하고서는 고개를 돌린다. 집에서 쫓겨나기라도 했나? 너 우냐? 하고 물을 새도 없이 권연희는 나와 김석진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더니, 웬 공책 하나와 볼펜 하나를 쥔 손으로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고는 말하는 것이었다.
"야, 망했어."
"뭐가? 아니, 근데 너 괜찮은 거 맞…,"
"글이 안 써져."
"뭐?"
"글이 안 써진다고오…."
대체 이게 무슨 큰일인가 싶겠지만, 적어도 소설 속에 갇힌 상태인 우리에게는 진짜 세상이 멸망할지도 몰라! 급의 큰일이라는 사실을 좀 알아주었으면 한다. 망할, 네가 작간데 글이 안 써지면 어떡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권연희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래도 탈출은 아주 먼 미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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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일교차가 심한 계절이었다. 대낮엔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더운 날씨였을지라도, 해만 졌다 하면 겉옷 좀 챙길걸…! 하는 후회가 들게 만드는 그런 계절. 그랬기에 나는 반팔 차림의 권연희가 감기에 걸리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그를 우리 집으로 들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반절도 따라가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던 김석진은 덤이었다.
"자, 물."
패닉 상태이던 권연희를 소파에 끌어다 앉혀놓고 미적지근한 물을 먹인 뒤에야 나는 권연희가 말한 '글이 안 써진다'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말한 대로 완결을 앞당기려고 김여주가 김태형한테 반하는 시점을 앞당기고 싶어서,"
"응."
"원작에서 2-3년에 걸쳐 나오는 내용을 반년 안에 일어날 일들로 바꿨는데,"
"응."
"…그랬는데 김여주가 김태형한테 반하질 않는다고?"
"응…."
솔직히 말하겠다. 반절은 이해했고 반절은 못 알아들었다. 반하도록 만들었는데 반하지 않았다는 건 뭐야? 그냥 '김여주는 김태형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이런 문장만 쓰면 끝나는 거 아니야?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이 상황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겸해 들은 김석진마저도 권연희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한 것 같았다. 다행이다, 나만 멍청한 게 아니라서. 아리까리한 표정으로 고개만 갸웃거리는 우리를 보다 못한 권연희가 한숨을 푹 내쉬곤 품에 소중히 끌어안고 있던 공책 한 권을 내려놓았다. 오랫동안 사용한 듯 군데군데 낡은 티가 나는 공책이었다.
"그래, 직접 보는 게 더 빠르겠지…."
익숙하게 공책을 가른 권연희가 빠른 손놀림으로 종이 몇 장을 휙휙 넘겼다. 눈으로 이런저런 문장들을 담다가, 이내 3분의 2 정도 되는 지점에서 멈춘 권연희가 손가락을 뻗어 노트 안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읽어봐, 하는 말에 나는 김석진과 머리를 맞대고 글씨를 읽어내렸다.
"김태형이 김여주의 손목을 잡았다. 꺅! 하며 김여주가 비명을…,"
"야!! 누가 소리 내서 읽으래?!"
이번엔 등짝이었다.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등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감각에 나야말로 비명이 나올 지경이었다. 끙끙거리는 날 새침한 표정으로 보던 권연희가 공책을 뺏어들었다. 익숙하게 공책의 한 페이지를 펼친 권연희가 아직 비어있는 부분에 볼펜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 이제 김여주가 김태형한테 반했다는 문장만 쓰면 되는데, 그걸 쓰면…
'김여주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김태형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ㅈ는 생각……. 어쩌ㅁ …ㅅ이 김…ㅎ을 좋……ㄴ게 아……,'
"…뭐야?!"
글씨가 지워졌다.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져버린 문장에 나와 김석진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공책을 바라보았다. 그런 우리의 반응에 한숨을 푹, 내쉰 권연희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글이 안 써진다고 말했잖아…."
아니, 이렇게 물리적인 상황을 말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
권연희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글씨가 스스로 지워지는 건 소설의 줄거리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경우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건 잘 써진단 말이야,"
권연희가 볼펜을 들고 공책에 무어라 휘갈겼다. '김연주가 김석진의 볼에 입을 맞췄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어 그대로 문장을 만들었다. 글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볼 뽀뽀라니, 하는 생각은 내 소중한 등짝을 위해 속으로 묻어두었다.
"흐름상 더 자연스러운 내용은 김여주가 김태형한테 반했다는 쪽인 것 같은데? 김태형이 김여주한테 플러팅치는 장면에 갑자기 우리가 뽀뽀를 하는 게 더 이상하잖아."
"그건… 캐릭터마다 각각 특징이 있어서 그런 건데…,"
권연희가 답지 않게 우물쭈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런 거야, 너네는 여기가 소설 속 세계라는 걸 알고, 이미 줄거리가 바뀌는 경험도 많이 해봤어.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여기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아'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면 나는 너희들이 나오는 장면을 고치는 게 쉬워져. 웬만한 상황에서도 너희들은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 할 테니까. '아, 소설 속이니까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하고 가볍게 넘긴단 말이야."
"근데 김여주는 아니다?"
"응. 김여주는 빙의자가 아닌 등장인물이니까. 걔한테는 여기가 현실이고,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그럴 리 없다'라고 생각하게 돼. 그래서 김여주가 등장하는 장면이나 걔 감정을 서술할 땐 더 신경을 써야 돼. 쉽게 문장이 지워지니까. 내가 아무리 김여주에게 '넌 김태형을 좋아해'라고 말해봤자 김여주가 '그럴 리 없다'라고 생각하면 다 소용없는 거야."
"잠깐, 어차피 원래 소설에서는 김여주랑 김태형이랑 이어지잖아. 근데 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데?"
"요지는 이어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이어지느냐니까…. 김여주는 이미 김태형한테 호감이 있어. 근데 좋아한다고는 생각 안 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게 말이 되는 일로 만들어주는 건 시간인데, 그걸 앞당겨서 김여주에게 김태형을 좋아하라고 하니까 안 먹히는 거야."
…이쯤 되면 김태형이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미 김태형에게 푹 빠질만한 일들도 몇 번 있었다며? 나는 권연희의 공책을 뒤적거렸다. 김석진과 데이트를 즐기는 고작 몇 시간 동안 권연희는 벌써 수십 개의 설렘 주의 에피소드를 적어두었다. 일반적으로 '아 이 정도면 썸이지~'하는 사이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 꽤 많았다. 그래, 그럼 이제 사귀기만 하면 되겠네!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김여주와 김태형의 서로에 대한 호감도는 착실하게 쌓여가고 있었단 말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내 머릿속에서 어떤 가정이 하나 떠올랐다.
걸스 토크의 가장 주된 주제라 함은 바로 연애 아닐까?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 여자친구들끼리 그 '연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꼭 이런 유형의 사람이 있다.
"…야, 야, 혹시나 해서 묻는데…,"
최악의 가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김여주 모태솔로는 아니지? 연애해봤지? 그치?"
"……."
"아 제발."
자기감정을 헷갈려 하는 애들.
연애는 고사하고 자기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확신부터 없는 애들, 꼭 하나씩 있다. 이게 연애 감정인지도 모르는 애들. 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누구의 머리를? 김여주의 머리를…. 그렇다, 우리의 순진한 여주인공 김여주는, 여느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답게 남들이 겪지 않을법한 경험들, 가령 납치라던가, 왕따라던가, 화분에 머리를 맞는 일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다 겪어봐놓고, 제일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못 해본 거였다.
"…우리 여주가 천연이라니…."
'연애', 딱 그거 하나만 못해봐서 날 이렇게 힘들게 만든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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