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아침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일어나 커튼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고요하기만 하던 크나큰 저택에도 아침 햇살이 조금씩 새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침대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시니, 깨우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그가 아가씨의 방으로 향했다.
예상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아가씨는 침대에 누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아가씨의 긴 속눈썹이라던가, 입을 조금 벌리고 잠든 모습을 미소지으며 바라보다가 그녀를 조심스레 흔들어 깨웠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벌써 7시예요."
"으으.. 5분만...."
"그러지 말고, 얼른 일어나세요. 오늘은 대신 마카롱 2개 더 드릴 테니까요. 어서요, 네?"
"아..아니 그렇게 말하면.. 알았어!"
그녀는 잠자코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하녀들이 그녀를 씻기고 입히는 동안 그는 주방으로 가 그녀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무엇으로 할까, 하다가 그는 팔을 걷어붙이고 어느새 맛있는 향기를 풍기는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은 뭐야?"
"가볍게 홍차와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스콘과 무화과 잼을 준비 해 보았는데, 마음에 드실 지 잘 모르겠네요."
"고마워, 잘 먹을게!"
양볼에 가득 넣고 조심스레 씹는 모습에 그는 무심코 그녀가 다람쥐같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어느 정도 식사를 끝마치자 그는 하녀들에게 설거지를 맡기고, 오늘 여주의 스케줄을 설명하기로 했다.
"일단, 오늘은 댄스 수업이 있는 날입니다. 데나 선생이 오시기로 했고 그 이후에는 간단한 예절 수업과 수 놓기를 알려 주실 카리나 선생, 그리고 궁술과 호신술 수업이 있습니다."
"수업 너무 많아.. 오늘 우리 시장에 놀러 가기로 했잖아! 태형이 넌 나랑 한 약속 지킨다면서..!"
"제가 정한 게 아니에요, 아가씨 아버님이 정하신 거라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라서.. 저도 아가씨랑 놀러 가고 싶어요."
"그래도..!"
"그러면 수업 끝나고 밤 시장이라도 놀러 가요."
"응! 그럼 약속이다!"
"무슨 약속 말하는 거냐? 넌 오늘 저녁에 아트러스 가의 영애와 약속을 잡았으니 만나야 한다."
여주의 아버지이자, 이 거대한 저택의 주인인 르에나드 백작이 서재에서 걸어나오며 말했다. 그는 뾰족하게 다듬은 수염을 손으로 연신 쓰다듬으며, 평소 같은 거만한 표정으로 그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바라보았다. 태형은 조금 위축된 듯한 표정으로 비켜서서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 오랜만에 태형이하고 놀러 가고 싶어요. 그것도 안 된다고 하시고.. 정말 너무하세요."
"르에나드 여주, 정신 차리지 못할까! 김태형은 네 친구가 아니라 우리 집안의 집사라는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친구가 아니라니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심하게 하세요, 아버지!"
"여주 아가씨, 그만 하세요. 백작님 말씀대로 아트러스 아가씨와 만나야죠. 곧 사교계에서 멋진 사람들을 많이 만날 텐데요."
여주는 주눅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곳을 벗어나 본인의 방에 들어갔고, 복도에는 르에나드 백작과 태형 뿐이었다. 백작이 손을 들어 태형을 뺨을 크게 두 어번 내리쳤다. 그 반동으로 태형은 바닥에 넘어졌다. 백작은 그를 내려다보며 소리질렀다.
"네놈은 여주를 관리하지는 못할 망정, 놀러 갈 계획이나 세우고 있는 거냐?! 여주가 다른 생각 하지 않도록 잘 관리나 할 것이지!"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가 옛 생각을 많이 하셔서.."
"잊지 마라. 널 빈민가에서 구해 준 건 내 아내니까. 지금은 가버린 그 사람을 위해서도 저 애는 좋은 집에 시집 보내야 해. 그 은혜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잘 알고 있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흠! 이제 그만 가거라. 곧 여주의 선생도 오실 테니. 루이스, 이 녀석의 상처 치료는 제대로 하거라. 사람들이 안 좋게 볼 지도 모르니."
"예, 주인님."
태형의 뺨은 붉게 부어올라 있었고 입술이 터져 피가 나고 있었다. 그의 친구인 루이스는 그의 뺨에 약을 발라주고 입술의 피를 닦으며 태형에게 걱정스럽게 말했다.
"너 그러다 큰일 난다.. 몸 간수나 해, 아가씨 걱정 그만 하고."
"마님이 예전에 말씀하셨거든. 아가씨를 부탁한다고. 그 약속을 저버릴 순 없어."
"그래도.."
"내 걱정할 시간에 일 해, 일. 난 아가씨 방에 다녀 올게."
여주는 방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살아 있던 적에는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시며 태형을 친자식처럼 여겨 주던 아버지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그를 홀대하고 그녀에게도 화를 자주 내는 가 하면 억지로 원치도 않는 사람과 만나 차를 마시게 하는 등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이해 되지 않았다.
태형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는 이불을 꼭 쥐고 얼굴을 베게에 파묻었다.
"...아가씨."
"태형아... 나 너무 속상해."
"아가씨, 뚝. 이제 선생님도 오실 거예요. 전 괜찮아요.."
"알았어.. 이제 그만 나가 봐도 돼."
태형은 말없이 방을 나가 문을 닫았고 여주는 방 안에서 조금 울었다. 그는 비틀비틀 복도를 걸어 침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고, 작은 침대에 누워 쪽잠을 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