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GAME[연재중단]

16번

Gravatar


N G에이그리고

16번

W. 설하

'근원을 보호하세요.'

무엇으로부터?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벽 너머의 그곳은 마치 고즈넉한 시골 풍경을 그대로 빼다 박아둔 듯했다. 한 마디로, 근원인지 뭔지를 위협할만한 것들이 아무것도 없단 소리. 무너져내린 돌더미를 넘어 그 아름다운 풍경 근처로 한 발을 내디뎠다. 벽이 존재했던 그 경계의 너머로 한 발을 내딛자 싱그러운 풀 내음이 코끝을 찔렀다.

경계를 넘는 순간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갑작스레 찾아온 어지럼증에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놀란 전정국이 '리아!'하며 소리치는 것이 들렸으나 금세 중심을 잡은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그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괜찮아. 내가 짧게 말했다. 살짝 일었던 어지럼증이 흙바닥에 양 발을 딛고 선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호수 근처에 피어있는 풀들이 싱그럽다. 근처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아름드리나무들도 시원한 바람소리를 내며 나뭇잎을 흔들거렸다. 간간이 풀숲에 핀 꽃들도 예뻤다. 동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절대, 동굴 깊은 곳에서는 볼 수 없을법한 그런 풍경이었다.

"어, 빛이…."

손에 쥐고 있던 마물의 핵은 벽을 무너뜨리고 그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빛을 잃었다. 낮에나 보던 것처럼 그저 평범한 마물의 핵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길잡이 역할은 끝났다 이건가. 이로써 확실해진 셈이다. 호수 정 중앙, 기묘한 빛을 띠며 허공에 떠 있는 동그란 구체의 무언가가 퀘스트가 말하던 근원이라는 것을.

"저게 근원인가?"

전정국이 칼끝으로 허공의 구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 것 같은데, 내가 빛을 잃은 마물의 핵을 보여주며 말했다. 빛이 사라졌어. 여기가 목적지가 맞나 봐, 하는 내 말에 전정국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메인 퀘스트 : 수색]

필수 퀘스트

[메인 퀘스트 : 협력]을 완료하였습니다.

연계 퀘스트로의 진입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관련 퀘스트가 자동 부여됩니다….

크레아 제국 : 북부 지역의 수색을 시작합니다.

·

·

·

[조건 1] '매개체'를 찾으시오. (완료)

[조건 2] '근원'을 찾아내시오. (완료)

[조건 3] '근원'을 보호하세요.

어, 뭐야. 아주 잠깐이었으나 흐릿해진 글자에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왜? 하는 물음과 함께 김태형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못 봤나?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퀘스트 창의 [조건 3], 보호하세요라는 글자가 연하게 사라졌었다. 글자에 노이즈가 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눈을 한번 꾸욱 감았다 뜬 새,

[조건 3] '근원'을 보호하세요.

그런 흔적은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류인가. 나는 김태형에게 작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별일 아니라는 뜻에 김태형도 금방 고개를 돌려버렸다.

호수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전정국과 김태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 밟히는 흙의 감촉이 신기할 정도로 보드라웠다. 간간이 피어있는 들꽃들을 흘긋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꽃 들이었다.

"뭐로부터 보호하라는 거야."

호숫가 바로 앞까지 다가간 김태형이 불퉁하게 말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단검 한 쌍이 들려있었지만, 주변에 위험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단검을 휘리릭, 돌리며 손장난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만큼 긴장할 필요조차 없어 보이는 평온한 풍경이었다.

"그래도 긴장해라. 퀘스트가 괜히 보호하라는 단어를 쓴 건 아닐 테니까."

"전혀 아닌데. 이 근처에 기척이라고는 저 근원에서 나오는 것 밖에 없어. 마물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걸 어떻게 알지?"

"네가 까먹고 있는 것 같은데, 나 암살자 직업군이거든. 기척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그런 것치고는 아까 잘만 자던데."

"이, 야, 그건…!"

김태형과 전정국이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호수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물속에 뭐, 마수라던가 그런 게 숨어있는 거 아닐까? 걱정이 무색하게도, 바닥이 보일 만큼이나 투명한 맑은 물에 비친 건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 된 내 모습뿐이었다. 와, 내 얼굴 좀 봐. 좀 심한데? 뺨에 묻은 정체불명의 검댕을 손으로 벅벅 문질러 닦으며 나는 생각했다. 어쩐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야! 내 말은 귓등으로 들었냐!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다 당하는 거다."

"…둘이 언제까지 싸울 건데?"

점차 유치한 실랑이로 변해가는 두 사람의 대화에 내가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제야 조금 잠잠해진 둘이었지만, 김태형의 불퉁한 표정이라던가, 전정국의 찌푸러진 미간이라던가 하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에휴, 한숨을 내쉬는 내 쪽으로 전정국이 다가왔다.

"…확실히, 뭔가가 숨어있기에는 물이 너무 맑군,"

"내가 그렇다고 몇 번이나 말했…!"

"그래도 물을 만진다거나 하지는 마라. 이만큼 물이 깨끗한데도 그 흔한 물고기 한 마리 보이질 않는군."

"무슨 소리야? 저기 헤엄쳐 다니는 게 물고기가 아니면 뭔데?"

"너야말로 무슨 소리지? 물고기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만."

김태형의 말에 나 또한 호수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지만, 전정국의 말마따나 물고기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고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기, 저기 있잖아! 하는 김태형의 손가락을 유심히 좇았으나, 여전히 맑은 물속의 조약돌만이 보일 뿐이었다.

"해초밖에 안 보인다만."

"…해초?"

나는 전정국의 말에도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해초가 어디 있는데, 호수 속엔 물고기도 없고, 해초랄 것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색색의 조약돌만이 바닥에 깔려 있을 뿐. 뭐지?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무언가가 이상했다. 미묘하게 각자가 보는 풍경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호수 근처의 아무 나무를 손가락으로 콕 집어 가리키며 물었다. 저게 무슨 나무지? 내 손가락의 끝이 가리킨 것은 하얀 자작나무였다. 그리고 들려온 대답은,

"자작나무."

"버드나무."

전정국과 김태형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에게서 다른 대답이 튀어나온 것이 이상하다는 듯이. 그럼 저 꽃은 무슨 색으로 보여? 하며 호숫가에 핀 하얀 꽃을 가리키며 내가 물었다. 역시나 튀어나온 대답이 달랐다. 노란색과 하얀색. 전정국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김태형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설마-, 하며 입을 여는 김태형이었다.

"서로 보는 풍경이 조금씩 다른 건가?"

미묘하게 뒤틀린 풍경이 서로의 눈에 보이고 있었다. 전체적인 풍경은 '평온한 호숫가의 전경'이라 보기엔 이상이 없었으나, 그 풍경을 이루고 있는 아주 세세한 것들이 다르다. 이것은 아주 작은 차이이기도 했고,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이기도 했다.

"환상인가 봐."

"…환상?"

"그렇지 않고서야 셋이 보는 풍경이 미묘하게 틀릴 리가 없잖아."

"그런…, 그런 마법이 존재하기나 해?"

김태형의 경악 어린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무튼, 이 고요한 풍경이 가짜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언제 어디서 위험요소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나는 허리춤에 매달아두었던 총집에서 리볼버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다친 어깨로 무리하지 말라며 전정국과 김태형이 한사코 말리는 탓에 넣어둔 것이었으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닌듯싶었다. 전정국도 언제든지 발검할 수 있도록 칼의 손잡이에 오른손을 올려둔 채였다. 단검을 손에서 떼지 않고 있던 김태형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어쩐다, 환상을 피해 밖으로 나가보자니 '근원을 보호하세요'하는 퀘스트가 마음에 걸렸고, 그렇다고 여기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무언가를 기다리자니 시간이 아까웠다. 이 환상이 어떤 목적에 의해 우리에게 발동된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기에 더 그랬다. 방심하도록 만들어진 환상인가? 지나치게 평화로운 풍경을 보다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전정국도 이 상황을 타개할 마땅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 듯,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며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막막한 표정을 짓지 않고 있는 건, 김태형뿐이었다.

설마, 하고 김태형이 중얼거렸다. 다급하게 무언가를 찾는 듯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그를 나와 전정국은 멀거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인벤토리에서 김태형이 꺼내든 것을 본 나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스킬석?!"

"1회용일 뿐이지만, 맞아. 랜덤박스에서 나온 거야. 진짜 설마설마했는데, 쓸 일이 생길 줄이야."

"무슨 스킬인데?"

내 물음에 김태형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파마(破魔). 미친, 하며 흘러나오는 감탄사를 나는 막지 않았다.

"딱 이 상황에 필요한 스킬 아니겠어?"

김태형이 나와 전정국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날 붙잡고 있어, 하는 그 말에 나는 잽싸게 허리춤의 옷자락을 잡았다. 전정국까지 제 어깨를 붙잡은 것을 확인한 김태형이 스킬을 사용했다.

[알림]

플레이어 : 반테 라 루미안의 스킬

[파마(파마)]

가 발동됩니다.

파삭-, 하며 김태형이 손에 쥐고 있던 스킬석이 산산이 부서졌다. 새파란 빛이 부서진 스킬석에서 흘러나온다. 김태형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파마(破魔), 악한 것을 깨트려라, 환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사방이 무너져내리는 그 광경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평화로운 호숫가의 정경에 금이 간다. 실금이던 그것은 점차 굵게 퍼져나가 이윽고 이 공간을 완전히 무너트리기에 이르렀다. 따사로운 햇살 아레 밝디 밝았던 풍경은 어두침침한 동굴의 풍경으로, 큼지막한 아름드리나무는 동굴을 지탱하는 새카만 돌기둥으로, 싱그러운 풀 내음을 자랑하던 들판은 축축한 돌바닥으로, 맑디 맑은 호숫가의 물은,

"…이게 뭐야."

"…손이라도 넣었다간 무사하지 못할 뻔했군."

새카맣고 진득한 액체들이 가득 고여있는 풍경으로. 역한 비린내와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으, 하는 단말마의 침음과 함께 나는 역한 호숫가로부터 한 발짝 물러났다.

"…! 잠시만, 퀘스트의 내용이 바뀌었다."

"뭐?"

전정국의 말에 재빨리 퀘스트 창을 열었다. 퀘스트의 내용을 확인한 나는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메인 퀘스트 : 수색]

필수 퀘스트

[메인 퀘스트 : 협력]을 완료하였습니다.

연계 퀘스트로의 진입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관련 퀘스트가 자동 부여됩니다….

크레아 제국 : 북부 지역의 수색을 시작합니다.

·

·

·

[조건 1] '매개체'를 찾으시오. (완료)

[조건 2] '근원'을 찾아내시오. (완료)

[조건 3] '근원'을 파괴하시오.

내가 본 것이 헛것이 아니었다.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연해졌던 글씨, 분명 보호하십시오 따위의 말이 적혀있던 문장은 '파괴하시오', 단호한 어조로 바뀌어 있었다.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로.

게임 내에서

검고 진득해 보이는 액체를 바라보며 김태형이 말했다. 어떻게 건너, 이걸. 하는 그 말에 나는 동감하며 검은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 중앙에 둥둥 떠있는 구 하나. '근원'. 퀘스트의 진짜 내용이 보호가 아닌 파괴였음을 깨닫고 난 후 가장 먼저 직면한 문제점은 이거였다. 저 근원을, 어떻게 파괴시키느냐.

우리에게 장거리 무기는 내가 가진 리볼버밖에 없었기에 총으로 구를 파괴하는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해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는데, 내가 쏘는 족족 총알이 구를 빗겨나갔기 때문이었다. 내가 조준에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내가 쏜 총알의 궤도를 비틀듯, 총탄의 궤도가 곡선으로 휘어지는 것으로 보아서는 조준의 문제가 아니라 무언가가 근원을 보호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멀리서 파괴하는 것이 안 된다면 건너가서 직접 손을 대보자. 마땅히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이었으나 우리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솔직히, 근원이 떠있는 검은 호수의 물은 빈말로도 들어가 보고 싶지 않았기에. 끈적해 보이는 것은 둘째치고, 새카만 액체 탓에 그 속에 무엇이 있을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

"…이야, 미쳤네,"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겠네."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형체도 남지 않고 녹아버리는 돌멩이를 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뭘 묻냐는 듯 김태형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혹시나 해 호수에 돌멩이를 먼저 던져봐서 다행이었다. 바닥에 널려있던 돌멩이 하나를 검은 호수로 던지는 순간, 액체에 닿은 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끓는 듯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팍-, 하는 소리를 내며 터져나가는 돌을 보며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저 호수에 들어갔다간 돌멩이와 같은 꼴이 되겠지. 그러니 자연스럽게, 직접 다가가 근원을 파괴한다는 계획 또한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정말 게임이었다면, 밸런스 패치가 엉망진창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돌멩이도 녹이는 호수에서 대체 뭘 어떻게 파괴하라고. 여전히 호수 한가운데 둥둥 떠다니는 근원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있잖나,"

"왜, 무슨 방법이라도…"

"방법이, 생긴 것 같다."

전정국이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직감적으로 그것이 그의 시야에만 보일 시스템 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전정국의 오른손이 밝은 빛무리에 휩싸였다. 빛이 사그라든 뒤 전정국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사용처를 전혀 알 수 없는 동그란 구슬 두 개였다. 그게 뭔데? 호기심 어린 김태형의 물음에 전정국이 입꼬리를 희미하게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포탈.

"포탈?"

"사용법은 간단하다. 구슬 하나를 여기 떨어트리고,"

그가 샛노란 구슬 하나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나머지 하나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던지면-,"

손에 쥐고 있던 나머지 한 개의 구슬을 전정국이 처음 떨어트렸던 곳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떨어트렸다. 마지막 구슬이 땅에 닿자마자 두 개의 구슬에서 샛노란 빛으로 이루어진 선이 흘러나왔다. 선이 구슬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원을 그려냈다. 두 개의 원,

"이렇게, 포탈이 생성되는 거지."

참고로 공중에도 설치가 가능하다, 전정국이 구슬 하나를 주워 공중으로 내던졌다. 바닥으로 추락하는가 싶던 구슬은 어느 순간 허공에 멈추고는 아까와 같은 샛노란 원 하나를 만들어냈다. 심지어는 발판도 생긴다. 미쳤네, 하는 감탄사를 흘리며 나는 바닥의 포탈로 팔을 집어넣었다. 저 위, 생성된 포탈에서 내 손이 불쑥 튀어나오는 꼴이 왠지 오싹하긴 했으나, 이로써 확실해졌다. 포탈 덕에 일이 몇 배는 더 수월해질 것이라는 사실이.

근원에 가까이 갈 방법을 찾아낸 뒤로부터 우리는 더 지체할 것 없이 계획을 세우는데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삐걱임이 있었던 것만 제외한다면, 꽤 괜찮은 팀워크라 할 수 있었다.

"난 빠진다. 내 스킬은 뭘 파괴하는 데는 별로 효율이 안 좋을 것 같아서,"

"내가 가겠다. 근원 하나만 파괴하는 것에는 내 스킬이 더 도움이 될 거다."

"파괴력을 생각하면 내가 가는 게 맞지 않을까?"

"넌 어깨를 다쳤잖은가,"

"넌 지금 꽤 지친 상태고, 그렇지?"

내 말에 전정국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체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그의 파리한 안색이나, 그리 덥지 않은 온도임에도 턱을 타고 똑-, 떨어지는 땀방울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동굴로 오는 내내 마물을 처치한 것도 전정국이었고, 벽으로 막혀 있던 동굴을 무너트린 것도 전정국이었다. 그가 아무리 체력이 괴물 같다고 할지언정,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 비해 어깨를 다친 후로는 김태형과 전정국의 배려에 쭉 쉬고 있던 나였으니 컨디션도 괜찮은 편이었고. 어깨도 아까보단 훨씬 좋아진 상태였다.

믿고, 맡겨. 내 말에 전정국이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 묻어났지만, 잔뜩 지친 제 몸 상태를 이미 내가 꿰뚫어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더 이상의 고집은 부리지 않았다. 빠진 어깨를 무리시키지 않기 위해 전정국이 묶어두었던 천을 풀었다. 아직까지 어깨의 움직임은 삐걱거리며 불안정한 느낌이 있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이거 막 시간제한 있는 거 아니지? 중간에 사라지거나 이러는 거 아니지?"

"내가 해제하지 않는 한 안 사라지니 걱정 마라."

한차례 심호흡한 전정국이 있는 힘껏 노란 구슬을 내던졌다. 근원 근처로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가던 구슬이 검은 호수 중앙에 샛노란 포탈을 만들어냈다.

"멀어서 거리 가늠이 안되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돌아와라. 억지로 퀘스트를 수행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도 내 목숨 소중한 줄은 아니까 걱정 마."

김태형이 인벤토리에서 꺼낸 밧줄을 허리에 둘둘 감으며 내가 대답했다. 혹시나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라도 하면 밧줄을 끌어당겨 포탈 쪽으로 나를 당길 예정이라고 했다. 그나저나, 쟤 인벤토리에는 진짜 없는 게 없네. 하다 하다 밧줄까지 툭 튀어나오는 김태형의 인벤토리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이제는 궁금해질 참이었다.

갔다 올게, 퍽 비장하게 말하며 나는 후, 숨을 내쉬었다. 리볼버를 쥔 양손에서 땀이 끈적하게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전정국이 설치해둔 포탈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환한 빛과 함께 나는 검은 호수의 중앙, 근원의 근처에서 눈을 떴다. 윽, 저게 뭐야. 검은 호수를 내려다본 나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마냥 새카맣다고만 생각했던 호수의 물은 옅은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는데, 위에서 바라보니 누군가의 피가 잔뜩 고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호수의 역한 냄새가 내 코를 마구 찔렀다.

아무튼, 이걸 파괴해야 된단 말이지. 어째서 처음엔 보호하라는 퀘스트가 나왔을까. 나는 허공으로 발을 뻗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조심하라는 전정국과 김태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스킬을 사용했다.

[알림]

[스킬 : 난사] 사용합니다.

손에 쥐고 있던 두 개의 리볼버가 근원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탄환을 쏘아댔다. 콰과광-, 하는 어마어마한 폭음이 들려왔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울려대는 폭격음에 인상이 저절로 찌푸러졌으나, 스킬 사용을 멈추지는 않았다. [스킬 : 난사]를 사용합니다, [스킬 : 난사]를 사용합니다, 하는 알림음이 끝도 없이 시야에 펼쳐졌다. 마냥 단단해 보였던 근원의 표면에 옅은 실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조금만 더,'

[알림]

[스킬 : 난사]를 사용합니다.

"야! 그렇게 연속해서 스킬을 …!"

"율리아! 무리하지 마라!"

스킬을 무리하게 쓴 탓에 다쳤던 어깨가 욱신거렸다. 마력탄이 근원의 표면을 거세게 두드린다. 몇 번이고 마력탄을 받아낸 근원의 표면이 실금을 따라 작게 바스러지는 것이 보였다. 됐다…! 약해진 근원의 표면은 단 한 발의 총알에도 버티지 못했다. 깨져나가는 근원을 보는 내 얼굴에 환희가 서렸다.

[알림]

[스킬 : 난사]를 사용합니다.

콰광-, 하는 폭음과 함께 근원이 터져나갔다. 바스러진 부스러기들이 검은 호수 위로 흩날렸다. 와, 떨어질 뻔. 포탈의 발판에 가까스로 매달린 채 아래를 살폈다. 근원은 여러 개의 파편이 되어 검은 호수로 가라앉았다. 끈적이는 검은 액체가 근원의 파편을 집어삼키며-,

"…어?"

"…! 율리아!"

"미친, 야!"

일렁이던 호수의 물이 솟아올랐다. 신발의 밑창에 검은 액체가 닿자마자 밑창이 녹아내렸다. 발바닥을 통해 알싸한 고통이 타고 올라왔다. 윽, 하는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기 무섭게 호숫가에서 김태형과 전정국의 고함이 들려왔다. 조심해! 하는 그 외침을 들으며 나는 몸에 반동을 주고 발판 위로 뛰어올랐다.

이게 뭐야! 근원의 파편을 삼킨 검은 호수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튀어 오르듯 자꾸만 솟구치는 새카만 액체가 발판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빨리 넘어와라, 율리아! 하는 전정국의 말이 들려오는 순간에,

"…!"

"아, 미친! 안 돼!"

검은 액체에 닿은 발판이 빠르게 녹아내렸다. 포탈마저도 녹아내려가는 것을 보며 나는 손을 쭉 뻗었다. 김태형과 전정국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내 허리에 묶인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포탈이 사라지는 쪽이 더 빨랐다. 잠시만, 그럼 이 끈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포탈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이런, 미친-,"

줄이 끊어졌다.

반동으로 인해 몸이 뒤로 밀렸다. 발판에서 발이 미끄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떨어진다. 발판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손끝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 설마 했는데 이렇게 죽나? 살짝 닿은 걸로도 쓰라리던데, 저기 빠지기라도 하면…. 떨어지는 순간에 별별 생각이 다 들더라. 돌멩이도 녹이는 액체에 닿으면,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 어쩐지 눈물이 찔끔 나온 것도 같았다. 허공으로 몸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꾸욱, 감았다.

"눈 떠도 돼,"

몸이 녹아내리는 끔찍한 격통 대신, 차가운 무언가가 내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에 안겨있는 듯한 느낌. 검은 호수의 끔찍한 악취가 점차 사라지며, 코 끝에 시원한 향이 맴돌았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익숙한 얼굴에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민윤기?"

"많이 다쳤네."

민윤기, 날 받아든 이는 민윤기였다.












히 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