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N G에이중그리고
19호
W. 설하
시작하기에 앞서,
이것은 로체스터 백작가의 차녀,
비비안 로체스터의 기록임을 밝힌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살면서 비범한 능력을 가진 이 한 명을 만나기도 힘든데, 10명이나 만날 수 있었다는 건 평생의 행운을 죄다 끌어 썼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일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 4명 중 한 명이 나의 친언니, 이아나 로체스터라면 더더욱. 이 기록은 내가 언니를 포함한 10인의 계시자를 따르며 남기는, 아마 이 세계에서 유일한 기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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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한 번 휘두르면 태산이 쪼개지는 이도 있고,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걸로 산 하나를 죄다 불태울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손길 한 번에 썩어가던 상처를 치료하는 사람도 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이따금 계시자들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의 비범한 능력은 언제나 그러했듯 마물에게만 사용될 것이다. 지난 2년간 그러했듯이 말이다.
대륙의 동남부에 마물이 많이 출현한다는 소식에 계시자들은 망설임 없이 동남부로 향했다. 마물을 처리하는 장면은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소설에서나 보던 힘을 실제로 가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수많은 마물을 처리한 이들은 언제나 그랬듯 조용히, 마을을 떠날 것이다.
마물을 잡는 것이 계시자들이 존재하는 이유라 했다. 주신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신의 명을 어떻게 듣느냐 내가 물으니 계시자들이 웃으며 마음으로 듣는다 했다. 신의 명을 받들어야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신께서 부탁한 일을 끝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니, 허허롭게 웃으며 대답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세계가 망할 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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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 몇 십 년 전부터 마물이라는 생명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들을 전부 모아 한데 뭉쳐놓은 것처럼 새카만 색이었고, 악취를 풍기며 생명체가 그 근처로 가는 것을 저지했다. 계시자들은 그 정체 모를 구를 발견하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각자의 힘을 퍼부었다. 무려 10인의 계시자들이 한데 모여있었기에, 그것은 쉽게 부서졌다. 그게 완전히 부서져 가루가 된 후에야 계시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에게 그것이 무엇이냐 물어보니, '근원'이라고만 대답했다. 근원이라니, 대체 무엇의 근원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근원'을 없애야만 마물의 출현을 늦추거나 완전히 없앨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근원이 세 개째 파괴되는 날엔 왕국의 북부에 와이번들이 출현하지 않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날이 풀릴 적이면 언제나 북부에서 활개치던 마수들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계시자들의 표정에 안도감이 서리는 것 같다. 와이번들이 사라지는 게 근원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한결 더 결연해진 계시자들의 표정에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게임 내에서
날이 더웠다. 찌는 듯한 더위까지는 아니더래도 쨍쨍한 뙤약볕 아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새 등허리가 축축하게 젖어들 정도의 날씨였다. 실습이 끝나자마자 다시 지옥 같은 실기 훈련장으로 되돌아온 탓이었다. 쨍한 햇빛 아래 연무장을 몇십 바퀴 뛰어다니는 것 정도는 약과였다. 대체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다양한 훈련 도구들을 꺼내놓는 교관에 훈련생들의 얼굴이 흐려졌다. 흙바닥을 나뒹구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단은 우리에게는 그랬다.
"내가, 상상한, 허억, 실습, 보상이랑, 은, 후우…, 많이, 다른데,"
"그 입이라도, 다물고 하는 게, 좋겠군."
"너나 잘, 해, 벌써부터, 후우, 팔이 부들, 거리는 것, 같은데,"
"…둘 다, 입, 다물어, 그냥,"
배에 힘을 꽉 주곤 근육들을 죄다 쥐어짜고 있는 탓에 호흡이 짧았다. 뚝뚝 끊어지는 호흡으로도 끊임없이 서로에게 시비를 걸어대는 전정국과 김태형에 한숨을 내쉬었다. 등에 진 가방의 무게가 버겁게만 느껴졌다. 혹사당한 팔 근육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실습 점수 총합 1위. 3일 정도는 부상 때문에 실습에 아예 참여하지 못했는데도 그랬다. 계곡 근처의 마물들을 씨를 말리다시피 한 결과였다. 그래도 실습 1위를 한 팀에게 마땅한 보상 또한 주어질 것이란 교관의 말에 어느 정도 기대를 걸었으나-,
"시, 발…, 이딴 것도, 보상,이라고,"
깎아지른 절벽을 팔 근육 하나로 버티고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발아래로는 끝도 보이지 않는 허공이라 시선을 잠깐 내리는 것만으로도 등골을 선득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실습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한 팀에게는 중간시험을 특수 토벌로 대신할 수 있는 면제권을 준다. 그것이 메를린 군사학부의 '보상'이었다. 말로만 들었을 땐 퍽 매력적인 보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시험에 시달렸던 과거가 있었기에 더더욱. 하지만 그거야, 그 특수 토벌이 대체 뭘 의미하는지 몰랐을 때의 이야기고,
"…! 동굴! 찾았다! 왼쪽 아래, 거리는 대충…, 500미터 정도!"
"전정국! 포탈 열어!"
그 토벌이 봄만 됐다 하면 북쪽에서 기승을 부린다는 와이번 토벌이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중간시험을 쳐도 백 번은 더 쳤을 거란 이야기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절벽에 박아 넣으며 서서히 아래로 움직였다. 허공에서 달랑대는 발끝이 그렇게 아찔해 보일 수가 없었다.
와이번, 어느 양성형 판타지 게임 속에서 몬스터로나 등장할 법한 이름을 가진 이 마수들은 추운 곳에 서식하는 습관이 있었다. 문제라 함은, 크레아 제국이 위치하고 있는 이 대륙의 대부분이 사계절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마치 대한민국과도 같은 기온 변화를 보인다는 점이었다. 딱 한 군데, 제국의 북부를 제외한ㄷ면. 안 그래도 대륙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제국인데, 그 제국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메를린은 어떻겠는가. 날이 조금만 풀렸다 하면 이쪽으로 날아드는 와이번 무리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것이 다 이 추운 날씨 때문이었다.
절벽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동굴의 입구까지 무사히 내려온 나는 쉽게 동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혹사당한 팔근육이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와, 징그럽게도 많네."
"빨리 끝내고 가자…."
황량한 북쪽에 와이번들이 몰리면 꼭 인명피해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들이 생겨난다.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지만 그 피해라도 줄여보고자 메를린 아카데미에서 실시한 것이 봄철의 와이번 토벌이었다. 아카데미의 신입생, 그중 특수 토벌의 대상자들이 참가하는 토벌되시겠다. 표피는 단단하고, 날개가 있어 재빠른 와이번들을 잡기에 이제 갓 아카데미에 입학한 신입생들은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하에 와이번의 알만 죄다 잡아다 죽이게 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언젠가 대장장이 로시아에게 부탁해 만들었던 장검으로 알을 푹푹 쑤시며 돌아다녔다. 한 마리도 남겨선 안된다. 와이번 한 마리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완전히 박살 난 와이번의 알을 다시 검으로 내리쳐보며 알이 깨지지 않은 것이 있나 확인했다. 알이 죄다 깨진 상태임을 확인한 나는 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특수 토벌이 성황리에 끝나가고 있단 뜻이었다.
[알림]
체력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힘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무식하게 팔 힘으로 절벽에 매달리고 있던 덕에 기본 스탯도 올랐다. 30에 육박한 레벨이었다. 그런 것치곤 변화를 선명하게 인지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있는 팔을 힘껏 주물렀다. 사람 하나의 무게를 한 팔로 버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상태에서 아래로 움직여야 했다면 더더욱. 잠깐 바닥을 짚는데도 보기 싫을 만큼이나 팔이 부들거려서 나는 그냥 대자로 퍼질러 눕기로 했다. 동굴의 서늘한 온도가 바닥과 맞닿은 등을 타고 올라왔다. 김태형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전정국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해석 중이야?"
"그래, 아무래도 옛날에 쓰이던 문자이다 보니 해석이 온전치 않은 경우가 자꾸 생기는군,"
어느새 인벤토리에서 [자료]를 꺼내든 전정국이 낡은 노트를 뒤적거리며 답했다. 몇백 년 전에나 쓰이던 문자이니 그럴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저렇게 공들여 해석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었다. 나였으면 그냥 휘리릭, 대충 해석하고 치웠을 텐데.. 어느새 노트에 코를 박은 채 해석에 열중한 전정국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노트의 남은 장수 가 얼마 남지 않은 걸로 보아, 곧 있으면 그 [일기장]의 해석 또한 완전히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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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이 끝나면, 이 퀘스트도 완료되겠지. 시스템은 깐깐하다. 단순히 [자료]를 찾아내는 것이 퀘스트의 끝이 아니었다. 아마도 퀘스트 완료 조건은 [자료]의 열람까지. 그러니 전정국이 저 [일기장]을 전부 해석하기 전까지 퀘스트 완료는 힘들 것이었다. 참 나, 히샤크어로 된 일기장이라니. 전정국이 히샤크어를 알지 못했더라면, 꼼짝없이 타국의 언어를 하나하나 배우는 신세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전정국이 일기장을 해석하는 것을 기다리며 천천히 일기장의 내용을 곱씹었다.
얼마 전, 일기장의 해석을 맡은 전정국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일기장 초반부 해석을 끝낸 그는 더 재고 따질 것 없이 당장에 우리에게 일기장의 내용 중 일부를 들려주었다. 가히 충격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었다. 일기장은 10인의 계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는데, 그들의 행동이라던가, 당시 계시자들이 보였던 모습이 죄다 우리와 흡사했다. 결국 우리는 간단한 결론 하나를 낼 수밖에 없었다. 계시자들은, 플레이어였다. 그들 또한 시스템에 의해 이 세계로 뚝 떨어져 퀘스트를 행하던 것이었다.
알아낸 또 다른 사실 중 하나는, 우리가 파괴했던 '근원'이 마수들의 생태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아니, 더 넓게 보자면 결국 퀘스트와 시스템이 주구장창 말했던 그 '이상 현상'의 원인이 결국 '근원'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근원을 파괴할수록 마수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퀘스트는 '근원'을 파괴할 것을 요구한다. '이상 현상'이 결국 마수로부터 비롯된다는 뜻일까? 아무튼 그 '이상 현상'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가 마수의 출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이제 슬슬 가자. 토벌대가 돌아올 시간이야."
"…저 절벽을 또 기어내려가야 된다는 소리네."
"……."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묶을 밧줄을 꺼내들었다. 동굴의 큰 바위에 김태형이 밧줄을 단단히 묶은 것을 확인한 나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꺼내들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절벽의 틈새에 단검을 꽂아 넣으며 나는 생각했다. 당장 다음 학기부터 우리가 실습의 1위를 차지할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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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 토벌을 무사히 끝낸 뒤 끔찍한 근육통으로 골골대고 있는 나를 찾아온 건 정호석이었다. 일전의 도서관 침입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언질 해주기 위한 방문이었다.
"오작동으로… 판단했다고?"
"네, 남은 흔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그런…, 정말로 도서관 전체에 남아있던 흔적을 다 지우는 게 가능했던 거야?"
정호석이 마법진을 그려가며 쓴 마법. 마법은 개뿔, 마법에 관해서는 쥐똥만큼도 관심이 없었던 나였기에 그가 그날 사용했던 마법진이 흔적을 없애는 류의 마법이라는 것만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남긴 흔적이 금서 보관소 뿐만 아니라 도서관 전체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특수 토벌에 나가있는 내내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퇴학 처리를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내심 하던 중이었다. 그 짧은 새 도서관 건물에 남아있던 우리의 흔적을 죄다 지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한데 웬걸, 오작동이라니-,
"…그것도 네 스킬이야?"
"아니요, 이건…, 스킬은 아니에요."
"그럼 대체 어떻게-,"
"엄연히 말하자면, 이건 '제이'의 기억에 있던 마법이에요."
정호석의 말에 내가 멈칫했다. 제이, 정호석이 들어가 있는 몸뚱이의 이름이었다. 그럼 그 애는, 원래부터 마법을 쓸 줄 알았다는…, 하는 내 말에, 정호석은 어딘지 모르게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였죠, 그것도 재능이 뛰어난. 그날 제가 쓴 마법 말고도 다양한 마법진들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그렇ㄱ, 잠시만, 너…,"
문득 깨달은 사실 하나에 나는 정호석을 경악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꽤나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는 신호였다. 내 입이 점점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법진은 '제이'가 개발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호석'은 그 사실을 몰라야 하는 게 옳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제이'의 마법진을 사용했고…, 이것이 뜻하는 것은 명확하다. 정호석 또한,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
"들으려던 건 아닌데, 들렸어요. 귀가 좀 예민하거든요."
머쓱한 표정으로 뒷목을 긁적이며 하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서관 계단에서의 전정국과의 대화. 전정국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그 말. 그 뒤로 정호석 또한 느낀 것이었다. 정호석의 기억이 사라지고, '제이'의 기억이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을.
김태형에게 묻지 못해 확신하지 않았던 가설은 정호석의 말로 인해 기정사실화되었다. 플레이어들의 기억이 뒤섞이고 있고, 거기서 나만 예외다. 오직 '나'만이, 예외였다. 긴 숨을 내쉬며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덕에, 의심은 피했으니까요. 건물 전체의 흔적을 지웠으니까 그 일기장만 잘 숨긴다면 들킬 일은 없겠죠."
"다행이긴 한데…,"
"…아무튼 그 사실을 알려드리려고요. 피곤해 보이시는데 이만 가볼게요. 다른 손님도 오는 것 같고."
정호석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는 그저 빙그레 미소만 지어 보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쉬세요, 하며 내가 일어나는 것을 제지한 그가 종종걸음으로 방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 그가 남긴 말에 나는 또다시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세요, 기억에 관한 건 민윤기 씨한테는 비밀로 할게요."
쿵, 닫히는 문에 나는 한동안 내 기억을 되짚어 보아야 했다. 귀가 좀 예민해서요, 하는 그 말이 웅웅, 맴돌았다. 민윤기에겐 기억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 전정국의 그 말이 계단에서가 아닌 금서 보관소 한가운데에서 나누었던 대화 중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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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뜻을 따르는 계시자들이라 해 사람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다시금 깨닫는다. 서로 다른 의견들이 오가다 결국 충돌하고, 그것이 급기야 싸움으로 번진다. 싸움은 편을 가르고, 그렇게 파가 나누어지는 것이다. 10인의 계시자들이 갈라섰다. 무리를 떠나는 5명의 계시자들을 보는 나의 언니의 표정은 침울해 보였으나, 그들을 붙잡지는 않았다. 나는 언제까지고 언니의 뒤를 따를 것이다.
무리를 떠났던 5명 중 단 한 명만이 돌아왔다. 나머지 넷은 죄 죽었단다. 초월적인 힘을 사용하는 그들이 당할 일이 무엇이 있느냐 물었더니 함정이었다고 했다. 시체를 수습하지도 못했다는 말에 언니를 포함한 남아있던 계시자 5인이 안타까운 침음을 흘렸다.
돌아온 한 명을 포함하여, 계시자들은 6인이 다시 뭉쳐있기로 했다. 화해는 금방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죽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강제성을 띠는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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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 중 한 명이 죽었다. 마수 탓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찝찝함이 가시질 않는다. 우리는 그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준 뒤 길을 떠났다.
남아있는 계시자들이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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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을 하나 더 파괴했다. 여태 파괴한 근원은 총 5개였다. 대륙 전역에 흩어져있다 보니 찾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반년에 걸쳐 5개를 파괴한 것도 어찌 보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라고 언니라 말해주었다. 몇 개나 남은 거냐 물었더니 그거까진 아직 알 수가 없단다. 여행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따금 걱정 어린 부모님의 편지를 제외하면 여행은 즐거운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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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는 것 같다. 데본이 언니에게 말하는 것을 몰래 들었다. 일전에 일행 한 명이 죽은 것과, 4명의 계시자가 몰살당한 일이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돌아온 한 명의 계시자였다. 이리나 클랑테. 하지만 그녀는 항상 모두에게 잘 해주는걸. 정말로 그녀가 배신자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니었으면 좋겠다.
파괴한 근원이 6개가 되던 날에 데본이 죽었다. 근원을 파괴하면서 생긴 폭풍을 미처 피하지 못한 탓이었다. 언니는 그가 죽어서 바짝 경계하는 것 같다. 하필이면 죽은 사람이 데본이라 그렇다. 배신자가 있는 것 같다고, 언니에게만 은밀하게 말했던 데본. 혹시 그 배신자가 언니와 데본의 대화를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들었다면, 그렇다면, 다음 목표는 언니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배신자가 있는 거라면, 왜 날 먼저 죽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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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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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신 따위 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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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퀘스트 : 자료 찾기]
보상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일기장 뒤편에 찢어진 흔적이 있다. 누군가가 뒷부분을 고의적으로 뜯어낸 거겠지. 아카데미에서 보관하기 전부터 이런 상태였던 것 같다. 그 뒷내용이 담긴 노트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호석이 말한 '다른 손님'은 전정국이었다. 일기장의 해석을 끝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고 온 참이었다. 그가 차곡차곡 정리해둔 일기장의 내용을 읽은 나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배신자라니. 누군가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단어였다. 예를 들면 캐런이라던가-,
"…실패했겠지, 보나 마나. 남은 사람들이 셋도 안되는데."
"일기장의 뒷 내용을 말하는 거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아니야, 내 생각은 그래. 계시자들은 분명히 실패했어. 방금 좀 그럴듯한 가설이 세워졌거든."
전정국은 혼자였다. 김태형을 달고 오지도 않았다. 일기장에 '배신자'라는 존재가 나온 이상 의심 가는 인물 중 하나인 민윤기에게 이 일기장을 그대로 공개하는 것이 꺼려져서라고 했다. 그렇다고 김태형만 부르자니, 어쩐지 수상해 보일 것 같았다고 하고. 나는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저번에 시스템을 만났을 때, 이 세계가 원래 우리가 있던 세계와 비슷하게 흘러가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
"누구…, 그 시스템이?"
"응, 일단 이 일기장이 기록된 시점이…, …288년 1월, 지금으로부터 대충…, 500년 전이네. 그리고 우리 세계로 따지자면 조선시대쯤."
"…그것과 상관이 있나?"
"어느 정도는 있다고 생각해. 봐봐, 이 세계와 우리 세계가 비슷한 흐름으로 발전해야 한다면,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세계에서 일어난 발전들도 이 세계에서 어느 정도는 비슷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소리잖아."
"그, 렇겠지,"
"근데 이 세계는, 좋게 봐도 현대와는 거리가 멀지 않아?"
"그래, 겉보기엔 현대라기보다는 근대와 가깝다고 볼 수 있겠군."
"그럼 시간의 흐름이 어긋났다고 볼 수 있겠지?"
전정국이 소파의 팔걸이를 검지로 톡, 톡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이해는 하고 있는 거 맞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계시자들이 플레이어라며."
"그래."
"그리고 플레이어가 생겨난 이유는 두 세계의 시간의 흐름을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서고."
"그래."
"계시자들이 진즉 그걸 성공했다면, 또 다른 플레이어들을 굳이 불러올 필요가 있었을까?"
"…없었겠지."
"그래. 그들이 실패했기에 우리가 여기 있는 거겠지."
"…그렇군."
계시자들은 실패했다. 아마 그 '배신자'의 영향이 클 것이다. 남은 세 명의 계시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들이 결국 그 '근원'을 모두 파괴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 자체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근원을 모두 파괴했었더라면, 근원이 또 생겨나지 않는 이상 우리가 파괴할 근원은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이건 뭐, 뒤처리 담당도 아니고. 보상 정산이 완료되었다는 알림 창을 열며 나는 'Y'를 눌렀다. 새파란 알림 창의 내용이 스르르, 사라지며 새로운 문장들이 적혀내려갔다.
[메인 퀘스트 : 자료 찾기]
플레이어 : 율리아 비안 오르테 / ? 혜 ?
-수령 가능한 보상이2개 있습니다.
<보상 목록>
· 낡은 열쇠
· 랜덤박스
2 개의 보상을 수령하시겠습니까?
허공에 손바닥을 펼치자, 파란빛들이 손바닥 위에 한데 뭉쳤다. 희끄무레한 빛들마저도 서서히 사라질 때 즈음 나는 손바닥 위에 생겨나는 무게감을 고스란히 느꼈다. 빛이 사그라든 자리에는 낡은 열쇠 하나와, 익숙한 상자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낡은 열쇠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듯 고철의 색을 띠고 있었다. 생긴 모양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그건… 보상인가?"
"응, 이 열쇠, 묘하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열쇠를 만지작거리는 새, 전정국은 제 몫의 보상을 수령하는 것을 택했다. 희끄무레한 빛무리가 방 안을 한 번 더 감싸고 사라졌을 땐, 전정국의 손바닥 위에도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래돼 보이는, 군데군데 찢어진 흔적이 있는 낡은 종이.
"…율리아, 네 열쇠를 잠시 빌려줄 수 있나?"
어쩐지 전정국의 표정이 창백해 보이는 것 같아 나는 그에게 군말 없이 열쇠를 건넸다. 그는 열쇠를 한 번, 제 손에 쥐여진 지도를 한 번 들여다보더니 낡디낡은 종이를 테이블에 펼치고는 열쇠를 그 위에 올렸다. 빈손으로 제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전정국이 꺼내든 것은 또 다른 열쇠 하나였다. 내가 받은 열쇠와 아주, 아주 비슷하게 생긴 열쇠 하나. 그 열쇠가 무엇인지 깨달은 나는 멍한 얼굴로 지도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낡은 지도에 그려진 것은 분명 이 세계의 대륙이었다. 크레아 제국, 히샤크 왕국 등등이 위치하고 있는 커다란 대륙. 군데군데 의미를 알 수 없는 'O'표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도에 'X'표가 되어있는 장소는, 다름 아닌 메를린 아카데미였다.
[오래된 지도]
기타 아이템
계시자들의 기록의 위치를 나타내는
신비한 지도.
기록이 사라진 장소는
'X'가 표시된다.
3개의 'O'표시를 멀거니 바라보던 전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X'표는 아카데미 한 곳에만 쳐져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남은 하나의 'X'를 찾았다.
'크레아 제국 : 황궁'
누군가가, 이미 비비안의 기록에 손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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