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N G에이중그리고
21번
W. 설하
*분량이 쪼금 짧아요....
불편한 구두에 뒤꿈치가 죄다 까지는줄도 모르고 리지아네 공작저의 정문을 향해 달렸다. 마차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굳게 닫힌 마차의 문을 보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민윤기가 보내온 신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은 채였다. 대체, '플레이어'인 우리 말고 누가 그 오랜 옛날의 기록을 필요로 하겠냐는 물음에서부터 시작된 의심이었다. 그러나 마차에 올라타, 발목 언저리를 간지럽히는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한가득 끌어안은 채 의자에 앉아 민윤기의 표정을 확인한 순간에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 정말로, 민윤기가 실패했구나.
"어째서?"
어째서, 하는 물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전정국이 마차의 문을 닫자마자 민윤기를 대신해 마부석에 앉은 소년이 말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이랴,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지아네 공작저를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한 민윤기가 피곤하다는 듯 마른 세수를 하며 입을 열었다. 없었어.
"누가 나보다 빠르게, 기록을 가져갔어. 누군지는 몰라. 망령까지 풀어서 살펴봤는데 흔적이 하나도 없어."
계속해서 손에 쥐고 있던 탓에 체온으로 따끈따끈해진 열쇠를 내게 건네며 민윤기가 말했다. 별로 납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 표정에 여실히 드러난 것인지, 나와 전정국을 한 번씩 곁눈질로 살핀 민윤기가 말을 이었다. 공작저에 도착해, 나와 전정국을 내려줄 때까지만 하더라도 기록은 리지아네 공작저에 존재했었다고, 다만, 민윤기가 별채를 살피며 기록을 찾는 동안에, 다른 누군가가 이미 기록에 손을 대고 가져간 것이라고.
[퀘스트 실패] 알림이 뜬 것은 전정국과 내가 한바탕 춤을 춘 뒤, 발코니로 도망간 뒤의 일이었기에 시간적으로 민윤기의 설명은 납득할 수 있었다. 다만 의문인 것은, '누가', 그 기록에 손을 댔느냐는 것이었다. 비비안의 기록은 금서였다. 그마저도, 대부분의 제국인이 그 존재 자체도 모를, 아주아주 오래되고 꽁꽁 숨겨져왔던 금서. 우리와 같은 '플레이어'들이야, 이 세계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달려있기에 그 금서의 존재에 손을 대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공작저에 몰래 침입해 금서를 빼돌리는 미친 짓을 할 가치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무가치한 책일 뿐인데 말이다.
문득 기억 한구석에서 떠오른 장면 하나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비비안의 기록을 다른 누군가가 가져갔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전정국이 받은 '오래된 지도'를 처음 확인했던 날, '크레아 제국 : 황궁'이라는 글씨 위로 선명하게 쳐져 있던 'X'표를 떠올리지 못했다면 말이다.
"…아,"
단말마의 신음성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전정국이 인벤토리에서 '오래된 지도'를 꺼내들었다.
수많은 'O'표 사이에 선명한 'X'표 세 개. '리지아네 공작저'위로 쳐진 새빨간 표시에 민윤기는 나나 전정국의 설명 없이도 지도가 무얼 뜻하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우리가 가져간 적 없는 기록이 사라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황궁의 기록을 손에 넣은 사람.
[메인 퀘스트 : 협력]
필수 퀘스트
제외된 플레이어: 1
침묵이 길어졌다.
열 개 남짓한 기록 중 고작 두 개일 뿐이다. 그래, 고작해야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이 '제외된 플레이어'는 우리와 협력만 하지 않았을 뿐, 어쩌면 후에 만났을 때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러니까 아군과 비슷한 역할을 해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만일 그 반대라면?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에게 최악이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진짜 나'의 기억을 꾸역꾸역 붙잡아가면서도, 결국엔 기억을 죄다 잃어버리곤 타인으로 살아가는 것. 원래 '내'가 살아가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 채, 평생을 이 제국에서 살아가는 것. 상상만으로도 등골에 소름이 돋아났다.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고작 두 개의 기록일 뿐이지만, 그 누구보다 원래 세계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에게는 고작이 아니었다.
마차 안은 침묵만이 가득했다. 셋 중 그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전정국이 쥐고 있는 오래된 지도의 끝자락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아마 서로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은 비슷할 것이다. 막연한 두려움이고, 공포였다.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가능성은 우리 같은 '플레이어'들에게는 커다란 벽과도 같았다. 절망적이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게임 내에서
[메인 퀘스트 : 수색(2)]
필수 퀘스트
퀘스트 진입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메인 퀘스트 : 수색]이 계속 진행됩니다.]
크레아 제국 : 북부 지역 의 수색을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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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조건을 달성하여
보상을 수령할 수 있습니다.
보상을 수령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미안, 면목이 없다."
완벽하게 근원을 파괴한 김태형과 정호석, 그들에게 비비안의 기록을 찾아오는 것을 실패했다는 사실을 전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면목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어쩐지 김태형의 표정을 볼 자신이 없어 나는 발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나와 전정국이 연회장에서 파티에 참여하는 동안 민윤기는 무얼 했는지, 또 어째서 실패했는지, 비비안의 기록은 어디 있는지 따위의 것들을 말이다. 곁눈질로 흘긋흘긋 김태형의 표정을 살필 때마다 그가 어쩐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어 나는 정말이지 금방이라도 울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카데미로 돌아오는 내내 마차에서 느껴야 했던 절망감과 상실감, 막막함 그리고 불안함. 그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 감정들을 김태형과 정호석 또한 느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자꾸만 내 고개가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그렇기에 들려온 김태형의 대답은 너무나도 의외인 구석뿐이라 나는 푹 숙였던 고개를 단번에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아니면, 김태형이 지금 우리가 실패했단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나. 온갖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태평하기 짝이 없는 그 대답은 내가 예상했던 김태형의 반응과 단 1%도 비슷한 구석이 없는 대답이었다.
다음은 어딜까, 곧 수도에서 축제 열린다는데 이왕이면 그 근처면 좋겠다-, 따위의 말을 주절거리는 김태형을 조금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정호석의 반응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축제 구경 좋죠, 하는 그 대답이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 기록은 먼저 찾으면 되지,"
최선보단 최악을 생각한다. 일평생 살아오며 지켜오던 나만의 규칙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가정한 최악의 상황을 '별거 아닌'일로 만들어버리는 김태형의 말 때문이었다. 김태형은 마치 지금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라, 아주 잘 만들어진 가상현실 게임인 것처럼 말했다. 가벼웠다. 별것 아니라는 말투,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반응. 그래서 정말로 별것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내가 가정했던 '최악'들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나를 보곤 김태형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만큼이나 멍한 표정으로 김태형을 지켜보던 전정국도 결국엔 웃어버렸다. 계속해서 어딘가 마음에 둘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민윤기의 입꼬리마저도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 별일 아니다. 이건 그냥 그저 그런 개임일 뿐이었고, 퀘스트 하나를 실패했다고 해서 내 캐릭터가 돌연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를 실패하면, 다른 하나를 성공시키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
"근데 넌 옷이 그게 뭐냐?"
"명색이 파틴데 아무거나 주워 입고 갈 순 없잖아."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것도 아닌…, 악! 야! 야! 미친, 아프다고!"
다 좋았는데, 기어이 매를 번다.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을 한 팔에 끌어모으곤,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던 구두를 김태형에게 던졌다. 이왕 파티에 가는 거, 예쁘게 하고 가라며 진이 챙겨줬던 드레스가 엉망으로 구겨졌다. 흙길을 냅다 달려온 탓에 바닥에 진흙이 묻은 구두가 김태형의 옷에 자국을 내고 떨어졌다. 야!! 빼액 소리를 지르며 얼른 제 옷을 털어내는 김태형의 얼굴이 억울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말 한마디에 제가 아끼는 옷이 엉망이 되었으니 그럴만했다. 그러게 누가 시비 걸랬나? 김태형이 던지는 과자를 한 손으로 쳐내곤 혀를 쏙 내밀었다. 열받아 죽으려 하는 꼴이 꽤 재밌었다.
그 뒤로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술을 마신 것처럼 정신이 알딸딸한 것 같았다. 아마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뛰어다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태형의 과자 공격을 시작으로, 내가 쳐낸 과자를 대신해서 얼굴로 받은 전정국이 복수한답시고 제 앞의 쿠키를 던지고, 쿠키에 들어있던 초콜릿이 사방으로 튀는 탓에 민윤기의 소매에 얼룩이 생기고. 나와 김태형의 사이에 껴 있다 과자 부스러기를 죄다 뒤집어쓴 정호석이 폭발하며 내 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나이를 어디로 처먹었는지 유치하게 치고받던 우리들은 온 힘을 다해 과자를 던진지 고작 30분 만에 바닥으로 엎어졌다. 마구잡이로 뛰어놀기엔, 오늘은 너무나도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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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서 벌레가 나오기라도 하는 날엔 너희들의 기숙사로 무단 침입할 거라는 내 으름장에 나머지 네 명의 소년들은 구시렁대며 엉망진창이 된 내 방을 치웠다. 과자 조각들과 부스러기를 대충 치우고, 내 칭얼거림에 정호석이 키득대며 클린 마법을 걸어준 뒤에야 그나마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내 방에 나는 서둘러 그들을 쫓아냈다. 가, 가서 쉬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
나머지 세 명이 비교적 순순히 저들의 기숙사로 돌아간 반면, 김태형은 내 방 소파에 늘어진 몸뚱이를 치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만 가지? 하는 내 말을 들은 체도 안 하는 것이 퍽 얄미워 소파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김태형의 발을 냅다 걷어찼다. 악! 하는 짤막한 비명이 들어줄 만 했다.
복수하겠답시고 냅다 김태형이 발을 휘둘렀고, 그것이 김태형과 나의 2차전이었다. 정말로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을 정도로 육탄전을 벌이고 나서야 우리는 나란히 소파 위에 뻗어있을 수 있었다.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이 세계에 난데없이 떨어지고 난 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실컷 장난을 쳐 본 게 처음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대한민국 남고딩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나도 고딩때 용돈들 싹 다 피시방에 쓸 정도로 게임을 좋아했거든,"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 숨을 고르던 김태형이 입을 열었다. 마찬가지로 숨을 고르던 나는, 김태형을 흘긋, 곁눈질로 살폈다. 천장을 바라보던 김태형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그때 유행하던 RPG 게임이 하나 있었는데, 게임 스토리가 되게 별거 없었나, 그래서 유행이 되게 빨리 지나갔거든."
"…뭔지 알 거 같아…."
"너도 했었냐? 의외…, 아무튼 나는 그 게임이 그렇게 재미있었어. 친구들은 재미없다고 그 게임 접고 다 다른 게임 시작하는데, 나만 그 게임을 한참을 잡고 있었어."
"……."
"그 게임 콘텐츠 중에 존나 어려운게 있었는데…, 제한 시간 내에 보스 잡는 거였나? 근데 그 제한 시간이 좀 빡빡했어. 진짜 맨날 뒤졌거든."
답지 않게 게임에 빠졌었던 기억이 있다. 아주 잠깐 반짝 유행을 타고 묻혔던 RPG 게임. 유명 게임사의 신작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기대치는 하늘을 뚫을 정도로 치솟았고, 그에 비해 그저 그런 평범한 게임 진행에 하나둘 접는 사람이 늘어갔다. 그래도 끝까지 게임을 붙들고 있는 사람도 종종 있긴 했다. 아마, 나나 김태형 같은 사람이었겠지. 김태형과 내가 같은 게임을 했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다가와 나는 눈을 깜빡였다.
"거짓말 좀 보태서 100번은 죽었을걸. 당연히 퀘스트도 못 깨고…. 그래도 한 100번쯤 죽으니까 감은 잡히더라. 100번 도전해서 죽고, 101번 도전해서 깼지."
"근성 미쳤네…."
"이거도 똑같아."
정수리 위로, 두껍고 뜨거운 손이 턱 놓였다. 짜증을 낼 기운도 없어 머리 위에 얹어진 손을 가만히 두었다. 느릿느릿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받기 좋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낯간지럽다고 속으로 생각만 했을 김태형의 말이 그의 손을 타고 전해진다. 울컥 눈물이 고였다. 여기서 눈물방울을 흘렸다간 평생의 놀림감이 될 것이 뻔해 죽을힘을 다해 참았다. 다행스럽게도, 꼴사납게 눈물을 쏟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김태형의 손은 그 뒤에도 한참이나 내 머리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제국 서부는 뭐가 유명하더라?"
"몰라…, 반테 루미안 기억 속에 뭐 없냐?"
"말도 마라, 얘 진짜 한량이야. 어떻게 된 기억이 노는 기억밖에 없어."
"너랑 잘 어울리네…."
"죽는다…."
키득대는 내 이마에 딱밤을 놓은 김태형이 제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서부에도 축제 같은 거 열리면 슬쩍 구경이나 갈까?"
"좋지."
"거기도 닭꼬치 같은 거 팔았으면 좋겠다."
"회오리 감자도,"
"그건 진짜 없을 것 같은데."
"솔직히 한국 길거리 음식으로 여기서 장사하면 대박날 걸?"
"떼돈 벌고도 남지."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는 내내, 우리는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나란히 천장을 향해 꺾여있는 고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선이 새하얀 천장을 담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천장이 아닌 눈앞을 가로막은 반투명한 파란 시스템 창을 담았다.
[메인 퀘스트 : 수색(3)]
필수 퀘스트
[메인 퀘스트 : 수색]이 계속 진행됩니다.
크레아 제국 : 북부지역 의 수색을 완료하였습니다.
크레아 제국 : 서부지역 의 수색을 시작합니다.
제국 서부지역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나는 지역에 존재하는
'근원'을 파괴하십시오.
플레이어 : 율리아 비안 오르테 / ? 혜 ?
남은 근원의 수: 3
진행률: 0%
성공 보상: ???
실패 시 : 플레이어 사망
[메인 퀘스트 : 자료 찾기(3)]
필수 퀘스트
[자료]의 일부를 획득했음을 확인합니다.
[메인 퀘스트 : 자료 찾기]가 계속됩니다.
당신과 협력한 플레이어 중 누군가가
[오래된 지도]를 획득하였습니다.
대륙에 존재하는 [자료]를 모두 모아
'비비안의 기록'을 완성하십시오.
<퀘스트 완료 조건>
-네 번째 [자료] 획득
-네 번째 [자료] 열람
성공 보상 : 비비안의 기록 중 일부
"그냥 하는 소리긴 한데, 혹시 못 돌아가게 되면 여기서 장사나 하자."
"닭꼬치 장사?"
"회오리 감자도 같이."
"좋다."
멍하니 퀘스트 창을 보던 김태형이 이만 가봐야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 늘어진 팔을 들어 대충 손을 흔들어주었다. 굳은살 박힌 커다란 손이 마주 흔들리다, 이내 방문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적막이 찾아왔다. 방금까지 의미 없는 대화들이 떠다니던 공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엉망이 된 드레스 자락이 거슬려 천천히 옷 꺼풀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속옷 차림으로 잠시간 소파에 앉아있다가, 땀과 과자 부스러기로 인해 엉망이 된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뽀송뽀송한 상태로 되돌아오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건으로 금색의 결 좋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꾹꾹 짜냈다.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로 밝디 밝은 머리카락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쳐다본 거울 속에는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울 속의 소녀는 밝은 금색의 머리칼과, 새하얀 피부와, 바다처럼 푸르기 그지없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율리아 비안 오르테는 그렇게 생겼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새카만 배경 위로 나는 '나'를 덧그렀다. 머리카락 색이 어땠더라, 아, 밤처럼 까만색이었지. 피부는? 어릴 때부터 햇빛 아래서 뛰노는 걸 좋아해서 까무잡잡했지. 눈동자는 무슨 색이었더라? 엄마를 닮은 고동색이었나, 아빠를 닮은 까만색이었나. 고동색이었지. 쌍꺼풀은? 코는? 입술은 어떻게 생겼었지? 그래, 그랬지. 쌍꺼풀이 있고, 입술은 살짝 얇쌍한. 이게 내 얼굴이었지.
눈을 천천히 떴다. 푸른색 눈동자가 보였다. 축축하게 젖은 수건을 빨래통에 아무렇게나 집어넣은 나는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도록 느리게 빗질했다. 스윽, 슥, 하는 빗질 소리가 옅게 들렸다.
음, 어쩌면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날은 아주 먼 훗날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1년 후, 3년 후, 5년 후일지도. 아니면 더 먼 미래에, 몇십 년이 지나 이곳에서 이미 완전한 어른이 된 후일 지도 몰랐다. 정말 어쩌면,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지도 몰랐다. 노력이야 하겠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내가 이 세계로 뚝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 늘 최악을 생각하게 되는 내 습관은 사라지지 않아서, 나는 자연스레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때까지 '율리아 비안 오르테'로 살아가는 모습을.
"…음,"
신기한 점이 하나 있다면, 그런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마차를 타고 오며 느꼈던 공포라던가 두려움이라던가, 막막함과 불안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거의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숨이 막힐 정도로 나를 짓누르던 두려움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닭꼬치 장사를 할까, 회오리 감자를 팔까. 떡볶이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하는 우스갯소리가 떠오를 뿐이었다.
정말 이곳에서 '율리아 비안 오르테'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혹은 김태형의 말마따나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는 일은 '그냥 하는 소리'로 치부될 만큼 그럴 일 없을 거라는 강한 믿음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반쯤 마른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 위로 가지런히 모으고는 침대로 몸을 던졌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피곤에 절어있는 몸뚱이를 포근하게 감싸왔다. 뭐가 됐든 좋다.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아, 내일은 뭘 하지. 우선 서부로 갈 계획을 세워야지. 오래된 지도로 자료가 어디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근원이 있을법한 곳도 한번 찾아보고, 그리고, 그리고…, 서부에 유명한 게 뭐가 있는지도 알아볼까. 맛있는 거 많으면 좋겠다. 아, 일단은…,
하루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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