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본디 지방 토박이 인생이었다. 거창 산골짜기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할머니 농사 도우면서 농부의 꿈을 키워왔던 한 남자 아이일 뿐이었고, 그 외에 나는 특별한 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바깥세상도 모른 채 마을에 있는 자그마한 분교에 다니면서 마냥 행복하게 지내던 나는, 분교 이후로 처음 생긴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나는 워낙에 친구를 사귀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스스럼 없는 내 성격 때문인지 친구들도 거리낌 없이 다가와주었다. 그리고...공부? 솔직히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꼼수를 부려서 내빼는 타입은 아니었고, 그냥 친구들에게 피해 안가는 선에서. 여전히 따분한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잔디밭에서 축구하고, mp3로 음악이나 듣는 걸 좋아하는 나였다.
또 하나는...도대체가 날 남자로 볼만한 이유가 없는데 고백을 정말 많이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가 최대한 상처 받지 않도록 조용히 거절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첫사랑과 결혼까지 가는 것이 나름의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내 눈에 처음으로 먼저 띈 게 여주였다. 여주 역시 그저 평범한 여자애였다. 누구보다 특출나게 예쁘다던가, 공부를 잘한다던가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긴 생머리에 조금은 분홍빛을 띠는 피부, 그리고 아이처럼 순수한 웃음.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외모가 뭔들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 때 나는 이미 여주에게 흠뻑 빠졌고 뭘하든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였는데.
하지만 여주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뽑자면 여주는 계산적인 면이 없었다. 다가오는 누군가를 관찰하면서 사람에 따라 급을 매기던가, 한 명 한 명에 점수를 내는 타입이 전혀 아니었다.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한 아이. 당시의 나의 모습과 겹쳐지기도 해서 그런 여주가 너무 사랑스럽게 보였던 것 같다.

"여주야. 여주야."
여주와 친구를 맞먹고, 등하교도 같이 하는 사이로 발전하고 난 후부터는 나도 점점 고장나기 시작했다. 여주가 없으면 불안증세가 도지는 건지 하루에도 몇번씩 허공에 대고 여주를 불렀다. 지나가던 길에 민들레를 발견하면 민들레가 아파할까봐 꺾지 않고 본인이 숙여서 호호 불던 여주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태형아. 여 봐라. 안개 낀 거 진~짜 이쁘제. 무슨 영화의 한 장면인 줄 알았다니까."
"으응. 이쁘네."
여주는 극감성파라 길 가다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온갖 단어로 묘사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슨 풀잎에서 떨어지는 이슬만 봐도 귀엽다고 왕왕 대는데, 나는 그딴 거 눈에 안 보이더라. 너가 제일 예쁘고 귀여운데 너 말고 뭐가 눈에 들어오겠냐고.
"야 김태형이! 나 봐라! 자전거 진짜 잘탄다!"
"아주 그냥 논밭에 자빠져 뒹굴라고 작정했나."
결국 점점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주체 못한 나는, 한 따사운 여름날에 내 마음을 여주에게로 흘려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부터 사귀게 되었고, 매일매일을 여주와 보내다 보면 정말 시간 가는줄 몰랐다. 누가 서로를 더 좋아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 내가 훨씬, 아니 감히 정여주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더 많이 좋아했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냥 그 때의 17살의 김태형에 세상에는 여주밖에 없었는데 말해 뭐해. 이걸 정여주가 알지는 모르겠다.
"여주야."
"으잉?"
"내 진짜 예쁜데 하나 소개시켜줄까. 밤에 보면 정말 예쁘대."
"뭐? 당연히 알려줘야제! 구름다리 말고 또 있나? 난 이 마을에 모르는데가 없는데에..."
"흐흫. 어. 나만 아는 데 있다. 너도 절대 몰라."
"와, 대박. 나 기대해도 되겄지."
"오늘 밤에 가자. 같이."
어릴 때부터 할머니 집에서 자란 나는 할머니 집 뒷마당에 있는 정원이 내 놀이터였다. 아무도 모르는 곳. 마치 책 속에 나오는 비밀의 정원처럼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곳. 나는 나의 유일한 아지트였던 곳에 여주를 데려갔다.

"와아......이런 곳이 있었나!"
"으응. 밤하늘 참 이뻐."
"뭐야, 이런 곳을 왜 너만 알어~"
"내 비밀 공간이야. 여주가 여기 첫 손님이고."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던 반딧불이와 은은한 달빛 아래 여주의 맑은 얼굴, 그리고 그 몽글몽글한 분위기 단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한다. 여주는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둥그런 달을 보며 줄곧 감탄했고, 나는 그 순간에는 여주만 올곧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여주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주야."
"응? 아 잠시만. 태형아 저거 반딧불이 봐. 깜빡 깜빡 거리는거 진짜 예ㅃ.....웁."
여주. 밤하늘. 분위기. 이 모든 것에 취해버린 나는, 결국 그날 밤 여주에게 아름다운 키스를 건넸다. 조잘조잘 병아리 마냥 삐약삐약 거리던 여주는 갑자기 들어온 내 입술에 많이 놀란 듯 보였지만, 내가 괜찮다고 등을 쓸어주니까 자기도 눈을 감은 채 내 리드를 따랐던 것 같다.
그 때가 내 첫사랑 여주에게 건넨 첫 키스 였다. 첫사랑. 나의 모든 '처음' 을 뺏어버린 것 만으로도 내가 여주를 잊지 못할 이유는 충분했다.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대."
"................"
어느샌가 부터 계속 악화되던 할머니의 병세로 결국 아버지는 서울로 이사가서 할머니를 더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드려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셨다. 그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나는 몇일 동안 여주의 부름에도 밖을 나가지 못한 채 울었다.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가 아프신데 아버지께 땡깡 부려봤자 상황만 곤란해질 것을 알았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따금씩 밖에서 여주가 울먹이는 소리도 들렸지만, 나는 밖에 나가지 못했다. 여주 얼굴을 보면 눈물만 나올 것 같아서. 17년동안 쌓아온 추억들이 한순간에 날아갈 거라는 슬픔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이사가는 날,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에 나는 여주를 만나 마지막 이별을 전했다.
"..여주야."
"니 진짜 나쁜거 알지."
후우-
"미안해. 내가 미안해. 정말로.."
"..저리가. 진짜 나쁜 놈아."
이미 눈물과 콧물로 물들여진 여주의 뺨을 따라 또 하나의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벌써 손에서 중심을 잃고 쓰러진 우산 덕분에 머리 위에서 쉴새 없이 떨어지는 빗물이 여주의 눈물과 함께 바닥으로 톡, 톡 떨어졌다.
푸르렀던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 비를 피해 저 멀리 논밭으로 달아나는 참새들, 귀를 간지럽히는 고요한 빗소리....
가뜩이나 여주도 힘들텐데 나까지 울면 안된다고 체면을 걸었지만, 눈 앞이 계속 물로 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눈앞을 온통 가려버린 뿌연 물이 모두 내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 같았다. 아마 여주도 그랬겠지.
"........몸살 난다, 우산 똑디 들으라."
"..................."
나는 억지로 울음을 삼키며 쓴 웃음을 지었다. 이미 너무 많이 울어 막혀버린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목을 아꼈다.
"그러면 내는 간다. 밥 재깍재깍 챙겨묵고, 또 덜렁덜렁, 자전거 타다가 팔 하나 나가리 되지 말고. 알았나."
"....................."
"울음 뚝 하고. 잘 있어, 여주야."
나는 바닥에서 뒹굴던 우산을 집어 여주의 손에 쥐어주었고, 아무말 없이 나를 쳐다보던 여주를 눈에 가득 담았다. 마지막으로 여주의 젖은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은 후 내 모자를 씌워 볼에 뽀뽀를 하고 떨어졌다. 이미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주의 차가운 얼굴을 내 따뜻한 손으로 감싼 후에야 나는 여주가 미련이 남지 않도록 대문 밖을 나갈 수 있었다.
왈칵 눈물이 터지기 직전의 모습을 하던 여주가 내 기억 속 마지막 모습이었고, 내 고등학교 시절 거창에서의 모습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태형이 실제 과거 고딩시절 사진. 참고하세요)
) 글이 이보다 망할 수가 없어요~~~~~~하하ㅏ 역대급 쓰레기 글 표현이 하나같이 다 구려요...
)) Ep 6 까지 아마 태형이의 편에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요. 과거 이야기가 좀 들어가야 둘의 서사가 끈끈해지고, 독자분들의 몰입감도 형성이 될 것 같아서....
오늘도 저의 망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