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로이드
01
고등학교 1학년, 신입생. 나는 숫기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 주변엔 친구 하나 없었고, 늘 혼자였다. 학기 초반에 내게 다가와주는 친구도 있었지만 너무 조용한 내 성격 탓에 다들 발을 돌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친구 하나 없는 나는 혼자 하는 것들을 좋아했다. 독서하기와 음악 감상 등등… 매 쉬는시간마다 나는 가방에서 문제집을 꺼내 풀거나 혼자 엎드려있었다. 가끔 매점에도 가긴 했지만 혼자인건 여전했다. 새학기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음침한 애’ 라는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곧게 펴진 긴 생머리에, 앞머리는 덥수룩하게 내려와 눈이 보일랑 말랑하고… 친구도 없는데다가 심지어 혼자 책만 읽었다. 내가 봐도 나는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애는 나와 같은반이였지만, 나와는 다르게 친구도 많고 얼굴도 잘생겼다. 두발규정이 없어 빨갛게 염색한 머리에 성격까지 좋은건 덤. 분명히 나 말고도 수많은 여자애들의 마음을 뺐었을 것이다. 내가 ‘음침한 애’ 타이틀의 주인공만 아니였어도 어떻게든 엮어볼려 난리를 쳤을텐데... 어쨌든간에 나는 그를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은 이동수업을 가기 위해 교과서를 챙기고 있었다. 시간이 여유롭게 남았음을 확인하고 책상에 덮여져있던 책을 펼쳤다. 그리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읽어댔다. 책에 정신이 팔려 주변 상황을 확인하지 못 한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책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었다. 쉬는시간이 끝나가던 무렵, 교실엔 나와 그 애의 무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교실이 자기들 것인냥 시끄럽게 떠들던 그들은 시간을 확인하고 급히 교과서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며 나도 슬슬 일어서려 하는데, 일어서며 그만 책상에 얹어져있던 얇은 책갈피를 손으로 툭 치고 말았다. 책갈피는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교실 구석을 향해 떨어졌다. 그 책갈피는 중학교에서 삼년 내내 같이 다닌 친구와 함께 만든 아주 뜻깊은 책갈피였다. 그래서 더더욱 잃어버리면 안됐었다.
책갈피가 떨어진 곳을 확인하고 그 곳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다행히도 책갈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다. 책갈피를 손에 넣은 뒤 다시 허리를 피고 본 교실은 텅 비어있었다. 다시 교과서를 챙기고 일어나 교실 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눈에 밟히는 게 있었다. 그 애의 자리에 그 애 것의 필통이 덩그러니 놓여있던 것이였다. 필통을 본 순간 고민이 되었다. 오지랖인걸 알면서 가져다줄지 아니면 그 애가 혼나게 놔둘지. 선택은 내 몫이였다. 눈 앞에 그 애가 혼나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결국 난 필통을 가져다주기로 마음먹었다. 머릿속엔 ‘내가 필통을 가져다 주는 게 싫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맴돌았지만, 그 애가 혼나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지켜볼 순 없었다. 내 품에 그 애의 필통까지 넣은 뒤 음악실을 향해 빠른걸음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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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실에 도착한 뒤 나는 두리번 거리며 그 애를 찾았다. 그 애는 창가자리에서 제 친구들과 같이 자리에 앉아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애의 필통을 두고 또 한번 고민을 했지만 이미 가져온 필통을 다시 교실에 두고 올 시간도 여유롭지 않아 내 자리에 내 교과서와 필통을 올려놓은 뒤, 그 애의 필통을 들고 그 애와 다른 애들이 있는 자리로 향해 소심한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다른 애들이 내가 온 걸 확인했는지 하나 둘씩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애의 뒤에 다다른 나는 그 애의 빨간 머리를 보며 우물쭈물거렸다. 그런데 그 순간 빨간 머리가 휙 하고 날리더니 내 눈 앞에 그 애의 얼굴이 나타났다. 나는 갑자기 뒤를 돌아본 그에 놀라 눈이 커졌다. 내가 뒤에 있을 거란 걸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그의 눈도 나처럼 커졌다. 그 애의 큰 눈과 앞머리에 가려진 내 눈이 공중에서 맞물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1초가 1분처럼 느리게… 처음으로 그 애와 눈을 마주친 순간이였다.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 자체가 어색해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 곳엔 그 애의 교복이 보였는데, 교복 조끼 위 명찰엔 ‘김태형’이라는 예쁜 이름 석자가 박혀있었다.
“어… 저기…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아 미안 네가 아까 자리에 필통을 두고 간 것 같길래 전해줄려고 왔어.”
“아 고마워. 필통 안가져온 것도 몰랐다.”
“…”
부끄러움에 대답을 미처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기에만 급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아이들의 시선은 나에게 꽂혔다. 잘생긴 인싸와 음침한 여자애의 조합이였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내 자리로 다시 돌아와 아이들의 시선을 받아냈다. 그저 순수한 궁금증이 담긴 시선과 놀랍다는 시선. 아이들마다 제각각 나를 보는 시선이 달랐다. 그 중에서도 유별난 시선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평소에 태형이와 거의 붙어다니다시피 하는 주희의 경멸어린 시선이였다. 평소에도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니였지만, 나를 바라보는 저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나는 그런 주희에 의기소침해져 더 이상 주위를 두리번거릴 수 없었다. 때마침 종이 울리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다행이라 생각하고 오직 수업만을 내 머릿속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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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난 후 나는 교과서와 필통을 챙기고 음악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복도에는 수업이 막 끝난 다른반 학생들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수많은 인파가 몰아치는 복도에서 나는 이리치이고, 저리치였다. 그리고 넘어지려는 순간 내 팔을 휙 하고 낚아 챈 주희의 손. 아까 음악실에서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본 주희였기에 좋은 일로 나를 부르진 않았겠다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나 왜잡았어?”
“나랑 잠깐 얘기좀 해.”
그러고 주희는 내 팔을 더 꽉 움켜쥔 뒤 인적이 드문 옥상 계단으로 날 끌고 갔다. 옥상 계단의 입구에는 ‘출입금지’ 팻말이 떡하니 놓여있었지만, 주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옆으로 비켜 옥상 계단으로 올라갔다.
“내가 양심에 걸려서 옥상까진 안올라가겠는데,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너 태형이 좋아해?”
나로써는 당황스러운 질문이였다. 태형이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티를 낸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니까. 시선을 땅에 박고 혼자 끙끙대자 답답했는지 주희가 내 어깨를 검지로 툭툭 쳐댔다.
“대답 안해도 돼. 너가 태형이 좋아하는거 우리반 애들이 전부 다 알고있는 사실이니까. 내가 말해주고 싶은 건 이거야. 너같은 음침하고 뒤에서 뭔 짓을 할지 모르는 애가 과연 태형이랑 어울릴까?”
“…”
“생각 해 봐. 솔직히 너랑 태형이는 진짜 안어울려. 태형이가 너무 아깝지.”
“미안한데 나 태형이 안좋아해.”
“안좋아한다고? 정말? 누가 봐도 너는 태형이를 좋아한다는 듯이 굴잖아. 그런데도 정말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이제 나 내려가봐도 되니?”
“그래 뭐. 그냥 방금 내가 한 말들만 잘 기억해놔. 넌 태형이랑 안어울린다는거.”
“…”
주희의 말이 끝난 뒤 나는 바로 뒤를 돌아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두 칸쯤 내려갔으려나? 등에 작은 충격이 오더니 몸의 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그 상황에 발까지 꼬여 나는 크게 계단에서 구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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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에서 구른 뒤 나는 머리에 충격이 가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엄청난 두통이 밀려왔다. 천천히 눈을 떠 확인한 곳은 보건실이였다.옆에는 내 손을 잡은 주희가 걱정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주희와 비슷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태형까지 있었다. 태형의 눈빛이 주희의 눈빛보다 더 진실된 눈빛이였다는 것만 제외하면, 누가 봐도 이 둘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뜬 것을 확인한 주희가 대뜸 일어나 소리쳤다.
“선생님! 여주 눈 떴어요!”
“어 그래? 어디 한 번 보자. 뭐 특별히 아픈 곳 있니?”
“머리가 조금 아프네요..”
“아 그러면 두통약 좀 먹고 오늘은 이만 조퇴하고 병원가서 제대로 된 검사 한 번 받아봐. 조금 크게 다친 것 같더라.
보건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팔에서 어마무시한 고통이 느껴졌다. 옥상 계단은 많이 이용하지 않아 관리를 하지 않았던 건지, 내 팔엔 족히 10센치는 넘어보이는 스크래치 자국 위에 붕대를 덧댄 흔적이 보였다.
“네. 감사합니다.”
“아! 그럼 여주야 우리가 너 대신에 조퇴증 끊어다줄게.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갑작스럽게 태형이가 내 조퇴증을 끊어준다는 말을 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웠기에 나와 주희 할 것 없이 각자 다른 이유로 표정이 굳었다. 말을 마친 태형이는 주희의 팔을 살포시 잡은 뒤 보건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 자리에서 태형이가 올 때까지 멍한 눈으로 보건실 문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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