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리릭-!
공중에서 경쾌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진 등급표가 내 머리를 스쳤다. 그 안에 쓰여진 숫자를 읽은 나는 눈을 멍하니 끔뻑였다. 뭐지? 의문감이 차올랐다. 나는 떨어진 등급표를 주워 그 안에 쓰여진 숫자를 재차 읽었다. 171. 1등도, 17등도, 1.7등도 아닌 171등. 등급표안의 별것 아닌 이 세자릿대 숫자는, 서여주의 등수를 나타내기도 했고, 나의 10년차 여사친 서여주가 속된말로 시험을 망쳤다는걸 보여주는 명백한 사실이기도 했다. 믿기지가 않았다. 전교 1등따위는 가볍게 하던 서여주가 중하위권 수준인 171등이라니. 이건 명백한 구라다. 믿을 수가 없었다.
"푸하하!!! 뭐야 민윤기, 너 충격 먹었냐? 너 표정 지금 존나 웃겨"
"지랄."
그래, 171등. 171등....이란 말이지. 전교생 300명중 171등.... 서여주의 말에 가볍게 대꾸한 나는 다시 한번 서여주의 등급표를 펼쳐보았다. 171등의 충격에서 벗어나자 밑에 조그맣게 각 과목별 등급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들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국어 3.... 수학 5.... 영어..... 잠깐, 수학 5???
"미쳤나??"
"??? 뭐야, 네 왜 급발진 함?? 혹시 미쳤니?"
"...."
수학이 5라니. 그럴리가 없다. 나도 아니고 '그' 서여주가?등급제도가 바뀐게 아닌 이상 그럴리가 없다.
서여주. 그녀는 학교에서 단연컨데 다섯손가락안에는 거뜬히 드는 수학 영재, 아니 천재다. 초등학생때부터 올림피아드니, 경시대회니 뭐니 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은 엄두도 못낼만한 뜨악할 난이도의 문제를 술술 풀어대고 상을 싹쓸이해오는게 일상이었던, 그런 모두가 알아주는 수학 영재가 바로 서여주였다. 이미 4학년때 고등학교 수학 진도까지 다 나간 서여주가 5등급이라니. 이 뭔 개짖는 소리냐? 머릿속으로 십수어년을 살아오며 수집한 서여주의 여러 공부관련 정보들을 되새김질 하던 나는, 이윽고 어떤 확실한 결론을 도출해내기에 일렀다.
이 새끼 이거, 일부로 그랬네.
• • •
생각해보자. 서여주의 성적을 다른 학생에게 준다면 감사하다고 큰절을 한 990번정도는 받고 90도 폴더인사를 받을 수 있을것이다. 아마 미래에도 나를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할껄. 하여튼, 그 정도로 우수한게 바로 서여주의 성적이었다. 내 성적도 아니고 10년지기 여사친 성적 가지고 이런 사색을 한다는게 웃기기는 하다만 계속한다. 그렇다면 왜, 서여주는 유지만 한다면 대입까지의 탄탄대로가 보장되는 탑 티어 내신을 버리고 시험을 망친걸까? 아까 서여주의 표정에서는 까딱 실수(밀려쓰기말이다)를 해 시험을 망친 사람 특유의 부정적인 표정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건 서여주의 내신 떡락은 서여주가 계획했다는건데, 대체 왜 그딴걸 계획하냐고. 다시끔 머리가 복잡해져간다. 아무래도 내 지능 그 이상의 역량에 접어든것같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접고 학교에서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옷을 안 갈아입으면 엄청 혼나겠다만, 알게 뭐야. 만사가 귀찮았다.
침대는 폭신했다. 폭신한 침대에 누워있자니, 전혀 폭신하지 않았던 아까의 상황들이 떠오르며 다시끔 내 머릿속은 서여주로 가득 찬다. 대체 왜, 왜 그 좋은 성적을 포기한걸까? 어디 뭐 심리학 전공 박사에게 자문이라도 구하고 싶었다. 대체 서여주의 의도는 무엇일까. 뭐하자고 저런 미친짓을 한거지? 서여주에 관한 생각이 겉잡을 수 없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안되겠다.. 점점 더 떠오르는 상념들을 막기 위해 나는 침대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켠 다음, 책상에 앉아 두꺼운 노트를 펼쳤다. 공교롭게도 노트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꽉 찬 페이지가 아닌 빈 페이지였다. 나는 최대한 또박또박하게 한 자 한 자 글자를 적어내려갔다.
'서여주 관찰 프로젝트'
가설 :서여주는 모종의 이유로 인한 등수 급감을 겪고있다.
원인 : ???
결론 : ???
<서여주 관찰 프로젝트>, 일명 서관프. 그동안 내가 진행해왔던 수많은 프로젝트들의 기록들이 적힌 노트에 또 다른 프로젝트 하나가 생성되었다. 누군들 뭐 여사친한데 이렇게하냐,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다. 내 특성 상, 그리고 현재 추구하고 있는 내 진로(심리학자가 되고싶었다)를 봤을때, 이 프로젝트는 내게 좋든 나쁘든 큰 깨달음을 제공할 것이다. 더불어 서여주가 왜 저딴짓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니깐, 일석삼조지. 나는 다시 한번 만족스러움의 기지개를 켰다. 아무래도 다음날 학교에서는 서여주를 관찰해야겠다. 결론 도출을 위해 내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