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몰입 장인의 짧글

첫 봄






야, 민윤기. 어금니를 꽉 물다가 성이 차지 않아 입 안까지 잘근잘근. 피맛이 슬슬 감돌았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더 큰일이 있으니. 고개를 들어 여전히 무심해 빠진 눈길을 똑바로 잡아챘다. 너와 눈을 제대로 맞춘 손에 꼽는 순간이다. 새삼 길고 예쁘게 뻗어있다 생각한 속눈썹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 빛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심호흡을 한 두어 번 했을까, 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이거···."





쫙 핀 손 위에는 반듯한 편지 조각이 있었다.





"네가 쓴 거지."









×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이 편지는 그것이다. 일명 고백편지. 그리고 나는 그게 민윤기로부터 온 것임을 따져묻고 있는 것이었다. 이유는 많았다. 편지지는 민윤기가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이었고 ㄹ자를 둥글게 말아쓰는 필체가 비슷했으며, 그가 자주 만지작대는 가방 주머니에 정확히 꽂혀있었다. 또 무엇보다··· 내가 민윤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믿고 싶었다. 이 멍청이가 3년의 세월을 거쳐 드디어 제 마음을 내게 표현한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닌데."


"어?"





그런데 이 멍청이는.





"그거 나 아니라고. 편지."


"···."





한결같이 멍청이였다.








×








"아니 아니, 다시 봐봐."


"응, 다시 봐도 아닌데."


"더 봐봐! 응? 좀 꼼꼼히 확인해 보라고!"


"얘 왜 이래."





민윤기의 눈 앞에 편지지를 디밀었다. 뒷꿈치를 땅에서 떼었다 붙였다 하며. 간절했다. 내가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 왔는데. 풍선에 바람 빠지듯 잔뜩 부풀었던 기대는 허공에 샅샅이 흩어졌다. 애를 쓰며 대답을 얻으려는 나에게 시종일관 부정만 반복하는 민윤기다. 아니라니까, 내가 쓴 거. 급기야 서러움이 몰려왔다.





"···."


"근데 너 인기 많네. 고백도 막 받고."



남 기분도 헤아리지 못하는 주제에 장난스레 어깨를 툭 친다. 탁. 나는 평소라면 웃으며 받아줬을 그 손길을, 그 친숙함을 부러 단호히 쳐냈다.




"됐어··· 말 걸지 마."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란 말이야.









×









오직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만 갖고서 이러는 건 아니다. 난 우리가 썸의 단계라 믿었다. 노브랜드를 애용하던 엄마가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은방울꽃 향 샴푸를 사놓았다. 별 생각 없이 주욱 짜서 몇 번 머리에 치덕대고, 감았을 뿐이다. 나조차도 그리 큰 변화를 몰랐던 부분을 민윤기는 알아챘다. 그 사소한 걸.





"너 샴푸 바꿨어?"


"그렇게 티 나? 난 잘 모르겠는데."


"응, 이것도 좋네."





머리를 살랑 건드는 손길이 하루종일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일상적인 대화를 조곤히 이어가던 버스 정류장, 흐드러지는 꽃잎, 설핏 웃음을 머금은 너의 눈매마저 꿈만 같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 날과 같은 샴푸만을 고집했던 게. 네가 혹시라도 알아줄까봐. 네가 한 그 마디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내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는 걸. 이 멍청한 민윤기가 알아줄까봐.





기대를 말았어야 했다.









×









책상 한 켠에 드러누워 어느새 꼬깃해진 편지를 꺼내들었다.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터져나오던 사랑스러운 것은 그 출처가 민윤기가 아님에 더이상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게 되었다. 누가 보냈을까. 누가 보냈든 이제 상관이 있을까. 정작 걔는 날 좋아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이 '좋아해'가 몇 십, 몇 백 개든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책상을 톡톡 건드리는 손길에 몸을 일으켰다.





"너 아파?"


"··· 아니."


"그런데 왜 누워있냐. 평소에는 팔팔하게 뛰어다니던 애가."





당장이라도 멱살을 붙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지경인데 나쁜 놈아! 하지만 그러지 못 했다. 네가 나를 걱정한다는 그 자체로 기분이 풀어져버린 나 스스로가 너무 비참해서. 아랫입술만 꾹 깨물었다. 나쁜 놈. 정말 여러모로 나쁜 놈이다. 민윤기는 한참 창 밖을 내다보다 이내 손에 들린 편지에 시선을 맞췄다.





"고백 받았는데 기분이 안 좋아보인다 너?"


"안 좋아. 짜증나."



그러자 여태의 성질도 그나마 유하게 받아주던 눈썹이 어슷하게 올라간다.



"··· 왜? 짜증날 것까진 없잖아."


"내가 싫다는데 뭐."


"그래도 준 사람 정성이 있는데-"


"알 게 뭐야, 난 이딴 거 받고 싶지도 않았다고!"





··· 야. 민윤기가 표정을 굳혔다. 아, 이러면 안 됐는데. 감정이 격앙된 나머지 몹쓸 말을 해버렸다. 고개를 살풋이 들어 확인한 너는, 화가 많이 난 것 같다.





"이딴 거라니, 말을 왜 그렇게 해."


"··· 아니, 나는···"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 편지를 썼을 줄 알고."


"···."


"아무리 마음에 안 든대도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건 아니지. 안 그래?"





꾹 깨물던 입술을 말아넣었다. 목이 메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편지를 쓴 사람에 대한 미안함보단 서운함이 울컥 차올랐다. 너는 그런 말 하면 안 되잖아. 이름도 모르는 애보단 나를 먼저 생각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나는 너를 좋아하는데. 딱 내 나이대의 유치한 감정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나는 너만큼 어른스럽지 않으니까. 모두의 생각을 헤아릴만큼 속이 넓지 않으니까. 열여덟의 내 세상엔, 오직 나와 너밖에 없으니까. 그만 박 터지듯 주워담을 수 없는 눈물이 한 갈래 터져나왔다.





"그래, 미안."


"··· 김여주? 너 울어?"


"내가 말실수했어. 미안해."


"···."





더불어 흘러나오는 감정의 부산물들은 아무리 꾹꾹 눌러 닦아도, 멈추질 않았다. 뭐가 발단이 된 건지 그 직후부터 속에 담은 말까지 속수무책으로 밀려나왔다. 설익은 마음이 자제가 되질 않았다.





"··· 근데 윤기야, 있잖아. 나는··· 지금 네가 너무 미워."


"···."


"난 너랑 다르게 못돼 처먹어서, 무슨 상황이든 간에 네가 내 편을 안 들어준 게 너무 밉고, 이렇게 나한테 화를 내는 게 너무 미워."


"···."


"그리고··· 이렇게까지 말해도 내가 너 좋아한다는 거 모를 네가."


"···."


"진짜 너무너무···. 미워 죽을 것 같아."





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벌게진 눈가를 마지막으로 한 번 소매로 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다 끝났다. 당황에 흠뻑 적셔진 민윤기의 어두운 낯빛이 그걸 증명한다. 간신히 유지하던 거리마저도 내 이기심에 훌쩍 멀어졌고, 우리는 더이상 예전 같을 수 없다.





그 길로 교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









보건실에 도착했다. 이미 붉어진 눈가와 열이 오른 얼굴 탓에 보건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휴식을 허락하셨다. 아픈 게 아닌데도 수업을 빠지다니, 내 인생 다시 없을 일탈이다.  침대에 누워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목끝까지 끌어올리다 아까의 장면이 선명히 회상되어 고개를 파묻었다. 왜 그랬지, 대체. 속마음을 몽땅 훌훌 털어버린 게 속 시원하다가도 저질러버린 일에 대한 창피함이 머리를 잠식해갔다.





"··· 진짜 미쳤나봐. 더이상 안 볼 사이도 아니고."





이 상황에서까지 교실에 두고 온 민윤기 걱정이 앞섰다. 내가 너무 밀어붙혔나. 괜히 마음 심란하게 만든 건가. 앞으로도 쭉··· 삼키고 있어야 할 말이었나. 그게. 복잡함에 입술을 몇 번 오물대다 이불을 뻥뻥 차댔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제 완전 끝이네."




그 순간 침대를 가려놓던 커튼이 걷혔다.





"누구 마음대로 끝인데."





네가 왜··· 여기에.









×









어색한 대면이다. 내 자세는 돌덩이 뺨치게 뻣뻣했으며 민윤기는 침대에 걸터앉아 커튼만 툭툭 건드렸다. 그것도 시선은 내게 둔 채로.





"김여주."


"미안···."


"사과는 왜 해. 그거 받으러 여기 온 거 아니야."





··· 아니었어? 내 반응에 민윤기를 미간을 좁혔다. 정말 아니었나보다. 반사적으로 나간 사과를 주섬주섬 집어넣고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가 망설이다 먼저 입을 뗐다.





"미안."


"어···?"


"너한테 무턱대고 화내서 미안해, 내가."





의외로 민윤기가 사과를 했다. 아까 고백 엇비슷한 것에 대한 거절일 줄만 알았는데. 덕분에 옆으로 도르르 굴러가던 시선이 다시금 그에게 고정되었다. 이것만으로 아까까지의 기분은 좀 나아진 것 같았으나, 준비해둔 할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보였다.





"편지 쓴 사람이 꼭 나 같아서 그랬어."


"··· 무슨 말이야?"


"널 좋아하는데, 말할 용기도 없어서 편지나 쓰는 게. 나 같아서 그랬다고."


"···."





처음 약 3초간은 이해할 수 없었다. 편지를 쓴 건 자신이 아닌데, 그 사람 마음이 꼭 저 같아서 그렇게 화를 낸 거라고? 두세 번 민윤기의 말을 곱씹자 그제야 퍼뜩 의미를 알아차렸다.





"너···, 너 나 좋아해···?"


"응."


"···."





꿈인가 싶었다. 그래서 눈을 한 번 부비적대기도,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허벅지를 꼬집어보기도 했지만. 빨갛게 자국만 남을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게 고백 아닌 고백을 감행 중인 건 틀림없이 민윤기였다.





아직 멍해 있는 내게 그가 세 뼘은 가까이 몸을 붙여왔다. 숨이 헉 들이마셔짐과 동시에 그제야 일깨워진 현실감. 선연히 내비치는 민윤기의 눈웃음은 절대 꿈이라 치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 이제 친구는 그른 것 같다. 그치?"


"···."





그때, 창문 새로 꽃잎 하나가 불어와 내 앞에 톡.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보다 진한 붉은 빛을 띄는 그의 볼을 마주한 순간, 나는 더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여주야."





지금은 따스한 바람이 코 끝을 스치고,

벚꽃잎이 흐드러지게 피며,

너와 함께 마주하고 있는.





photo

"좋아해, 많이."





나의 첫 봄이라는 걸.



















독자: 이게 먼가여
연망: 쓰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