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바람 아래 그 꽃잎처럼

[단편] 낭만적 비애


© 연월 2020 모든 권리 보유.


사진 출처: KIMPIT.





낭만적 비애 

연월이 쓴 글







사랑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언제나 선악을 초월한다. 

-프레드리히 니체







돈 앞에서는 누구나 괴물이 된다. 밑도 끝도 없이 무너지고 깎인다. 열정 넘치는 표정으로 밀대 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는 태형의 눈가에도 그늘이 선했다. 초래될 억측의 비애. 동생의 수술비가 필요했던 태형은 어떻게라도 돈을 구하기 위해 아득바득 살았다. 낮에는 낡은 음식점에서 설거지를 하고 밤에는 몸을 내어주는 일을 했다. 어쩌다 운수가 나빠 클럽에 끌려가는 날엔 억지로 쑤셔진 와인물을 입에 물고 바짓춤을 잡아당기며 온몸을 떨었다. 돈은 유희에 비례해 채워져 갔지만 태형은 만족하지 못했다. 총알이 머리를 관통해 뇌가 처참히 부서진대도 돈을 내어준다면 손부터 내밀 자신이 있었다. 동생의 병증이 악화되고 있었으니까. 엄마는 더 이상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고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버렸으니까. 이제는 믿고 의지 할 사람이 나 밖에 없으니까. 


어릴 적 부터 책임감이 투철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태형인지라 그깟 자존심 하나 구겨가며 신임을 얻는 건 그닥 어렵지 않았다. 사람은 기회적인 동물이다.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선 못 할 짓이 없다. 사실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돈 앞에서 사랑을 외치지만 그 사랑의 정의는 결코 진심이 가미 된 추상체가 아닌 자신의 배를 더 채우기 위해 침 바르고 내뱉는 말에 그치지 않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 어느 말보다 사랑한다는 동사를 더 많이 사용하나보다. 어떻게 봐도 달콤하고 소중해보이니까. 정작 그 전부는 텅텅 비어있어도 외형만 바쁘게 칠해주면 완벽해보이니까. 잠시 고민에 빠진 태형이 번뜩 떠오르는 찰나에 무릎을 쳤다. 사랑. 태형이 고른 방법은 저를 더 극한으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사랑을 찾는 건 쉬웠다. 사랑을 갈구하는 염원체들은 세상에 널렸다. 모순적으로 내뱉어진 말들은 꽤나 큰 효과를 정의한다. 태형은 한 때 억지로 쑤셔져 뒤엉키는 가시에 얽히고 무너져 내렸다. 머리를 뒤로 바싹 넘기고 달랑 거리는 명품을 둘렀다. 부에 상조하는 사람들의 것을 모방하고 왠지 모를 열등감에 휘둘려 살았다. 윤기도 그런 사람이었다. 나락 한 번 쳐다보지 않고 앞길만을 달렸을 영아. 첫 만남부터 삐까뻔쩍했다. 그냥 사람 자체가 빛이 났다. 그늘 조차 드리워지지 않은 하얀 얼굴에선 귀티가 새어나오다 못해 흘려내렸고 고급 외제차를 타고 핑커팁을 살짝 튕겨대는 광경은 태형의 두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냉랭한 눈동자가 제 앞을 스쳐지나갈 때 태형은 눈을 질끈 감았다. 놓치면 안될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남자가, 이 화려한 외형이, 고독한 과독이 제 동생의 치료비를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팔을 뻗어 명품 시계가 감싸는 손목을 여며 잡았다. 나한테 무너지는 건 이질적인 일이 아니다. 살기 위해선 나를 더 내려 놓아야 하고 감정에 무뎌져야 한다. 덥썩 잡아진 눈빛에 윤기의 시선이 차츰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왜, 라는 무미건조한 음성이 유려한 입술을 꿰뚫고 나와 태형의 심장에 박혔다. 혹시,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태형의 말에 윤기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실소를 흘렸다. 니가 뭔데요.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최대한 간절한 목소리를 밖으로 내며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넓은 아량의 배필이 아니었던 윤기의 눈썹이 짙게 일그러졌지만 태형의 손은 떨어질 줄 몰랐다. 나 이제 이런 생활도 그만하고 싶어요. 잘 살아보겠다고 몸부터 부비대고 아양이나 떨어야하는 비루한 삶이 너무 싫어. 왈칵 울음이 새어 나왔다. 이 남자 앞에서, 것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려 버렸다. 술을 몰래 먹다가 된통 혼난 이후로 아르바이트비로 연명하던 자취방 생활은 끝물을 맞게 되었고 반짝이는 조명 밑에서 나른한 입꼬리를 올리다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로 생활고는 뚝 끊겨 버렸다. 더 이상은 버텨낼 수 없었다. 태형은 새어나오는 억감 속에 어눌한 음절을 끊어 뱉었다. 가장 찬란하다던 해먼 빛은 어디로 가고 다 꺼진 덩이만 흙 속에 남는지. 차라리 환상 속이라면 좋을 듯 했다. 잠시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던 윤기가 싸늘한 시선으로 태형을 흘기더니 제쪽으로 손짓했다. 너, 감당 할 수 있어? 시리도록 날카로운 윤기의 말에 태형이 덥썩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파리한 미소가 입가에 띠워지고 태형의 몸이 차에 실렸다. 어디로 가는 지 조차 몰랐지만 편안했다. 무안의 감개. 


당신은, 누구에요? 

민윤기. 


아아, 태형이 작은 소리를 삼켰다. 저는... 김태형이에요. 근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에요? 질주하는 차 옆의 풍경을 바라보며 태형이 물었다. 어디로 가줄까. 여전히 굳어있는 윤기의 날선 목소리에 흠칫 몸이 떨렸다. 감정이 있기는 할까. 갑갑해오는 목덜미가 가려워 창문을 열었다. 강한 바람이 귀를 세게 때리는 탓에 제대로 말을 뱉을 수 조차 없었지만 윤기는 다 알아듣고 받아쳤다. 저 아까 되게 창피했죠. 어. 엄청. 진짜 미안해요. 미안하면 내려. 네? 넌 적선이란 말 몰라? 알아요... 윤기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뒷말을 묻었다. 우는 모습이 귀여워서 데려왔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고. 핸들을 확 꺾었다. 히익! 휘둥글한 눈동자가 백미러 속에 담긴다. 재밌겠네. 


태형을 거실 쇼파에 눕히고 방에 들어온 윤기가 소리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검은 배경에 적색 조명이 군데군데 자리잡아있고 여러가지 총과 칼들이 차례로 나열되어있다. 사선으로 올라간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SG조직 민윤기, 라고 적혀있는 명함을 한참 동안이나 뚫어져라 바라봤다. 안 그래도 지루하던 참이었는데 그냥 그만둬버릴까. 보스의 명령에 따르면 오늘 자정까지 사람 한 명의 머리에 총구를 겨눠야 한다. 일자로 늘어선 무기들 중 가장 날렵하고 가벼워보이는 총을 들어 정장 안에 숨겼다. 문 밖에서 태형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꽉 잡은 손에 모든 감정을 쪼그라뜨리고 문을 열었다. 


어디가요? 


비몽사몽한 말투로 태형이 물었다. 있어, 몰라도 돼. 무미건조하게 받아친 윤기가 신발을 거칠게 주서 신었다. 항상, 늘, 모든 일에, 매 순간에 냉미적인 인간. 공감 능력도, 공사 구분도 없는 잔혹한 조율사. 주변에서 윤기를 지칭하던 수식어들이었다. 세상에 선천적인 것은 몇 없다. 윤기도 태어나면서부터 인생에 무감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로 위를 탈선한 채 돌진하던 트럭에 부딪혀 몸이 붕뜨고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들이박을 때 조차도 씁쓸한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음주 운전을 하시다 커다란 화물차와 충돌해 절벽 끝 거친 기슭으로 사라져버린 아버지처럼 되길 바랬던걸까. 죽음, 이라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 회생해 연명할 이유가 없었고 시간의 소중함이란 게, 삶의 귀중함이란 게 도태의 허무함보다 애잔해보였다. 별빛 없는 윤기의 눈에 가득찬 세상은 죽음을 담보로 삼아 돈을 빌어먹으며 기인하는 거지들만 가득했다. 그래서 재밌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있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만나 직접 목숨을 끊어주고 싶었다.






열심히 할 각오는 있어? 

네, 뭐. 

처음으로 SG에 들어갔던 날, 윤기가 맡은 임무는 엎질러진 처참의 잔해들을 한데 모아 밖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알쌍한 허릿춤 사이로 깨진 유리파편 하나가 박혀 찢어진 상처로부터 새빨간 피가 새어져나왔다. 아프다는 것에 큰 공감을 가지지 못했던 윤기는 검은 가죽 장갑을 신경질 적으로 벗어던지고 상처부위를 손으로 쓱 닦은 뒤 바지춤에 문지르길 반복했다. 유혈이 낭자한 틈새는 아물 여력이 없어보였다. 허공에 띄워진 더운 숨결들이 간질거리며 제 마음을 비웃어오는 것 같았다. 벌컥, 뒤에서부터 문이 열리고 거기서 우두커니 뭐 하고 있냐며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석진, SG에서 힐링을 담당하고 있는 스나이퍼. 윤기의 눈에 비친 석진은 잔뜩 일그러져 발을 동동 거리고 있다. 피나잖아. 조심해야지! 헐레벌떡 구급상자를 가져와 밴드를 꺼내고 약을 발라주는 그 모습에 미동없던 윤기의 눈동자가 찰랑 움직였다. 


나는, 

이런 보호도 필요없는 

바보일 뿐인데. 

감정도 없고 모르는 것도 많은 

한낱 가장 불행한 아이일 뿐인데. 

피가 나와도 

아프지 않고 

눈물이 흘러도 

슬프지 않은 

죽은 인간일 뿐인데. 

대체 네가 뭐라고 

나 같은 애를 

걱정하는 걸까. 

그때, 처음으로 심장이 뛰었다. 입력된 대로, 계획된 대로 움직이던 기계같은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유일한 자식이었던 윤기를 아끼고 사랑했다. 정말 그래보였다. 하지만 그 사랑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 윤기는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윤기를 칭찬하려 득달같이 목에 핏대를 세우는 부모님의 모습은 다른 이의 시선에서는 한없이 따뜻하고 선했으나 그 모든 것을 묵묵히 감당해야만 했던 윤기에게는 그저 가식과 선의에 그치지 않았다. 그냥 역겨웠다. 잘난 아들 뒀다고 제 모든 걸 자기 권위 마냥 누리고 다니는 모습이, 왁자찌껄한 가족 행사가 끝난 뒤 집에 돌아오면 들리는 싸늘한 말들이. 비수가 되어 꽃혔다. 피는, 그 뜨거운 양물은 이미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물론 아프지 않았다. 묻어두기 시작하니 나약해질 데로 나약해진 몸은 모든 고통들을 흡수해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했다. 몸이 희미했고 잠에서 깨어나도 여전히 꿈 속 같았다. 


사랑, 이라는 것을 믿느냐 하면 단연코 믿지 않는다 답할 것이다. 윤기에게 사랑은 끔찍한 연속물이었다. 사랑한다는 명령 하에 억지로 꽃혀진 일상들이, 사랑하니까 아름답다는 말들이, 아니 모든 상황들이 다. 윤기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아침만 되면 알람음 대신 울려대는 우리 아들 사랑해, 라는 말과 학교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 하나하나 다 기록하시는 아버지께서 입담 처럼 말씀하시는 사랑해서 그러는거야, 라는 말. 대체 사랑이 뭐길래. 심장이 뛰지도 않고 기분이 좋아지지도 않는 이 단어가 얼마나 소중하길래 제 이름보다 사랑한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지 윤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윤기에게 사랑같은 낭만은 없었다. 단지, 발밑에 깔려있는 유리 조각들이 분홍빛일 뿐이었다. 


유리 조각들이 

분홍빛일 

뿐이었다.


헙...! 

민윤기. 

으으... 

야, 정신 차려. 어디 아파? 


제 몸을 흔들며 소리치는 목소리에 윤기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아, 괜찮아요. 창문 밖으로 불어오는 매서운 한기에 체온이 점차적으로 삭감되는 것이 느껴져 허전한 목깨를 괜히 만져댔다. 춥냐? 조금요. 그럼 이거라도 들고 있어. 석진이 들고 있던 핫팩이 윤기의 주머니에 넣어지고 그 찰나에 손이 닿았다. 따뜻한 감촉에 추운 기분이 사르르 가시는 것만 같았다. 괜찮냐 재차 물으며 손등으로 열이 있나 확인한 석진이 무전통 위로 들려오는 호출 소리에 윤기의 등을 토닥이고 발걸음을 반대 방향으로 옮겼다. 석진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둘의 손이 다시 맞닿았다. 윤기가 석진의 팔목을 잡아 세웠다. 왜? 나 먼저 가봐야 돼. 할 일 마저 해. 아니요. 눈을 커다랗게 뜨며 별반 같은 잔소리를 해대는 석진의 깊이에 윤기가 있었다. 손 한 번만 더 잡아주실래요? 


뭐어? 


누가봐도 찡그려진 얼굴 위엔 귀찮은 기색이 만연했다. 하지만 윤기의 의지도 확고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은 많이 생소하기도 했지만 뭐랄까... 간질거리는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아, 몰라. 앞 뒤 문맥 다 날려먹고 툭툭 내뱉어지는 단어들은 석진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형. 어?? 저 아까 허리 다쳤잖아요, 아직도 아픈 것 같은데 좀 봐주실래요? 움직일 수가 없어서요. 아 근데 나 지금 호출... 형, 석진이 형. 제발. 야... 너. 제가 몸을 못 쓰게 되면 유리파편은 누가 옮겨요. 보스님께는 제가 나중에 잘 말해볼게요. 그러니까 그 문 열지말고 제 옆으로 와봐요. 


민윤기는 항상 그랬다. 자기주장이 강했고 한 번 물면 놓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집 안 행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욕이 오가는 말싸움을 벌이면서 제 감정을 억제하는 방법만큼이나 일찍 터득한 것이 공세에서 밀리지 않는 법이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 일진 무리가 저를 앞에 두고 앞담을 까내렸을 때도 윤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논리정연한 말투로 맞받아쳤다. 그 때 부터 감정없는 인간이라는 별명이 꼬릿표 처럼 따라왔던 것 같다. 

엄마, 저는 엄마 아들 아니에요. 

그럼 나가! 

나갈게요. 제 결정은 제가 책임져야 하는 게 맞는 거니까. 

지옥 구렁텅이에 처박힌 몸을 이끌고 기어이 집을 나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개같게도.




윤기야. 무기는 다 챙겼어? 

오늘 공고 못 봤지. 보스가 명령 내리셨어. 

형. 조용히 해요. 

우리 둘 밖에 없을 땐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는 하지 말자 했잖아요. 나만 봐주면 안 돼요? 

난 이제 따뜻함이라곤 너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좀 대범해질게요. 형이 넘어와줘요. 

너 나한테 왜 자꾸 그래? 

좋아한다니까요? 

난 너 안 좋아해. 형한테 윤기는 그냥 아끼는 동생일 뿐이야. 

거짓말. 사랑한댔으면서. 

그거는 의미가 다르잖아. 사랑한대서 다 사랑하는거니? 

형의 사랑도 결국 똑같았던 거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랑 아빠랑 형은 다를 게 없어요. 

좀 알아듣게 설명 좀... 

빈껍데기 같은 사랑이었네요. 세상 모든 사랑은 왜 이렇게 좆같죠? 나는 형이 날 사랑한다기에 눈이 멀어서 형한테만 목 매달았어. 근데 그 사랑이 그저 형식적인 말에 그치지 않았다고요? 형은 나한테 사랑이란 단어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줄 알아요? 사랑때문에 집을 버리고 나왔어. 엄마 아빠 손을 팽개치고 도망쳐서 다다른 곳이 비극한 숨통 같은 여긴데, 이 곳 마저 나한테는 족쇄네요. 재밌어요. 그죠? 근데 형 그거 알아요? 나는, 

한 번 문 먹이는 절대 안놓쳐요. 그거 알아두시고. 

하... 제발... 윤기야. 

네? 

제발 좀 살게 해주라. 응? 

왜요? 

그 한 번 물면 놓치지 않는 특성 때문에 민윤기는 김석진을 탐욕했다. 

그리고 그 욕망이,
김석진의 목을 매달았다. 


형. 저는 사랑을 믿어보려고 했어요. 근데 그건 죽어도 안 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든 못 믿을 사랑을 한 번 손에 쥐어보고 싶었어요. 형은 내 바램을 다 채워주지 못했네요. 유감이에요. 내가 형한테 끝까지 달콤하지 못한 사람이라 미안해요. 


윤기의 발밑에 깔려있던 분홍빛 유리조각들이 붉게 변했다. 석진이 극적인 선택을 한 이후로 윤기의 신원은 SG 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억울한 감정이 잔뜩 호소된 유언장이 윤기의 장갑 속에서 발견되었고 그걸 확인한 여러 조직원들의 입에선 윤기의 욕이 마치 물결처럼 노닐었다. 어떻게 후임 따위가 선임을 상대로 되도 안한 협박을 할 수 있냐며 사랑이 그렇게 중요했냐, 하는 비꼬는 말들이 가득했다. 그럴 때 마다 윤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되려 억울한 건 난데. 지독한 감정 놀이에 휘말려 애석하게도 나 자신을 갉아먹은 건 난데. 왜 다 형만 감싸주고 나는 바라봐주지 않는거야? 나는 역시 아무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인거야? 

야, 민윤기. 말 좀 해 봐. 너는 입이 먹어서 말을 못하는 거야? 

... 

허, 야. 딱보니까 석진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겠네. 사랑? 그게 뭐길래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사랑해야 하는데? 넌 그냥 정신병자야. 알어? 

...저는 미친 게 아니에요. 

넌 미쳤어. 

아니야. 

미친 놈. 

난 미치지 않았어.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민윤기씨? 


얼마나 서있었던 걸까. 잠에서 깬 태형이 종종 걸음으로 윤기 옆에 섰다. 아까 되게 바쁘시다더니 안 가세요...? 어, 가야지. 평소와 다름없이 열린 문 사이로 한 발짝을 내딛으려는데 옷 춤 사이 헐빈하게 꽃혀있던 총이 툭 떨어져 흙물을 튀겼다. 윤기의 표정이 일순 굳어지고 그걸 지켜보고 있던 태형의 눈가에도 그늘이 졌다. 그거... 총 아니에요? 아니야. 한 순간 두려워진 윤기가 애써 말을 돌리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윤기씨, 절 여기 데려온 이유가... 그런거에요? 저 죽이려고? 눈을 크게 찡그린 태형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달려 쇼파 뒤에 숨었다. 동생이 평생 병을 달고 살아야 하는 이유. 굵다란 탄비가 얇은 피부를 뚫고 동맥을 스쳐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기적같이 살아난 태형의 동생은 안타깝게도 제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됐다. 그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본 태형으로썬 당연히 총이 두려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믿고 따라온 마지막 기회가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니. 모든 것이 와장창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온 몸을 감싸돌았다. 으아악, 절망적인 소리가 잇새를 가르고 튀어나왔다. 태형의 비명 소리를 들은 윤기의 심정도 썩 괜찮지는 않았다. 태형 마저 저를 부정하는 것 같아서. 결말을 잔혹하게 만들어버릴 것만 같아서. 이래서 내가 끝까지 숨기려고 했던건데. 혹여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간절한 눈동자 안에 내가 또렷히 담길 수 있을까 싶어서 기대의 앙심을 품었던건데. 내가 얼마나 많은 선의를 보여줘야 김태형 네가 나를 역겨워하지 않을까. 윤기가 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본 태형의 표정은 두려움과 약간의 공포가 파랗게 질려 손까지 덜덜 떨고 있을 듯 했다. 모순적이게도, 웅크려진 몸의 열기는 발끝부터 올라오는 지독한 냉기를 내보내지 못했다. 그렇게, 태형은 두려움을 한 번 더 곱씹었다. 


톡톡, 빗물이 창문을 두들겼다. 이불을 꽁꽁 두른 채 눈만 감고 있던 태형이 꽉 닫혀 잠겨버린 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어, 음... 아직 오지 않은 윤기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혹시 몰라 이불을 바닥에 팽개치고 주춤한 걸음을 옮겨 윤기의 방문 앞에 다다랐다. 어설프게 잠겨있는 문을 세게 잡아당겨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암흑의 빛과 그 사이의 네온 사인. 군데군데 찍혀있는 핏자국. 무섭다. 짝을 잘못 찾은 게 틀림없다. 빨리 도망쳐야 해. 태형이 그렁한 눈물을 떨구고 제 쪽으로 향한 수많은 총구들을 잡았다. 총, 피스. 아마 내가 여기 몰래 들어온 걸 그 사람이 알면 나는 어떤 총으로 죽으려나. 어쩌면... 주제도 모르고 살아보겠다 발악한 내 탓일지도 몰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무시도 당하고 제대로 된 대가도 못 받고... 


흐윽... 


너무 서럽고 괴로워서 울어버렸다. 이제는 동생을 만날 수도, 동생 수술비를 대주지도 못 할 것이다. 아, 씨. 이딴 게 인생이라니. 얼마나 비참해. 어떻게 해야 내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나락의 끝은 대체 어디길래 나를 이렇게도 깊게 욱여넣는걸까. 사랑, 한 땐 사랑이 모든 걸 다 해결해 줄 수 있을거라 믿었는데. 빈껍데기 같은 사랑이라도 충분히 굳은 마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민윤기는, 그런 속삭임을 뱉어봤자 흔들릴 사람이 아니다. 끈적거리는 진흙탕에 돌을 던져 자그만 물결을 만들어봤자 그 파동은 굳어버리는 순간 형체만 남고 깊은 심연 속으로 사라진다. 


야, 김태형. 


하지만 그 심연은, 찢어발겨진 조막한 상처 덩어리들이 뭉쳐 이루어진 거대한 암흑이다. 암흑의 안에 민윤기가 있고, 그 주위를 메우는 몽실거리는 방울이 김태형이라면 찬란하게도 아름답다. 찬연하게도. 

거기서 뭐 해? 

아... 그냥 할 게 없어서 구경이라도 할 겸 들어와 봤어요. 

내가 들어가지 말랬잖아. 

민윤기씨. 아니 윤기 형. 

갑자기 왜. 

형 손에 들려있는 총구가 어딜 향하고 있는지 알아요? 

뭐? 

지금... 날 죽이려 하고 있잖아요. 

아주 끔찍한 표정으로.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 하는 표정으로. 

... 

형은, 어떤 사람이에요? 어떤 일을 해요? 김태형을 이 커다란 집에 혼자 두게 할 정도로 악독한 사람이에요? 아무렇지 않게 사람 가슴에 총탄을 박아넣고 비릿한 입꼬리를 혼미에 매거는 냉미한 사람이에요? 나는 내가 왜 여기, 이 총구 끝에서 도망칠 수 없게 만드는 형을 자꾸만 이해하려 드는지 잘 모르겠어. 차라리 사랑하게 만들고 싶어. 나한테 왈가닥 빠져서 그 작디작은 총 한 발 못쏘게. 그래서 내 숨통이 조금이라도 트였으면 좋겠어. 

사랑에 미쳐버린 윤기야 

미쳐버린 

윤기야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싶어 

미친 건 너야 

사랑에 빠지게 

석진이가 그렇게 된 건 

사랑에 

너 때문이잖아 

사랑해.





사랑할게, 태형아.


그래요, 그럼. 

어차피 내 목적은 사랑이었어.



태형은 살기 위해서 사랑을 선택했다. 사랑의 낭만적 속삭임이 거대한 암흑에 파동을 일으키고 달콤한 선악과가 되어 형체를 이루었다. 한 입 베어물면 쓴데, 그 다음은 진짜 짜릿해요. 왜, 그 있잖아요. 넘어선 안 될 선을 한 번 넘고 나면 화까닥 돌아버려서 영영 못 돌아오는 거. 나는 그게 소설 속에만 실재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알고 보면 나도, 형도 다를 바가 없어. 형은 몰랐겠지만요, 사실 나는 아주 사랑 받고 싶은 아이였어요. 엄마는 아주 바쁘셨어요. 아빠는 일전에 만나 본 적이 없고 동생은 어렸을 때 부터 병원에 갇혀 살아야 하는 신세였으니 가끔 병문안 들를 때나 볼 수 있었죠. 학교에서는 나를 고아 새끼라며 엄마의 존재를 무시하고 아픈 동생 둔 형이라며 놀려대기 바빴어요. 그래도 나는 믿음직한 아들이 되고 싶었어요. 내가 중학교 때 책을 진짜 열심히 읽었거든요? 그 때 사랑이라는 가치에 대해 처음 알았어요. 옹졸하게 싸우던 두 연인이 사랑한다는 한 마디에 모든 걸 용서하고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는 이야기와 사랑에 눈이 멀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남자의 이야기. 나는 그냥 사랑이 너무 설렜어요. 사랑한다는 입 발린 말 한 마디에 입술부터 부딪혀 올 그림자들을 생각하니까, 그게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거 있죠.



나는, 

김태형은, 

사실 그렇게 책임감이 투철하지도, 듬직하지도 않아요. 

어젯 밤에 엄마 한테서 전화가 왔었어요. 

마지막엔 꼭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더라고요. 그렇게 힘들면서, 고통스러우면서, 발버둥 치고 싶으면서. 

어릴 때는 채집기에 갖힌 나비가 불쌍했어요. 그 아름다운 날개 한 번 허공에 띠워보지 못하고 고작 좁은 플라스틱 상자에 갇혀 허둥댄다니, 꼴이 비참하기 그지없었죠. 그래서 일종의 동정심이 생겼어요. 내가 키가 더 크고 몸집이 커지자 엄마는 나를 학교에 집어넣었어요. 채집장에 나비가 들어가요. 내가 생각하기에 엄마는 그다지 호의적인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하기야, 일생의 대부분을 자식 뒷바라지 하느라 다 바쳤는데 자기 시간 챙길 여유가 있나요. 엄마는 나를 되게 귀찮게 봤어요. 입이 많으면 들어가는 돈도 많이 드니까. 거기서 생기는 부담감이 너무 불안하고 싫었대요. 나는 엄마한테 짐을 실어주기 싫었어요. 알바? 클럽? 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다 했어요. 서빙도 해봤고 공사장에서 인부 생활도 몇 달은 했어. 그러다 보니까 점점 내 인생의 주체가 내가 아니게 됐어요.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삶. 물이 있어 헤엄치는 지느러미 달린 물고기, 공기가 있어 숨을 쉬는 쓰러진 사슴 처럼 세상의 모든 게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살기 위해 세상에 목매달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런데 자꾸만 돈을 벌고 또 손에 쥐어도 행복하다는 감정이 들지 않았어요.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억지로 맺어 손마디 안에 가둬놓은 것 같이 모든 걸 가지고 있어도 여전히 어딘가 공허하고 맹숭했어요. 왠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잃은 것 같은 느낌. 나는 누구지? 왜 여기서 일을 하고 있는거야? 동생 병이 나을 수는 있어요? 엄마는 왜 나를 싫어하시지? 그러면서도 왜 

엄마는
날 사랑해? 

엄마 힘든 거 알잖아. 왜 시답잖게 투정이야. 너까지 그러면 진짜 못 버텨. 

그래서 내가 이렇게 몸 까지 팔아가면서 망가지고 있잖아요. 잘했다는 말 한 마디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사랑해, 됐지? 

내가 원하는 말은 그게 아니에요. 

사랑한다고. 이 말 밖에 더 나오겠어? 엄마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했어. 

엄마가 그렇게나 그리워하는 아빠도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잖아요. 그래서 얻은 게 뭔데요? 셋만 남은 가족 사진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뭔 줄 알아요? 아니, 엄만 몰라. 항상 내뱉는 말 끝마다 다 사랑한대. 힘들어서 사랑하고 미치도록 죽고싶어서 사랑해요? 이게 사랑의 의미에요? 난 왜 제대로 된 사랑을 못 받을까? 왜 진심이 없을까? 

그러면서 왜,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사랑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사랑은 쌍방이 공평한 거래요¿ 

엄마가 짊어진 적자, 그거 내가 갈아치워 올게요. 

못 받은 사랑, 주는 만큼 받을 수 있다는 게 이 저울의 원리라면 나는 기꺼이 사랑에 몸을 내던질 거에요. 

알게 뭐야. 

그게 내 낭만인걸.


그러니까 내가 웃기댔잖아. 


태형의 입술이 윤기를 덮쳤다. 촌열한 사랑, 헤태로운 책임 전가의 연속. 진득하게 벌어진 잇새 사이로 다른 체온을 가진 말캉한 혀 두 개가 섞여 질척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끝까지 허공만을 직시하려던 눈동자는, 눈썹 밑 그늘을 더 짙게 만들던 괴리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직 사랑만을 갈구했다. 마치 사랑하기 위해 잉태된 흔해빠진 잔상들처럼. 내 세상에 네가 있고 너른 네 품에 내가 웅크려있다면 내 무덤덤함이, 무감이, 고독함이, 서러움이, 슬픔이, 악독이. 다 씻겨져 내릴 수 있을까. 푸르른 심연 속 깊은 해멍이 거대한 암흑 덩어리의 빈 허공을 메워넣는다. 몽실거리는 구름, 하지만 그렇다고 투명하지는 않았던 고 한낱의 절실. 꽃을 메워 피우기 위해서 이리도 많은 조경들이 필요했었나 보다. 사랑, 끝내 피워보지 못한 작은 불씨가 황홀한 절경을 바탕 삼아 하얀 도화지를 붉게 물들이고 마음의 형질을 들끓게 한다. 태형의 가녀린 손을 잡은 윤기가 둥근 어깨에 이를 박아넣었다. 결박, 구원의 속박. 견고하게 새겨지는 마스터피스가 꽤 볼만 했다. 점점 아찔해지는 감각에 태형이 낮게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치한이 극악에 치솟을수록 고고하던 숨결은 거칠어지고 맞부딪히는 애향의 열기가 앞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외쳐버렸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몽몽한 기분 탓에 입을 제대로 열어 말을 뱉기 조차 힘들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선악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씹기만을 기다리는 적패, 민윤기와 김태형은 그렇게 섞여들어갔다. 


서로가 만들어 낸 첨예한 실오라기 세상에서. 

작은 섬, 허물어진 모래성에서.






내가 누굴 잡으라고 했는데, 생전 보도 못한 이상한 새끼를 죽여와? 


커다란 음성이 버럭버럭 튀어나와 꽉 쥐어진 손의 숨결을 더 가빠지게 만들었다. 제 앞에서 역겨운 눈동자를 굴리며 사죄와 반성, 그리고 복종을 외치는 보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윤기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댔다. 하하하. 보스님. 저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니에요. 잘난 네가 키우는 개새끼도 아니고요. 차라리 부패와 타락을 논하시지 그래요? 사람 머리에 구멍 하나 박아넣는 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사람들은 왜 나를 기시하죠? 정작 나를 이렇게 만든 건 치 떨리게 살벌한 분위기 속 청승맞게 구는 애 만도 못한 어른들인데. 세상 앞에 발걸음 내딜 공간을 안 줬잖아. 내 매일 밤은 목이 졸리는 것 처럼 황홀하다가도 괴악해져요. 아찔한 사랑이 시야 속에 담기면서도 손만 뻗으면 허탕질이야. 차라리 진흙 묻힌 사탕을 입에 물고 싶어요. 진득하게나마 떨어지지 않을테니까. 혀는 새의 부리를 삭막하고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심장 고동소리가 천천히 쌓아올린 모래성을 휩쓸어 망가뜨려요. 기꺼이 잡아뒀던 심연의 끝은 더 깊은 암흑이었을 뿐이야. 이제는 무너진 모래성을 붙잡고 흘러내리는 까슬하디 보들한 감각에 통곡하고 있네요. 참 달콤씁쓸해. 사랑만 하면 나는 피폐해져요. 보스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사랑을 믿어요? 라고 말하면 뭐라 답하실 수 있어요? 왜 하필이면 김태형을 입방아에 올리고 뾰족한 절구로 그렇게도 찍어댔어요? 잘못한 게 없잖아, 그 애는. 그 사실이 너무 분통해서 그렇게라도 안 하면 내가 걔를 죽여버릴 것 같았어. 뭐랬더라? 김태형이 다른 남자랑 몸을 섞는다고요? 그리고 그 남자가 당신 동생이라고요? 매일 밤 찾아와서 돈을 요구한다고요? 김태형이 거지야? 걘 나만 바라봐요. 어디서 그딴 실언 처듣고와서 김태형을 죽이니마니 결정해요. 우리가 만든 세상 앞에선 서로가 전부야. 그러니까 한 번만 더 지껄여봐요. 그 땐 내가 당신 손목을 그어줄테니까. 


으득으득, 손톱이 차가운 바람에 낱낱이 쪼그라 들었다. 꼭 맞을거라는 믿음 아래 피어오르는 의심의 증반. 생각은 그렇게 했어도 걸리는 구석들이 좀 있었다. 어젯밤, 태형은 사랑한다는 제 고백을 들은 이후로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조금은 간절하고, 급한 눈치를 보이며 신발부터 찾아매는 그 걸음에 어쩔 수 없이 밖에 나가겠다는 요구를 들어줬더랬다. 지금까지, 그러니까 윤기가 이른 아침 SG의 호출을 받고 집 밖을 떠났을 때 부터 공기가 어둑해지고 가로등이 길 위에서 하나하나 수놓이는 지금 이 시간까지. 이상하게도 태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피 못할 괴리감과 기시감을 기반한 징후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디로 간거야 대체. 태형의 흔적을 찾아 헤매이는 윤기의 눈동자가 아득한 적막을 갈증했다. 꾸역꾸역 접힌 미간 사이 적색 멍울이 선명하게 지고 마지못해 달렸다. 넓은 집 안의 공기는 개탄스러울 리 만큼 숨이 죽어있었다. 빠른 손길로 태형의 옷을 찾았다. 다행히도 쇼파 밑에 구겨져 있어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기자기한 잠옷 사이 뜯어진 실오라기처럼, 실밥을 풀어내도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처럼 가슴 깊이 먹먹히 새겨진 아둔한 감정은 입을 다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랑한댔잖아. 응? 지금이라도 괜찮으니까 다시 나한테로 돌아와. 시발, 돌아오라고. 아무래도 괜찮으니까... 


사랑만은 

품을 수 있게 해 줘. 

내 마지막 남은 게 

이렇게 아름다운 넌데, 

믿고 싶지 않았던 사랑을 

내 가슴팍에 억지로 집어넣은 건 넌데. 

왜 

너는 없고 무너진 모래성만 바람에 스치우냐고. 


제발... 진짜 내가 빌게. 날 떠나지마. 너가 없는 내 세상은 이미 암흑이야. 내가 들은 모든 게 다 거짓이었다고, 너는 여전히 나만을 사랑한다고 속삭여줄래. 안 그러면 내가 또 미쳐버릴 것 같아, 태형아. 

죽는 건, 아무래도 아프잖아. 그치?



형. 민윤기. 

나 왔어요, 윤기야. 


어딜 갔다 이제 와. 태형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윤기의 몸이 들썩이며 세워졌다. 조금 피폐해진 몸을 이끌고 돌아온 태형의 표정은 어딘가 적온에 가득차 있었으며 심통을 뚫고나오는 빛은 화사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 동생 병문안 갔다 왔어요. 오늘 동생 생일이라서. 근데 아침에 왜 그렇게 다급했어? 푸핫, 지금 의심하는 거에요? 너 내가 일찍 들어오라고 그렇게 전화 했었는데 다 씹더라? 그건 죄송한데, 형 나도 자유를 누릴 시간이 있어야죠. 이 넓은 집에서 할 수 있는 게 사랑 밖에 더 있어? 야. 왜요. 내일부터는 내 옆에 있어.


...알겠어요. 

윤기를 바라보는 태형의 눈동자에 열의가 피었다. 윤기 쪽으로 땡겨앉은 태형이 쇼파에 머리를 기댔다. 서서히, 졸린 눈이 감기고 몸이 나른해지며 어깨 위에 올려뒀던 두 팔은 맥 없이 떨어진다. 툭.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던 둘 사이를 갈라놓는 그 소리는 정성스레 모래알 하나하나 모으고 굳히고 또 쌓아서 만든 거대한 모래성이 하릴 없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와 비슷했다. 어쩌면 두 배는 더 둔탁하고, 열 배는 더 날카로운 총성과- 

비슷했으려나? 


사랑 받지 않은 존재는 사랑 할 수 없어? 어, 비참하게도 그래. 그럼 왜 너는 사랑을 갈구해? 그냥, 나는 사랑 받으면 행복해질 것 같았어. 동생이 죽어가는 그 시간만큼의 슬픔과 허탈감, 긴박함, 간절함이 조금은 덜어질 줄 알았어.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 엄마가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며 다 갈라진 목소리로 내 심장에 얼음을 박아넣는 악순환도 반복되지 않을거라 믿었어. 나는 누군가가 내 마음을 완전히 빼앗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정신을 못차리게, 입 안 부터 천천히 헤집어 온 몸이 엉망 덩어리가 되더라도 나는 진흙탕 흠뻑 적신 사탕 알이라도 굴려 기꺼이 받아내고자 했어. 나한테 사랑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보이는 끈과 같았어. 선악과를 잘게 잘게 짤라 붉은 혀에 문지른 뒤 섞는 조율의 환희는 지독히도 감미로웠어. 색색이며 사랑을 날조하는 흉상의 모습을 감상하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지. 정말 신이 만들어 낸 피조물 같이 영롱해 보였으니까. 우리에게는, 아니 내 손 안에는 사랑이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사랑 하나 못 잡아먹고 이렇게 망가지고 있어. 그리고 깨닫게 됐어. 나는, 


사랑을 몰라. 그래서 어떤 감정이 사랑인지 감지 할 수 없고 설령 내가 느끼는 따스함이 사랑이라 할 지라도 그 자체를 받아들이질 못해. 생각보다 사랑하는 건 어렵더라. 제 모든 걸 도박판에 깔아놓고 내려놓으며 베팅해야만 얻을 수 있잖아. 승자는 물론 즐겁겠지. 하지만 사랑이라는 명명 하에 휘둘리고 내쳐진 애석한 인간은 결국 피부터 토하며 죽어. 먼저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한 것이 죄겠지. 사랑은 한 번 시작하면 정말 끝도 없이 커지니까. 나는 민윤기라는 사람과 도박에 빠져들었고, 결국 내가 먼저 놓아버렸어. 남들처럼 애틋하고 평범한 사랑을 원했는데. 내 삶의 최후통첩은 비극이었나봐. 어릴 적 숨 쉴 때마다 들려오던 사랑한다는 말에 내 영혼을 팔아넘기고 돌아오는 익숙함의 시간 아래 연민을 버렸었나봐. 

사랑이 이렇게 위험한 줄 알았으면 시작 조차 하지 않았어. 

결국 이렇게 떨어질 걸 알면서도 왜 나는 

환상의 편린 하나하나 모든 가시는 숨결을 내어쉬어봐도 잡히지 않는 일촉이 

그렇게도 좋았을까.



난 되게 방탕했어. 순결을 물들일 자극을 원했지. 그런데 말이야. 하얀 솜에 붉은 와인을 들어붓는대도, 실오라기 하나하나 썩어빠진 포도의 향을 담는대도 결코 본질은 바뀌지 않아. 깊은 심연은 깊을 뿐이고, 허물어진 모래성은 허물어졌을 뿐이고 비극적인 사랑은 비극적일 뿐이야. 그리고 사랑하지 못하는 김태형은 사랑하지 못해. 

맞아.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고, 

이젠 아무도 거스르지 못 해. 

거룩하게도 끈질긴 내 낭만적 사고를.



왜냐고? 

나는 그 마지막이-




죽음이란 걸,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거든.



민윤기는 나한테 있어서 죄악이었어. 

그래서 엉엉 울면서 기도했어. 

차라리 죽여주세요. 

사랑하는 사람 손에 죽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죽어서 내 몸이 가벼워지면 

그 때는 부디 사랑받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허물어진 모래성이 아닌, 단단한 다리로 살아가게 해주세요. 

내가 무너지면 내가 받히고 있던 사랑도 함께 무너지잖아. 

그럼 잡을 기회도 사라지는 거잖아. 

그러니까, 

날 다시 살리지 마요. 

눈을 뜨는 그 순간만큼은 

진짜 못 버티고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아서 그래. 

다시 악몽같은 기억이 반복되고 나락에 빠져버릴 것 같아서 

두려워서 그래. 

그래서 오늘 죽으려고요. 

세상에 두려움보다 대단한 무기는 없으니까.







윤기의 손 끝 총구가 태형에게로 향했다가 주저 못해 다시 가라앉았다. 제발 자신을 죽여달라는 태형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거칠게 덮쳐오는 입술의 나른함을 거부하지 못했다. 민윤기는 겁쟁이다. 끝까지 사랑을 잃을까봐 방아쇠 앞에서 무진장 망설인다. 태형아. 우리의 낭만이 죽어서라도 이루어진다면, 그래서 사랑이 깨지지 않고 실증적인 형태로써 남는다면 나는 기꺼이 네 부탁을 들어줄거야. 그게 독이든 약이든, 칼이든 총이든. 그러면 우리 사랑은 이대로 끝나지 않는 거지? 그런거지? 사랑 하나는 꼭 지킬 수 있는 거 맞지? 


네 맞아요. 태형이 실풋 웃었다. 그 여느 때보다도 태형의 얼굴에 비치는 검은 잔상은 짙었고 침을 타고 넘어가는 달콤한 독주의 멜로디는 잔혹했으나 아름다웠다. 아, 부드러운 선율의 진혼곡이 바로 옆에서부터 들려온다. 손톱을 꺾어 간신히 몸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던 태형이 힘을 빼고 천천히 거친 잔물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슬처럼 몰려오는 지난날의 속박들. 사랑의 기억들, 파탄 난 사탕의 조각들. 진흙탕 속 나비, 마지막으로 울리는 총의 탄성. 그리고 떨어져 나가는 심장과 적막. 그 가운데서 웃고있는 민윤기와 화사한 미소를 띠고 사랑을 외치는 김태형. 


엄마,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한 것 같아요. 

나는 이제 죽어요. 

그렇게 되면 앞으로 영영 엄마를 보지 못하겠죠. 

그렇다고 슬퍼하지는 말아요. 

나는 충분히 아팠고, 충분히 원망 받았으니까요. 

그저 엄마라는 테두리 안에서 내가 한 발짝 벗어났을 뿐이에요. 

미안해요. 끝까지 좋은 아들로 남지 못해서. 

그래도 나는 엄마를, 

정말 많이 사랑했을 거에요. 

내 심장이 뛰는 마지막 순간까지. 


태형의 눈이 털썩 감겼다. 딱딱한 바닥에 얼굴을 맞대고 누운 그의 몸은 이미 온기를 잃어 순식간에 차가워지고 있었다. 윤기는 고개를 숙여 흐려진 심장으로부터 새어져나오는 비릿한 피를 바라보았다. 우리의 낭만은 결코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었어. 마치 선악과처럼, 우린 알면서도 이끌렸고 결국 벌을 받은 거야. 사랑을 바래서는 안되는 내가 사랑을 범해서 너를 잃었고, 사랑을 줄 수 없었던 네가 사랑을 이루려다 나를 떠난거야. 마지막 게임의 승자는 역시 아무도 없어. 사랑은 주는대로 받아야 공평한 격, 이 총구의 끝발이 내 주억을 이리저리 흩어놓는대도 난 쥐고 있는 방아쇠를 더 꽉 잡아 맬거야. 절대 벗어나지 못하게. 이미 사랑을 믿어버리기엔 우리 세상이 너무 타락했고, 물컹한 숨결을 내뱉기엔 우리 폐부는 너무 부패했어. 지금 내 머리 위로 올려지는 낙창같은 낭만은 너무 진했어, 바보야. 

우리는 시작부터 

잘못 끼워졌어. 

우리의
시작은 미약할지언정 끝은 창대하리. 

시작은 누구나 미약하지. 근데 창대해지는 건 또 어떻게 하는 거야? 우리는 여전히 미약하잖아. 너무 미약해서 존나 쉬운 감정 하나 못 추스리고 죽었잖아. 그래, 너는 죽었고 나는 

죽어가. 

미친 놈의 사랑, 미친 사랑이지. 객기 어린 낭만이지. 그래서 난 오늘도 피 같은 와인을 들이마시고 네 향기에 취해.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다섯 모금. 

어라? 네 모금이 빠졌네.








너와의 모든 기억들을 

스러져 가는 와인잔 안에 가득 채우고


탕.


사랑했어, 태형아.








우리의 낭만은 곧 가면이었어. 






그토록 염원한 낭만적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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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비애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