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더랬다

아가페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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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낭만실조  |  표지/먐ㅁ
음악을 들으며 읽어주세요. 
🎶 https://youtu.be/ARwVe1MYAUA



아, 좆같다. 

무명無名은 흠씬 두들겨 맞은 골목길 어귀에서 피가 섞인 침을 퉤하고 뱉었다. 시발 새끼들, 좆같은 놈들, 개새끼들. 아무리 욕을 해 봐도 되는 건 없다. 어떻게 사람이 무방비하게 잘 때 밧줄로 손을 묶고 쥐 잡듯이 잡을 수 있는 지. 천벌 받을 새끼들. 지들이 못 난 걸 왜 남한테 화풀이 하는 지. 아마 시샘이 난 것들의 짓일 테지. 무명은 머리가 잘 굴러가는이였기에 입 밖으로 추잡하고 꾀죄죄한 말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말해봤자 내 꼴만 더 우스워질 뿐이다. 이미 간과하고 있는 건이다.

돌아갈 곳도 없는 마당에 더이상 할 수 있는 건 없다. 여기 있는 이들 중 악착같이 위로 올라가려는 이는 없거니와 이딴 더러운 생활에 익숙해져서는 제 눈높이 마저 낮아졌다. 그러니 이런 생활도 만족하고 지들끼리 낄낄 처 웃어댈 수 있을 노릇이어라. 무명은 머리가 잘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랬기에 올라갈 수 있을 법한 이들도 찾지 못 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아아, 그랬으면 좋겠다. 언젠가 저 멀리 별의 유성처럼 등장한 나의 주군이 나를 끌어줬으면 좋겠다! 내 능력을 인정해주고 같이 천하를, 세계의 어두운 면을 나와 정복하는 거지! 무명은 절대로 일어나지도 않을 허상만 크으게 그려가며 구석에 몸을 억지로 구겨넣고는 눈을 감았다. 가끔은 이런 제가 정신병자 같을 때도 있다. 병신. 속으로 두어번 되뇌었다.

그런 허황된 상상을 하면서 처음으로 무명의 얼굴에 웃음이 폈다. 그것마저 가냘프게 보였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이미 머리속은 나의 주군이 나를 인정하여 네 덕분에 천하를 내가 가졌구나! 하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야가 암전됐다.


눈을 뜨니 보이는 건 눈이었다. 그러니까 저를 응시하는 멀쩡한 두 눈동자.

무명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어차피 벽에 가로막혀 있는 주제에도 놀라 손바닥으로 벽을 부여잡았다. 손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묶였던 밧줄이 풀려 외로 내팽게 쳐졌다. 저 이가 해 준 건가?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하하! 상대는 호탕하게 웃으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장발? 순간 여자라고 착각할 뻔 했다. 이 구역에서 못 보던 놈인데. 워낙 거기가 거기고 여기가 여기라 웬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여기서 남성 중 장발인 미친놈은 없을 뿐더러 저런 장신이면 못 알아볼 리도 없었다. 평소 침착하던 무명도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너..네 이름은 뭐냐."

"나? 흐음..나? 이름? 정체도 아니고? 진짜 나?"

"..그래 너. 너 말고 다른 이가 있냐?"

"아니! 내 이름부터 묻는 인간은 네가 처음이라 내가 많이 설렌단다. 내 이름은,"

개똥이란다! 하하핫! 으하하!

무명이 정색했다. 사내는 본인을 개똥이라 칭하며 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다. 누굴 놀리는 건지. 멍청함에 실로 감탄이 나오게 생겼다. 무엇이 그리 웃긴지 웅크린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기 직전까지 갔다. 물론 본인이 다시 중심을 잡았지만.

글쎄, 싸우다 한바탕 진흙을 뒤집어 썼더니 그렇게 부르지 뭐니? 그는 무명의 옆에 걸터앉아 시키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모터라도 달린 것 마냥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틈에 무명은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 그래도 사 오 분 쯤 지나니 정신이 완벽히 맑진 않아도 이야기는 들을 수 있을 만큼이 되어 무명은 웃으며 떠들어대는 이의 이야기를 집중해 들었다. 딱히 무얼 할 염두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 무리에게 가봤자 얻는 건 없다.

그렇게 개똥이란 작자가 한껏 목소리를 키우고 조잘조잘 대며 본인이 싸운 일담을 풀어내는데, 자신이 속한 무리, 그러니까 흑귀黒鬼단의 대장이었던 광휘가 자주 나불댔던 이야기다. 온갖 멋들어보이는 한자들을 조합해서 만든 이름이지만 애새끼가 장난 하는 것 같아 딱히 그런 생각은 없었다. 물론 갈 곳이 없어 그 곳으로 들어온 것도 자신이었지만.

"..그래서."

"응?"

"그 새끼들, 결국 어떻게 했는데."

광휘는 당연하게도 사람은 인정머리가 있어야 한다며 살려 돌려 보내주었다, 고 했다더라. 그걸 듣고 박수를 치는 역할이 제 역할이었기에 이 이도 그런 답이 나온다면 망설임 없이 일어설 터였다.

그가 미묘하게 웃었다. 역시나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나. 무명이 몸을 일으켰다.

"당연히,"

다 죽여서 진흙에 담궈버렸지! 그 꼴을 꼭 보여주고 싶은데. 지금쯤이면 흙도 굳었지 않을까? 아닌가?

태연하게 답변하는 그에 무명이 무언가 홀린 듯 일어선 채로 미동도 없이 가만 있었다. 쇳덩이가 방금 뒤통수를 세게 때리고 간 듯 싶었다는 표현이 이해가 됐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금방 잦아졌다. 인기척이 나더니 금방 훅 털고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한 무명의 앞에 훌쩍 선 그가 몸을 낮췄다.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에는 아무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고 궁금하다는 듯 의문이 실린 고개를 갸웃하기만 할 뿐이었다.

"안 무섭니?"

"

"이 얘기 들은 이들이 어떻게 하는 지 아니? 허풍이라고 웃거나 도망가거난데 너는..뭐니?"

"..진짜냐?"

무명이 목소리를 냈다. 어딘가 모르게 흥분이 잔뜩 서린 목소리에 입에 포물선을 그린 그가 당연하지! 하고 금방 본래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나...나."

"..뭐래니?"

"나랑..나랑 동행할 생각 없나?"

무명이 건넨 말에 그가 아하핫 하고 여태 들은 웃음소리 중 가장 호탕하고 경쾌한 웃음이었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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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 이가 내가 찾는 사람일 수도, 그러니까 유성처럼 등장해주길 바란 그 히어로라 부르는 이가 눈 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없던 자신감이 무명을 감쌌고 저 앞에서 웃는 인간은 너는 다르구나! 하고 어깨를 팡팡 치면서 좋아하고 있었다.

무명은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우선.. 우선 해야할 것은.

"너, 잘 싸우나?"

"응? 음..사람 한 둘 죽이는 건 일도 아니지?"

"그럼.. 성인 남성 하나 죽일 수 있냐?"

뭐? 사내가 반문했다. 진지한 일이다. 무명이 단호하게 말하자 침음하더니 몇 살? 하고 묻기에 서른 일곱. 하고 대답한 무명에 가능하단다! 하고 말한 그가 웃으며 무명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일단 배고프니까..뭐라도 먹을까?

무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늦장을 부리는 건 예정에 없었지만 천군만마를 얻은 듯 어깨가 솟아올랐다. 그나저나.. 돈은 있겠지? 넌지시 물은 말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우뚝.

어? 설마. 무명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렇게 보니 본인보다 10센티는 커보였다. 흐흥,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린 그에 무명이 한숨을 쉬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꾸깃하게 접힌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꾸역꾸역 숨어가면서 모은 전재산이었다. 앞날이 깜깜했지만 믿어야지 뭐 어쩌겠어, 하는 심보였다. 내가 선택한 이다.

사내의 눈이 반짝였다. 무명은 한숨을 쉬면서도 이걸로라도 배는 얼추 채울 수 있을 거라며 인근 떡볶이 가게를 찾았다. 가격대가 낮아 광휘가 아주 가끔씩 들러 전체에게 돌리며 비싼 거라고 생색을 내곤 했던 집이었다. 무명이 그를 잡아 끌고는 바로 앞에 앉혔다. 그리고 떡볶이 2인 분에 순대 1인분, 어묵까지 시키니 딱 만원이었다. 무명이 거침없이 계산을 하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너는 이름이 뭐니?"

"없다. 무명이라 불러라."

"음.. 그래. 무명아, 그럼 그거 하나 알려줄까?"

"무엇."

"주머니에 있던 만원, 알고 있었단다. 대충 꼴을 어제 털린 것도 같았고 또 얼핏 보니 전재산인 것도 알았지."

그 얘기에 아무 미동도 표정 변화도 없는 무명을 바라본 그가 대답을 기다렸다.

"..어쩌라는 거냐. 나는 네가 만족할 수 있을 만한 환경을 주지 못 한다. 이렇게라도 해야할 것 아니냐."

"보통 이러면 배신감 들어서 뛰쳐 나가는 게 먼저 아니니?"

정말 궁금했다. 일단 저한테 전재산을 쏟는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 한 들 전혀 예상하지 못 한 반응이 나왔으니까.

"상관 없다."

너는 사람이니까.

내 사람도 아니고, 내가 선택한 사람도 아니고 사람이니까. 무명이 그리 대답하며 주인장이 건네주는 떡볶이를 받아들었다. 이쑤시개로 떡을 하나 콕 찍은 무명이 그에게 건넸다. 먹어라. 배고플 거다. 

하하! 경쾌하게 또 한 번 웃은 그가 받아들고는 입에 넣었다. 므음에 들었따. 특블히 내 브하로 삼아즈지. 다 씹고 말해라. 체한다. 실 없는 소리가 오가면서 밤은 무르익었고 십대 후반의 남자는 혈기왕성했다. 엄청나게 먹었다. 앞의 남자가 한 그릇을 다 비워갈 때 쯤 문득 잘 먹는다, 더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든 그가 본인의 몫의 반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웅? 진시미니? 무명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네 놈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른 듯 하니 순대도 먹고 다 먹어라. 

그렇다면야, 그가 실실 웃으며 음식을 받아들었다. 문득 무명은 이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오늘 하루종일 무명이 보이지 않아 어슬렁 대던 흑귀단이 무명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으며 건들건들 걸어왔다. 요 주변이 워낙 작은 탓도 있어 금방 찾은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 수가 제법 많았다. 무명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음? 하고 무명을 바라본 그의 표정에 미소가 띄워졌다. 그러는 동안 금세 훅 다가온 단원들이 비아냥 대기 시작했다.

"요즘 두목이 널 너무 많이 봐줘서 눈을 어따 둬야 되는 지도 잊어먹어삤나, 이 씨."

주먹을 들며 위협하는 모양새에 무명이 그를 밀어 뒤로 보냈다. 순순히 밀리는 그에 얼마나 안심했는지. 내가 시선을 끌 테니 너는 도망가라. 그 말에 더럽게도 웃어대는 단원들에 뒤로 한 발짝 물러나려 했을 때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는 누군데 우리 가명이를 건드니?"

"가명? 가아명? 하하, 가명이란다 얘들아! 이름도 지어주고 짝짝쿵 잘 놀아쪄요? 그럼 너는 뭐냐. 네가 무명이 할래?"

"너무 못 됐다 너희들. 왜 사람을 괴롭혀?"

혀를 쯧 찬 그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건들건들 발을 슥슥 휘젓더니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이고 무명을 바라보았다. 

"가명아, 서른일곱 얘 맞니?"

"어이, 말 안 들려? 어디서 왔냐고."

"대답 얼른 해주겠니? 네 그 맞다는 말 한 마디면 된단다. 너는 이 내가 선택한 사람이잖니!"

그를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단원들에 기가 죽은 것도 잠시, 그의 말 한 마디에 문득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겨났다. 단원 하나가 주먹을 날리자 그 주먹을 턱 움켜쥔 그가 말했다. 얼른! 더이상 망설일 것도 없었다. 그가 아니긴 해도 2인자. 무명은, 가명은 힘차게 대답했다.

"맞다!"

그 사내가 씨익 웃더니 네 말대로 죽여주마! 하고 주먹을 날려 반격했다. 속속히 하나둘 쓰러져가는 틈 사이, 가명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이래봬도 쌈박질 하나는 야무지게 했던 이다.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있다.  가명은 그 사실 하나만을 바라보고 권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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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가명은 도대체 무슨 뜻이냐."

"가. 허락할 가 자 모르니?"

"알아. 단지 가 자 한자가 한 둘이 아니라 햇갈린 것 뿐이다."

가명이 올라오려는 입꼬리를 미묘하게 틀어올렸다. 그 모습을 본 그가 한 손으로는 본인의 입을 가로막고, 또 한 손으로는 가명을 가리키며 감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너..너..! 이름이 마음에 들구나!"

"닥쳐라! 그런 게 아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날아온 대답에 더욱 확신했다. 흐흐, 흐하, 하하! 아하하! 세상이 떠나가랴 웃는 그에 가명이 붉은 얼굴을 하고는 본거지로 뛰어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본거지라 불리는 곳은 제법 괜찮은 집의 형태였다. 침대도 있고 의자도 있고 쇼파도 작은 테레비도 있는. 단주는 여행을 간다며 사라진 지 이틀째였고 부단주와 따까리들도 처리를 해 두었으니 문제 없다. 가명이 지폐들을 확인했다. 단주란 놈이 그래도 좀 꽁쳐둔 돈은 있었나보지. 그래도 큰 파벌은 아니었기에 상상외로 적은 편이긴 했다. 그래도.

수가 많았다. 여기저기 터져보이는 그에 가명이 침대에 눕힌 뒤에 대강 옆에 있던 천쪼가리를 상처 부위에 감았다. 터진 입술 하고는. 누가봐도 다친 모양새였지만 가명은 그게 또 그리 나쁜 것 같지만은 않았다.

치료가 끝나고 저기 누워서 자고 있는 이에게 충분히 원하는 만큼 해줄 수 있는 돈이다. 물론 금방 떨어질테지만.

그동안 가명은 계획을 짜야한다. 어떻게 어떻게 하고, 이렇다할 계획을. 사실 아직은 저 이가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떡볶이를 마음껏 먹고 싶은 건지, 아니면 온 세상의, 지구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는 건지. 아, 예산도 정리를 해야겠군. 가명이 굴러다니는 볼펜을 집었다.

"..가명아. 안 자니?"

"자라. 피곤했을 건데."

내일은 머리를 어떻게 해줘야겠다. 머리가 제법 긴 걸 보면 기르고 싶어하는 건가. 역시나 트리트먼트 같은 게 가장 낫겠지. 그래도 자주 빗어주는지 제법 찰랑찰랑거리는 것이 꼭 계집애 같긴 해도 가명은 마음에 들었다.

"..떡볶이가 먹고싶은 걸."

"몇 시간 전에 먹었다. 먹고싶으면 내일 또 먹지."

"너는 배가 안 고프니?"

"괜찮다. 익숙해서. 그런데 너.. 최종적인 목표가 뭐냐? 그걸 알아야 어떻게든 머리를 굴릴 수 있어서 말이다."

음..방금 잠에서 깨서 그런지 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 음을 냈다. 나는.. 아, 방금 정했다! 애처럼 꺄르르 웃어대며 들어보렴, 하고 입을 떼는 그를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싶다!"

"음?"

"정확히는 입고 싶었다, 란다. 지금의 목표는.. 너랑 같이 누워서 자고 싶다."

가명이 한숨을 쉬었다. 항상 그와 있을때면 튀어나오는 어떻게던 되겠지 마인드. 머리를 헝크러뜨리며 그가 누워있는 침대에 본인의 몸을 뉘였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감각인고. 문득 서러워져 눈물이 나려고 한다.

그가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명을 향해 돌아누웠다. 가명아. 목소리도 좋아서 빨려들어가는 것 같다. 그가 이불을 끌어당겨 가명에 위에 걸쳐주었다. 왜 그러냐. 하고 물으면 잠시 아무말이 없더니 가명을 꼭 끌어안는다.

"잘 자렴."

"...외롭나?"

"아니. 온기가 처음이라서 서툰 것 뿐이란다."

청춘의 끝자락 겨울이었다.

"그리고 내 이름은,"

─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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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상황 종료됐습니다. 복귀합니다.

가명이 무전기에 대고 낮게 말했다. 유혈이 낭자한 그곳에서 오른손엔 권총을 들고는 홀로 서있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다음 날 그 많던 돈을 들고는 힘을 키웠다. 둘로는 무리니 사람이 많고 힘은 약한 조직을 하나 골라 대가리를 쏴 죽인 후 그 대장 자리를 자연스럽게 꿰찼다. 반항하는 조직원들의 목숨을 친히 하나하나 끊을 때는 차갑기만 했던 얼굴이 가명과 둘만 있을 때는 다시금 개구진 표정을 짓더니 깔깔 웃었다.

"우리가 해냈단다!"

게다가 그 조직은 사업도 하고 있었기에 회장 자리도 얻어낸 후 그 대가리의 족보에 본인의 이름 석자를 크게 박아넣었다. 사유는 의문의 조직원에게 사살. 본인은 죽기 전 양자로 끼워넣은 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경찰 조사를 받았음에도 시신은 난도질이 되어있었고 평소에도 그분은 많이 불안해하셨다, 그나마 잘 아는 나를 양자로 세워 방패막이로 쓰려는 것 같으셨다, 같은 눈물 겨운 사연을 주변 조직원들을 증인으로 세워 읊으며 조사한 정보로 그놈의 기밀 사항까지 읊어대니 경찰은 미안하다며 순순히 물러났다. 물러터진 사회. 가명과 그는 둘이 서로 쉴 새 없이 봐온 상황이었고 밑바닥까지 찍고 왔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반응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순탄했던 것도 아니다. 둘은 무기를 구할 돈을 찾다 납치되기도 했고 정보를 빼내기 위해 다른 조직에 들어가 구두를 핥는, 어떻게 보면 더 없이 치욕적인 짓거리까지 했다. 그곳은 워낙에 지랄같아서 키가 본인보다 크다는 이유로 심기가 뒤틀려 그를 밥도 주지 않고 어두운 창고에 가둔 적도 있었다. 독방이라 그런지 빛도 들지 않았고 삼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걱정이된 가명이 같이 창고에 갇힐 각오를 하고 먹을 만한 과자와 주먹밥을 들고가 건네주려던 찰나 들켜서 같이 꼬박 3일을 더 갇힌 적이 있었다.

"가명아,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너도 꼴이 이게 뭐니."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가명아. 여기 들어오는 작전은 네 머리에서 나왔단다."

"모른다. 네 안위가 우선이다."

그리고 이 상황을 대비해서..가명이 안 주머니를 뒤척거렸다. 거기서 나오는 부피가 작은 주먹밥 하나와 초코파이 두 개. 그가 그것을 보고 씨익 웃었다. 역시 너는 이 상황마저 예측하고 있었구나!

솔직히 따져보자면 '그'가 더 똑똑하다. 가명은 거들어주는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동행자에 불과했고 증인 위조부터 어떻게 상황이 돌아갈 지 몇 십 수 위를 내다보아 미리 준비하고 있는 건 항상 그였다. 그래도 가명의 무지함이 썩 나쁘지 않고, 가끔은 그가 생각한 일이 맞아떨어진 일이 있으면 그 떡볶이 집에서 성이 찰 때 까지 떡볶이를 먹곤 했다. 그리고 둘의 목숨을 살린 일까지 겹치니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여러방면에서 머리가 뛰어났고 한 번 익힌 일은 기가막히게 기억해서 속이거나 머리 회전은 훨씬 더 빨랐지만 본인을 던져가면서까지 승부를 거는 성격 때문에 가명이 그 옆을 지켜가면서 안전을 최우선시로 길을 만들어내니 참으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결국은 성장하고 또 성장하고 성장하여 지금까지 올라왔다. 그동안 많은 수를 둔 그와 그 모든 것들의 극적인 성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가명은 가끔은 그가 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든 걸 다 알고 예측하는 사람. 그럴 때면 눈치채기라도 한 듯 찡긋하고 윙크를 날리긴 했다. 그러면 순식간에 그 감상이 깨지고 잔소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회사를 키우기 위해서도 얼마나 노력했던지. 여기저기 주식을 꽂고 매도하고 팔고 괜찮은 상품을 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지. 그래도 뉴스에 나온 전 CEO암살 사건 때문에 입방아에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고 가끔 하는 인터뷰에서는 눈물을 보이니 연민 때문인 지 회사와 그에 대한 인기가 절정에 올랐다. 그 사이에 만족스럽게 개발된 화장품을 내놓으니 웬 걸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고 이제 시작이라며 니즈를 제대로 저격한 걸 이리저리 지시해 금방 만들어 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품 하면 그의 회사의 이름이 나왔다. 그때마다 가명은 그의 곁에 있었고 신적인 승리, 가망이 없을 것 같았던 회사의 승리를 목격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한 세월 중 여러번, 십 수번의 승리를 맛 봐왔기 때문에 다른 이들처럼 놀라진 않았다. 다만 경이로운 건 사실이었다.

다른 이들이 가망이 없다고, 회사는 포기하는 게 낫다고 했을 때 가명은 뭐라 했던가. 쓸 데 없는 돈낭비라며 힐난할 때 가명은 무얼 했던가. 딱히 아무 말은 없었다. 그저 주변에 맴돌며 묵묵히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믿고 있다는 게 느껴져 그는 피식 웃었다.

아. 옛생각이 났다. 가야되는데. 

"가명아. 여기서 뭐하니?"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울리더니 귀 근처에 또 한 번 목소리가 들려온다. 눈에 색채가 인다. 피가 묻었잖니. 하고 닦아주는 손길은 애나 달래는 듯 부드럽고 섬세하여 몽글몽글해진 기분이 괜히 가명이 괜찮습니다 하고 단문으로 답하고는 몸을 돌렸다. 목소리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긴 하지만 그는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인데. 분명 본인의 집에서 기다린다 했던 것 같은데.

"아."

가명은 저런 멍청한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다만 몸을 돌렸을 적에 예상치 못 한 복부의 고통이 아릿하게 느껴진 게 그 원인이다. 그가 눈을 찡그렸다. 순간적으로 힘이 풀려 쓰러져가는 가명을 지탱했다. 아까만 해도 여유롭기 그지 없던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이내 아무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죽진 않는다. 많이 맞아와서 그런가, 다만 조금 놀랐을 뿐이다. 이런 꼴을 가장 보여주기 싫었던 이에게 보여줘서 그런 것인지.

"떡볶이는 혼자 드셔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그게 넘어갈 것 같니?"

오늘 일만 끝이나면 같이 떡볶이를 해 먹기로 했었다. 해 먹는 건 처음이기도 하고 오랜만에 가명이의 요리를 먹는다며 이 날을 그가 얼마나 기대했던지! 직접 장을 보고 재료까지 사가며 흐흥, 콧노래까지 불렀었다. 그런 그의 노기가 슬쩍 어린 말에 피식하고 웃은 가명이 그의 어깨에 올려지는 팔을 마다하지 않았다.

부축 당하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웃어대는 턱에 기분이 나빠진 그가 낫자마자 떡볶이를 만들거라며 으름장을 내놓았다. 역시 웃음이 들릴 뿐이다.

수술을 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을 잃어 실려가듯 한 수술에 딱히 기억도 없었다. 수술은 서너번 해 봐서 그런가, 더이상 무섭지도 위협이 되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다. 수술의 결과로는 긴 자상이 하나 생겼다. 봉합해서 꿰매긴 했다만 10센티 가량의 큰 상처가 복부에 고스란히 잔해물처럼 남았다. 아침에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떠 보면 침대 위로 상반신만 엎어져 자고있는 그가 보여 굳어진 표정에 미소가 잠시 드리워졌다. 이렇게 자는 걸 보는 것도 얼마만인가. 체면이고 뭐고 다 잊고 본인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그는 저에게 신과 다름없었다. 그저 신이었다. 평소에는 잔인한 손속은 물론이고 이성적이고 명철한 판단을 내리는 그가 항상 자신을 마주할 때는 나신인 채였다. 가릴 생각은 없이 항상 온몸으로 저를 마주하는 그를 볼 때면 알 수 없는 감정이 샘솟았다. 사랑? 사랑은 아니었다. 아닌가, 사랑인가? 차마 그런 순간에는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고, 대우받는 것 같고, 또 그에게 아직은 쓸모있다는 사람임을 확신받는 것 같아서 단지 그런 이유들로 좋아하는 건가? 그의 곁에 있으면 저가 차갑다는 이유로 손가락질 해대는 손길들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단지 그와 함께한 세월 때문인가? 아니면 끝이 없고 그치지 않는 충심 때문인가. 

그 바닥을 함께 기면서 가명에겐 도망갈 기회가 여럿 있었다. 진심으로 달아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 어쩌면 많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자신은, 본인은,

그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내색도 않고 묵묵하게 그의 손을 붙들고 옆을 지켰다. 

그리고 그 지금 결과가 이것이다. 

가명이 누워 자고있는 그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김과 동시에 만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금방이라도 너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다! 하는 명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다. 내가 이 자는 얼굴 때문에 떠나지 못 하는 거다. 그때도 그랬다.

왼팔에 칼을 세게 맞아서 의사에게 왼손을 못 쓸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지금이야 재활도 완벽하게 해서 움직임에는 문제가 없다만 그는 아직도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가끔 그곳을 서너번 씩 어루만진다. 개 박살이 났다는 소리를 들은 그의 얼굴에서 처음 절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이후로는 본 적도 없지만, 수술비용을 대야하는 가명을 위해 닥치는 대로 더러운 일이고 뭐고  처리했던 날들. 그때도 지금과 꽤나 비슷했다. 지금과 똑같은 자세로 자고 있다 깬 저를 보고 오른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네가 뭐라고 했더라.

"가명아."

이름부터 가볍게 부르고 시작했었다. 

"..떠날 기회를 주는 거란다.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더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으면 낫는 대로 내가 안 보이는 곳으로 도망가렴."

"..새삼스럽군."

"...장난이 아니란다. 정말 이번에 떠나지 않으면 내가 죽을 때 까지 놓지를 못 놓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명은 그런 그를 보고 어떤 말을 했더라. 너는, 나는 너에게 어떤 말을 건넸던가. 그 말을 듣고 네가 내게 어떻게 했던가. 나를 어떻게 처절하게 무너뜨렸던가, 너는 무슨 말을 내게 했니, 가명아.

"전에 한 대답으로 충분히 답이 될 텐데."

"

"나는 너를... 너는,"

너도 내가 선택한 사람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저 안았다. 그게 중요한 거다. 햇빛에 비쳐진 네가 정말 예뻤단 것도, 안기면서 엉엉 우는 것도 지나치게 인간다워 더 세게 끌어안았단 것도. 가끔은 그 순간이 그립다는 것도 다 필요없이 안고는 눈물을 보였다는 것만 알아도 된다.

"가명아. 깼니?"

부스스한 모습마저 아름다운 당신이 눈에 보인다. 흥. 이렇게 오래 걸려서야 내 옆에 있겠니? 말은 이렇게 해도 악의는 전혀 없다는 걸 안다. 허리는 괜찮습니까? 엎드려 자서 아플텐데 집으로 가시지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때 처럼 그의 머리칼을 넘기고 있다. 달라진 것은 병실이 VIP인 것, 조금 장성한 것. 그것 두 개다.

"이제 알았다."

"뭐, 떡볶이 만드는 거? 그나저나 웬일로 반말이니. 사정할 땐 해주지도 않더니."

"─야."

그저 하고 싶을 뿐이었다.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그래서 이름을 불렀다. 감히, 내가, 너의, 당신의.

"뭘 그리 부르니."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냥 단지 너를 사랑한다. 모르겠다, 이 벅차오르는 마음을 전할 길이 더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성애적인 형태가 아닌 그저 무궁한 형태로 존재한다. 내 사랑의 형태는. 그것은. 에로스도 필리아도 아닌 내 사랑의 형태는 아가페였다. 언제나 당신이 예쁜 옷을 입고 먹고 싶은 건 다 먹었으면 좋겠다. 나의 신은, 알라는, 예수는 당신이었고 당신을 위해 내 거룩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치리다. 

나는 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나는 너여야만 한다. 쉼없이 토해내는 말은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했던 그 말은 그의 만개한 미소를 불러왔다.

드디어 깨달은 거니. 가명아. 너는 너무 눈치가 없어서 문제란다. 

"나도 사랑한단다. 그럼 네 사랑의 형태를 맞춰볼까."

씨익 웃은 그가 말문을 뗐다.

"아가페라고 부르지 않니, 보통? 사실 네 대답은 필요 없단다. 그럼 내 사랑의 형태는 무엇일 것 같니?"

가명이 눈을 감았다. 필리아? 그것 말고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연달아지는 말에 가명은 벅차오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 또한 아가페란다."

가명이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