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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함께 만들어 갈 길은_
글 : 레모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와 공작은 아주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다만, 마음만은 아주 무거운 상태로 궁을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그새 저물어 가는 해는 왕실의 화려한 커튼 사이사이를 삐집고 나와 내리쬐어 베르리시의 마음을 한 층 나른하게 되도록 도와주었다.
"공작님, 지금 어디 가는 길인지 아세요?"
"음... 글쎄요"
"...제 아버지를 만나뵈러 가는 길이에요"
"아... 그러고보니 제가 아직 폐하께 귀환을
아뢰옵지 못했네요..."
"...아마 아뢰옵는다 해도 듣지 못하실 거에요..."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될까요, 벨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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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폐하께서 눈을 뜨시지 못하고
계시온 게 열흘 째에요..."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사색이 된 공작의 표정에 그녀의 마음이 철렁한 건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를 꾹 참고 공작에게 사실을 제대로 고하기까지가 무지 힘이 들어보였다.
"요새 간새가 온전치는 못하였으나 열흘 전, 급격하게
앓아누우셔서 저도 꽤나 수고를 했습니다..."
"...폐하께서... 어쩌다가 그런..."
"의원은 마음을 비우는 게 좋을 거라 말했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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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습니다. 벨리 마음 고생하는 거,
깊게 듣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눈시울이 더욱 더 붉어지고,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이 잔뜩 차오른 눈물에 공작은 다급히 그만 말해주어도 괜찮다는 말을 꺼내었다. 그에 깊이 숨을 고르는 그녀의 행동은 그 눈물을 삼키기 위함이었겠지.
그들은 더 무거워진 발걸음을 억지로 이끌어 황제의 처소 앞에 도착하였고, 그들은 앞에 서있는 한껏 지쳐보이는 대신에게 아뢰오는 건 생략하겠다고 전달했다. 그리고 문을 조금 열고 들어간 그곳.

황금으로 뒤덮인 그 휘황찬란한 자태는 어느 누가 보더라도 감탄만을 연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얕은 숨을 겨우 내쉬고 들이쉬는 황제는 금으로 덮여있는 커다란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었다.
그들은 화려한 금장식과 금붙이들 보단 당연히 그런 황제가 먼저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폐하께... 킬로베로스 제국의 공작 김태형의 귀환을
아뢰오는 바. 폐하를 만나뵈어 영광을 표합니다..."
예의를 차례로 모두 갖춘 공작은 황제의 안색이 거의 죽은 사람과 다름이 없어보였기에 마음이 아파왔다. 5년간 자신의 빈자리에 기회를 노려 꿰뚫고 올라오는 백작들을 막으시느라 힘드셨을 것을 잘 알기에 공작은 더욱 여러 감정들이 교차했겠지.
"...폐하께서 몸이 성하셨을 때도 힘없이 그들에게 쫒기며 정치를 하신 건 맞지만,
그들이 이런 폐하가 쓸모없어지니 이리도 폐하를
비참하게 버렸습니다..."
"......"
"정녕 이게 참된 제국의 모습일런지..."
그녀의 말에 공작이 한숨을 푹 내쉬자 잠시 찾아오는 정적. 감동적인 노랫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슬픈 초상이 치루어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그들의 눈에선 무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창 밖의 새들도 그들의 슬픔을 동감하는걸까 높은 소리로 지저귀는 것을 잠시 멈추어 살랑이는 나무에 앉았다. 해는 다 져가고, 뉘였뉘였 노을이 붉게 타오르는 시간이었다.
공작은 슬피 눈물을 떨어뜨리다가도 숨을 고른 후 잠시 눈길을 돌려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고는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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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 송구스럽습니다만... 황녀님께서
이제는 진짜 자리를 찾으셔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
"네, 폐하께서 이리 돌아가신다면 황녀님이 저 자리를 매꾸어 주시는 바를 간곡히 요청합니다.."
그녀는 공작의 말을 듣고도 그리 놀라는 반응도, 기뻐하는 반응도, 슬퍼하는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말을 꺼낸 공작을 천천히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마치 모든 걸 다 놓아버린 어떤 사람처럼 말했다.
"공작님은... 절 믿으십니까...?
공작님께서 제가 얼마나 약한 성격인지 모르셔서
그럽니다..."
"제가 곁에 있을때는 그러지 않았지요"
"......"
그녀는 수긍을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아마 자신이 그런 황제의 자리에 앉아 과연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깊이 잠긴 것이 아닐까.
"벨리, 황제의 자리를 두려워 마세요"
"그치만 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로써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황후께서 일찍이 돌아가시옵고, 태후께선 폐위가
되셨으니 홀로였던 폐하는 어쩔 수없이 그리 정치를
하실 수밖에 없었어요.
벨리도 잘 알잖아요."
"...네"
"...벨리는 나만 믿어요"
그 한마디에서 그녀는 진작에 바닥으로 떨구어졌던 그 흔들리는 눈동자를 천천히 들어 다시 공작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믿음이라는 무언가가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건 그런 그녀의 용기를 북돋아주기에 아주 적합했다.
여전히 나무에 붙은 나뭇잎들은 흔들리고 있었고, 지저귀던 새들은 멈춰있다. 조금 후면 다 질 것만 같은 해도 조금 더 빠르게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가 떨어지고 떨어져 어떠한 빛도 제국을 빛추지 못하게 된 그 순간,
제국의 황제는 숨을 멈추었다.
"...!!!"
숨을 얕게 쉬면 바람이 새는 소리 마냥 숨을 쉬는 게 모두 들려오게 된다. 그 소리가 완전히 멈추었을 때, 정말 완벽한 적막이 흘러버렸을 때 말을 하던 공작과 그녀는 더이상 그 어떤 말도 입에서 이어 나올 수가 없었다.
"아버지..."
그녀는 작게 아버지를 부르고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듯이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공작은 그에 놀라며 함께 자리에 잊아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는 초점없는 눈으로 미친듯이 울었다. 처소가 다 울릴 정도로 목을 놓아서 말이다.

"......"
공작은 그리 슬피 우는 그녀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 말을 건다면 그녀가 맘놓고 황제를 보내줄 순간을 빼앗아버리는 것과 같아서, 그녀가 추억하는 황제를 오래 간직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과 같아서.
그래서 공작은 한참을 말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2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황제의 창백한 그 육신이 옮겨지게 되었고 한참을 울어 진이 다빠진 그녀는 공작에게 힘없이 기대어 남은 눈물을 마저 흘리고 있었다.
"...숨을 조금만 천천히 쉬어요, 벨리.
그러다가 쓰러집니..."
공작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툭 떨어지는 그녀의 고개. 어깨에 기댄 그 작은 머리가 앞으로 약간 쏠리게 되자 공작은 서둘러 그녀를 받쳐주었다.
2시간이 넘도록 울어대면 약하기도 했던 그녀의 몸이 쓰러지지 않고 베기는 게 신기한 것이었다. 공작은 그런 그녀를 말없이 업고 황제의 처소를 나가 그녀의 처소로 발걸을 옮겼다.
공작이 밖으로 나가자 처소 앞에는 서성이는 백작들과 수군대는 여러 대신, 하신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연히 다음 황제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건 공작은 인상을 찌푸렸고 그에 아주 조금 조용해지는 주변이었지만 이내 돌아오는 소음. 그는 화가 난 목소리로 그들 하나하나를 노려보며 당당히 말하였다.

"프레야드 베르리시 황녀만이 황궁법 절차에 따라 다음 황제의 자리에 오를 분이시라는 거, 부디 잊지마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