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빌런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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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묘한 악당들

W. 그쁨




경고! 작가는 주인공을 상당히 비도덕적인 인물로 생각·표현하고 있습니다.









5년, 긴 시간이라고는 하나 정국에게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열다섯이던 소년이 어느덧 스무 살이 되게 한 그 긴 시간 동안 정국은 저가 알지 못했던 온갖 가지 더러운 진실들과 마주했다. 원래의 그였다면, 그가 소녀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결코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법한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 더럽고 추잡스러운 이면을 마주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소년의 뇌리에 깊게 박힌 한 소녀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도련님을 탈출시킨 직후 연구소에 불을 지르고 도주…."

"……."

"그 뒤에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십니까?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기억나는 건 뭐든 말씀해 주세요."

"…없어요. 그냥 그 애는…,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그렇습니까. 그럼 혹시 그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나요?"

"김지원이요."

"음, 그건 아마 가짜 이름일 확률이 높아요. 혹시 진짜 이름을 따로 가르쳐준다거나 한 적은 없었습니까?"

"…아니요, 그런 적 없어요."




몰라요, 정국은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었다. 어쩌면 이 거짓말도 소녀 때문에 튀어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정국은 생각했다. 정국은 소녀가, 김지원이, 한여주가, 이곳에 붙잡혀 오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왜일까? 소녀는 연구소를 불태우고, 저가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소년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기까지 했는데. 당장에라도 소녀의 진짜 이름은 한여주이고, 연구소장으로 변장한 남자와 한패였으며, 둘이 짜고 쳐서 연구소에 불을 지르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말을 내뱉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정국은 그러지 않았다. 어쩐지 그래선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국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가만히 방 한구석에 박혀 소녀에 대해 곱씹기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른들에게만큼은 열일곱의 순수한 소녀이던 여주가 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정국도 여주가 생각하는 것만큼 마냥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인 것은 아니었다. 열다섯의 나이라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도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나이였다. 나아가 앞으로 저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신발 밑창에 숨겨둔 소녀가 던진 종이를 펼친 정국은 'SECRET',이라 선명히 찍힌 붉은 도장들을 쳐다보았다. 정말 진실을 감당할 수 있겠냐 묻는듯한 붉은 자국에 정국은 망설이지 않고 종이를 넘겼다. 속이 메슥거렸다. 메스꺼움을 꾹 참은 정국은 글자를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거래내역 : 10세 미만 아동 30명 / 희망 보육원 외 3곳 / 특이사항 : 에스퍼 개화 증상…,'
'이능 적출 실험 : 사망한 에스퍼 12인의 이능을 추출하는데 성공, 보관방법 개발 후 이식…,'
'이능 개발 연구 담당자 : 성현지 / 28세 / 한국대학교 생명공학…,'

'에스퍼 이능 개발 연구소 이사 : 전지환'


정국이 입을 틀어막았다.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이능, 그리고 이능의 이식. 그리고 그 실험에 사용된 수많은 실험체들, 그리고 저를 아끼던 박사의 이름, 그리고… 자신의 이능. 정국이 이능을 꺼내들었다. 시퍼렇게 날선 검들이 허공에 생겨났다. 검성의 이능. 평범한 사람이던 제게 이식된 이능. …이 이능이, 내 것이라 할 수 있나?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 이능이 남의 것을 훔쳐다 심은 것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고 나니 자랑스럽기 그지없던 이능이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역겨웠다. 헛구역질을 하며 정국은 내내 울었다. 한참 동안이나.

그날 이후로 정국이 상당 부분 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령, 에스퍼들의 이능에만 관심을 보이던 그가 에스퍼의 복지라던가 센터의 상황에까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그랬다. 정국은 늘 밝은 빛이 비치던 에스퍼 관리국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빛이 들지 않는 곳으로. 이미 잔뜩 썩어 진물을 흘리는 센터의 그림자에게로. 정국은 조금씩, 에스퍼 관리국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관리국의 국장인 제 아버지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가령, 청렴결백한 줄로만 알았던 제 아버지가 물밑에서 얼마나 더러운 짓들을 일삼았는지에 대한 것들. 제가 알던 세상이 산산이 부서져내리는 것을 정국은 오롯이 감내했다. 언젠가 마주해야 할 것들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마주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국장의 아들이라는 정국의 위치는 손만 뻗으면 모든 것을 쥘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설령 그것이 센터의 정보를 캐내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랬다. 이따금 수상쩍다는 듯 이 자료가 대체 왜 필요하냐 따져 묻는 이들 또한 존재하긴 했다. 그럴 때면 정국은 소녀와 닮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곱게 접히는 눈, 예쁘게 끌어올려지는 입꼬리,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어 보이는, 순수한 아이의 웃음을 흉내 내며 말했다.




"아버지처럼 훌륭한 국장님이 되려면 많이 알아야 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 누구보다 많이 알 거예요. 그래서 이 자료가 필요해요!"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특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경계를 푸는 것이었다. 제 손에 들어온 자료를 읽으며 정국은 줄곧 생각했다. 어른들에게 아이들의 순수함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기에, 자그마한 의심을 그렇게 쉽게 거둘 수 있는 것인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센터와 제 아버지의 추잡한 이면을 더욱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정국이 소녀를 떠올리는 일이 잦아졌다. 이 추잡함에 질려 너는 센터를 떠난 걸까. 한여주, 열네 살에 센터에서 도망쳤다는 소녀의 기록을 찾아낸 정국이 생각했다. 정국은 그 기록을 한참 동안이나 읽었더랬다. 고작 열네 살 여자아이의 기록이다. 이능 훈련을 제대로 받기도 전에 센터에서 도망친 이의 기록은 다른 에스퍼들과는 달리 서너 장이 전부였다. 얼마 남지 않은 기록인데도 정국은 읽고 또 읽었다. 그의 마음속에 어떤 소망이 싹텄다. 소녀를 위한 센터를 만들고 싶다. 도망칠 생각 못 하도록. 미친 생각임을 정국은 잘 알고 있었기에 정국은 그 위에 그럴듯한 이유를 덧씌워 포장했다. 더는 소녀와 같은 상황에 처한 에스퍼들을 모른척하고 싶지 않다, 에스퍼들을 위한 센터를 만들고 싶다. 그것이 정국이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목표가 되었다.

그 이후는 쉬웠다. 정국은 소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순진한 면이 있긴 했으나, 머리 하나만은 꽤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지금 제 아버지에게 이를 드러내고 반항해 봤자 내쳐질 뿐임을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정국은 일단 숙였다. 힘을 키우기 전까지는 충실한 아들의 역할에서 벗어나선 안된다. 에스퍼들의 지속적인 도주로 이미 한계선에 다다른 센터가 무너질 날은 머지않았다. 정국은 기다렸다. 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인내를 끌어모아 참았다. 훌륭한 국장으로 기억에 남고 싶을 것이었다, 제 아버지란 사람은. 그러니 무너져가는 센터를 끝까지 손에 쥐고 있을 리가 없었다.


[에스퍼 관리국 국장 전지환, 차기 국장 후보로 전정국 지목]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권력이 어디로 흘러갈지 눈치챈 이들은 자동적으로 정국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국은 그 모든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동시에, 철저하게 내칠 준비를 했다. 힘을 키웠다. 자그마한 것일지라도 권력은 권력이었다. 모든 것이 눈앞에 준비되어 있는 그때, 정국은 생각했다. 소녀를 센터로 데려올 때가 되었노라고.

센터를 바꾸자, 함께.




"싫은데?"




정국의 눈이 깜빡였다. 철창 너머에 갇혀있는 소녀의 눈이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한 초록빛을 띄는 눈동자는 무감했다. 연구소에 있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눈빛이었다. …뭐? 정국이 되물었다. 소녀의 표정이 귀찮은 날파리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싫다니까?"




센터에 들어갈 생각 좆도 없어. 아예 못까지 박아버리는 말에 정국이 입을 다물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에스퍼들만의 특별한 힘, 이능. 신이 주신 선물이라 찬양까지 받는 능력의 소유자인 에스퍼들은, 틀림없이 에스퍼 관리국에서 호화로운 대접을 받고 지낼 거라 흔히들 착각한다. 정말 그랬더라면 한 해에 관리국을 탈출하는 에스퍼의 수가 세 자릿수를 넘어가는 일은 없었겠지. 아무렴, 센터는 그렇게 자비로운 곳이 아니었다. 되려 에스퍼들을 억압하는데 진심인 곳이라면 모를까. 감옥 안에서 이능을 쓰는 것은 가능했지만, 감옥 밖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극대화된 S급 무효화 이능으로 둘러싸인 감옥의 철창만 봐도 센터는 그 어느 곳보다 에스퍼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준비된 곳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게 같이 도망치라니까 괜히 버텨서는,"

"너 혼자 두고 내가 잘도 도망가겠다, 그래."




시퍼렇게 보기 싫은 색이 내려앉은 석진의 이마를 보며 여주가 혀를 끌끌, 찼다. 끝까지 반항하다 머리를 얻어맞고 끙끙거리고 있는 석진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팔자 좋게 감옥 바닥에 누워 잠이 든 남준이나, 가이드라는 사실을 들켜 그들과는 다른 감옥에 갇혀있을 태형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남준의 이능은 공간 그 자체였다. 결계를 강제로 깨트린 탓에 잠깐 실신 직전까지 갔다 온 그였지만, 태형이 남모르게 불어넣어 주던 가이딩만으로도 센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도망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터였다. 정국에게 직접 붙들린 여주를 버린다는 선택을 해야 했겠지만. 그렇기에 남준은 제 이능을 쓰지 않았다. 여주를 버리고 갈 바에야 센터에 다 같이 가는 게 낫다. 짧은 시간 동안 남준이 내린 결정이 그러했고, 여주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 의견에 동의했다. 여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언젠가 여기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내 예상보다 10년은 빠른데…."

"아서라, 탈출은 택도 없으니까."

"바란 적도 없거든?"




바닥에 늘어지며 내뱉는 여주의 말에 석진이 한여주답지않게 약한 소리나 한다며 낄낄거렸다. 여주를 빼내보겠답시고 반항하느라 찢어진 이마에 보기 싫게 피딱지가 굳어있다. 아마도 괴력의 이능을 가진 이에게 얻어맞은 탓에 푸르뎅뎅한 멍 자국도 남아있었다. 여주는 그런 석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하며 석진이 퉁명스레 말했다. 제 얼굴만 빤히 보는 여주가 부담스러웠던 탓이었다.




"이마 치료해 줄까?"

"됐네요, 누구 좋으라고? 치료해 봤자 목줄 스스로 조이는 꼴밖에 더 되겠냐."

"어차피 기록은 다 남아있어서 상관없는데."

"그때랑은 능력치가 다르잖아, 인마. 우리가 여기서 이능 써봤자 좋을게 하나 없어."

"…그건 그렇지."

"됐어, 죽는 것도 아닌데 좀 아프고 말지."




석진의 말에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가 가진 치유의 이능은 센터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이능이었으니, 석진의 이마가 말끔하게 치료된 것을 보면 당장에라도 여주를 데려다 온갖 데다 써먹을 터였다. 그건 나도 싫지. 여주가 생각했다.

이제는 도로롱, 도로롱, 코까지 골아대는 남준을 석진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쟤도 참…, 남달라, 그치? 하는 석진의 말에 여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도 결계가 강제로 깨진 것의 여파겠지만, 그렇다 해도 감옥 바닥에서 저렇게 편안하게 숙면을 취할 수 있는 이는 몇 없을 것이었다. 신기하다는 듯 남준을 관찰하던 석진의 풀어진 얼굴에 예기가 실렸다. 입매를 딱딱하게 굳힌 석진이 저들이 갇힌 감옥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인기척이었다.

전정국, 여주는 그를 '도련님'이라 칭하곤 했다. 내색은 않았으나 석진은 그 단어가 열다섯 풋내기 소년에게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더랬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제 아비 말만 철석같이 믿고 주변을 돌아볼 생각을 않는 모습과 잘 어울렸다. 한데, 5년이란 짧은 시간은 그 도련님을 변화시키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나 보다. 철창 너머에 홀로 우뚝 서있는 정국을 보며 석진이 생각했다.




"한여주,"




정국이 있는 쪽은 쳐다도 보지 않던 여주가 느리게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돌렸다. 어어, 도련님이네-? 하며 입꼬리를 한 쪽만 끌어올리는 꼴이 정국이 보기엔 꽤나 얄미운 모습이겠다 석진은 생각했다. 실로 그랬는지, 정국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러졌다. 이제는 입까지 쩍-, 벌려가며 하품하는 여주의 모습에 더더욱 정국의 표정은 굳어갔다.




"한여주, S급 에스퍼. 0세부터 14세까지 센터 소속, 탈주 이후 행방 묘연. 치유의 이능 소유."

"……."

"5년 전 비밀리에 진행된 실험으로 독의 이능 개화, 비슷하게 진행된 실험으로 인해 가이드로 발현, 연구소 테러 후 자취 묘연."

"……."

"특이사항, S급 에스퍼 한기원과 S급 가이드 김지원의 딸."




정국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제 정보에도 여주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애초에 저 정도의 정보는 정국이 알아보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아주 쉽게 알아낼 수준의 정보이기도 했다. 헤어질 적 궁금하면 저에 대해 찾아보기라도 하라는 친절한 충고까지 남겼는데 이 정도도 못 알아냈더라면 능력 없는 쓰레기네-, 하고 관심을 아주 끊어냈을 터였다. 그래서? 웃음기가 남아있는 눈으로 정국을 빤히 바라보며 여주가 말했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센터로 들어와, 한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