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잔상에게

01. 낯선 이

“…윽….”

치열한 접전이었지만 끝내 마지막으로 남아 싸우던 하민 마저 일격에 내동댕이쳐졌다.

겨우 뜬 눈은 세게 부딪혀 어지러운 시야로 흐릿했다.


어지러운 정신을 잃지 않으려 집중하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적은 그가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 줄 리가 없었다.


다음에 어떻게 해야할 지 떠올려내기도 전에 저쪽에서 들리는 모래와 파편 밟는 소리가 쓰러진 하민에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좀 움직여 제발..!’

힘을 주는 곳마다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마저 쓰러진다면 형들을, 모두를 지킬 수가 없으니까,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해도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쾅!]

그러나 그것이 몇 걸음 딛기도 전, 하늘에서부터 별안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빛기둥이 떨어졌다. 보기 힘들 정도로 밝은 빛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의 인기척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만둬.”

단호하고 절제된 목소리의 경고. 서서히 뿌연 모래와 빛이 잦아들자 낯선 목소리의 주인이 드러났다.

모자가 달린 새까맣고 긴 망토를 두른, 체구가 그리 크지 않은 사람.

‘뭐야…, 누구지?’

하민은 잔뜩 인상을 구긴 채로 둘을 응시하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멍한 머릿속을 억지로 헤집어 봐도 달리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그러나 칼리고는 자신의 진로를 막아선 그 사람이 아군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아차린 듯 했다.


녀석은 경고를 무시하고 곧장 위협적인 전기를 내뿜으며 달려들었다.


그녀는 피하지도, 공격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서서 천천히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는 사이 둘의 간격은 순식간에 한뼘 거리로 좁혀졌다.


그리고 온 감각을 집중하듯 눈이 가늘어지더니,


곧 아무것도 없던 손끝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거친 파동이 일었다.


[징-!]


순간 미세한 진동과 함께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소음에 하민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동시에 그녀를 향해 돌진하던 이들의 움직임이 일시에 멈추며 파동에 닿았던 칼리고들이 데이터 조각으로 부서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

그 사람은 부서지는 이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들어올린 팔을 내리지도 않은 채 칼리고의 대장이 서 있는 쪽을 조용히 응시했다.


숨 막히는 몇 초간의 침묵은 시끄럽고 어설픈 겁박따위보다도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하민은 눈으로 직접 보고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머리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행이라면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라는 거였다.


지휘관은 상황을 파악하듯 잠시 그 자와 하민을 번갈아 살피더니 이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아스테룸을 엉망으로 만들던 그들은 정돈된 움직임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 검은 포탈 너머로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파괴된 거리에 고요가 찾아오고 상황은 모두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으나 그 사람은 팔을 거둘 뿐,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의 파동으로 후드가 벗겨져 드러난 검고 긴 머리칼이 서늘한 바람에 일렁거렸다.


“…당신은….”

겨우 비집고 나온 하민의 갈라진 목소리에 그녀는 마침내 뒤를 돌아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그를 내려다봤다.

이상할만큼 정신이 몽롱해져 흔들리고 있는 것이 저 호박색 눈동자인지 자신의 눈꺼풀인지 알 수 없었다.

“…마......래……을…거야….”

그러나 달싹인 입술 사이로 들릴듯 말듯 들려온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묻지 못한 채 하민의 시야는 아득해져만 갔다.

하민의 감은 눈 너머로 따듯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형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뜨자 익숙한 공간이 보였다.


“야, 하민이 일어났어.”

“괜찮아? 몸은 좀 어때.”


아지트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곳곳에서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하민은 익숙하지만 매번 적응은 안되는 고통을 최대한 참으며 얼굴을 구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괜찮아요. 형들은요?”

“우리도 괜찮아.”


다행이다. 예준이형, 노아형, 밤비형… 은호형은?

주변을 훑는 하민의 눈빛을 읽은 예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은호는 아직 못 깨어났어.”


형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좀 떨어진 곳, 다른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은호가 보였다.

그러나 정작 하민의 신경은 소파 옆에 기대어 서있는 낯선 사람에게로 쏠렸다.

그 사람이었다. 빛 속에서 나타난, 알 수 없는 능력을 사용하던 사람.


고개를 기울이곤 귀 뒤로 넘긴 검은 머리칼 사이로는 안쪽의 은빛 머리카락이 드러나 있었다.

언뜻 무뚝뚝해 보이지만 무심하지는 않게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이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는 은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로지 그것 만으로도 둘 사이에서 어딘가 쉽게 끼어들기 힘든 분위기가 풍겼다.


“은호 얘는 일어날 생각이 없네. 혹시 어디 잘못된 거 아냐?”

“괜찮아, 일어날 거야. 은호 강하잖아.”


예준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모두를 안심시켰다.


예준도 깨어나지 못하는 은호가 걱정됐지만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지트에 도착하고 곧바로 예준이 살펴 깊은 상처는 치료했으나 그럼에도 은호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사실 그는 멤버들이 보지 못한 사이에 칼리고 대장의 공격을 정통으로 두 번이나 맞았다.

강화 인간이 아니었다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은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 지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눈에 띄게 깊은 상처만 봐도 예삿일이 아니었을 거라는 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은호는… 고작 이런 걸로는 안 죽으니까, 절대.”


무거운 공기를 부수고 들어온 낯선 이의 조용하고도 단호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은 한 곳으로 모였다.

그녀는 눈은 여전히 은호를 살피고 있었지만 흐트러짐 없는 표정은 어쩐지 태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칼리고와 같은 날 나타나 무력으로 그들을 물러나게 만든, 누구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아스테룸에 당연하다는 듯 가볍게 들어온 사람.


묻는 말에 대답도 잘 하지 않고 비밀스러울 만치 말수가 적은 사람.


그녀에게서 쉽게 경계를 거두기엔 그러지 못할 이유가 너무나도 많았다.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탓에 멤버들의 신경은 잔뜩 곤두서 있었다.


무거운 공기에 어깨가 짓눌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죠?”


직설적으로 물어오는 예준의 말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듯 차분한 시선이 아지트 거실을 가로질렀다.


하민이 그 시선의 길목에 있었던 건 지극히 우연이었다.


“더한 것도 버텨낸 녀석이니까요.”


그렇기에 눈이 마주쳤다고 착각하기도 힘들 만큼 짧은 찰나의 순간에 고요하던 눈동자가 낙엽처럼 작게 일렁이는 것을 본 것도,


그 시선이 제게서 다급하게 거두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도 그저 우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