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바투 범규] 아리도록

외전 2화. 볕 좋던 날

[과거 이야기 - 범규와 여주의 첫만남]

 

최가 저택 마당에, 아침부터 분주한 손길이 오갔다.

하인들이 대문 앞에 물을 뿌려 먼지를 가라앉히고, 사랑채에는 새 방석이 깔렸다.

여덟 살 범규는 평소 입지 않던 빳빳한 옷을 걸친 채, 마루 끝에 앉아 발끝만 까딱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얌전히 있거라. 김 대감 댁 귀한 손님들이 오시는 날이다."

 

어머니의 당부에 범규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손님이 누군지, 왜 이렇게까지 격식을 차려야 하는지는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였다.

부엌에서는 새벽부터 전 부치는 냄새가 진동했고, 곳간에서 꺼낸 좋은 술병들이 사랑채로 옮겨졌다.

아버지 최시헌은 평소보다 몇 번이나 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마당을 서성였다.

그 모습이 낯설어, 범규는 오늘이 보통 날이 아니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

 

 

 

정오가 되기 전, 대문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김유형이 부인과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최시헌이 버선발로 뛰어나가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시게, 이 사람아.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네."

"고생은 무슨. 좋은 날에 이 정도 걸음이야."

 

두 사람은 오랜 벗답게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부인들도 다정히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나눴다.

 

그 뒤로, 동갑내기 여주가 곱게 땋은 머리를 하고 어머니 치맛자락 뒤에 반쯤 숨어 있었다.

 

"인사 올리거라, 여주야. 여기가 범규다."

 

김유형의 말에 여주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범규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어른스러운 척 허리를 곧게 폈다.

 

"…최범규라 합니다."

"…김여주예요."

 

둘 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했다.

 

 

 

*

 

 

 

사랑채에서는 두 아버지가 오랜만에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이리 사돈을 맺게 되니, 감회가 남다르네."

 

김유형의 말에 최시헌이 크게 웃었다.

 

"조정에서 뜻 맞는 벗을 얻기도 힘든데, 이젠 한 식구까지 되는 셈이지 않나."

 

그때, 밖에서 하인이 다급히 고했다.

 

"대감마님, 우의정 대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급히 전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최시헌이 미간을 좁히며 몸을 일으켰다.

 

"이 시각에? 일단 뫼셔라."

 

곧 조승학이 사랑채로 들어섰다. 그런데 방 안에 낯선 손님이 함께 있는 걸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김 참판 댁이 와 계셨구려. 이거 결례를 범한 건 아닌지."

"아닙니다, 대감. 어인 일로 이 늦은 시각에."

"전하께서 내일 경연에 앞서 미리 여쭐 것이 있다 하시어…… 댁이 지척이라, 소인이 직접 다녀가는 게 나을 듯해 들렀소이다."

 

용건을 짧게 전한 조승학은, 그러고도 자리를 뜨지 않고 슬쩍 물었다.

 

"한데, 오늘이 무슨 좋은 날이신가 봅니다."

 

최시헌이 사람 좋게 웃으며 답했다.

 

"실은 오늘, 우리 범규와 이 사람 여식의 정혼을 맺기로 했다네."

"어서 앉으시지요, 대감. 한잔 받으시고 가시지요."

 

최시헌이 예를 갖춰 자리를 권했다.

조승학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아 술잔을 받으며, 눈으로는 마당에서 뛰노는 두 아이를 오래도록 좇았다.

 

"두 집안이 이리 가까워지니, 조정에도 든든한 일이겠소이다."

 

말은 덕담이었으나, 그 웃음 끝이 어딘가 서늘했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오랜 벗끼리 연을 맺는 것뿐이지요."

 

김유형이 겸손히 답했다.

 

"겸손하시기는. 도총관 대감이야 전하의 신임이 두터우시고, 김 참판 댁도 조정에 신망이 높으니…… 두 집안이 하나가 되면, 그 위세를 누가 당하겠소이까."

 

말투는 여전히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그 말속에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

최시헌은 그저 사람 좋게 웃어넘겼다.

 

"위세랄 게 무어 있겠습니까. 그저 자식들 잘 사는 모습이나 보고 싶은 아비 마음이지요."

 

조승학은 별다른 대꾸 없이 술잔만 비웠다.

그 눈빛에 서린 것이 부러움인지 경계심인지, 그 자리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

 

 

 

한편 마당에서는, 범규가 여주에게 괜히 텃세를 부리고 있었다.

 

"이 마당에서는 제가 제일 잘 뛰는데."

"그래서요? 뛰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해보나 마나죠. 아가씨는 치마 입고 뛰면 넘어질 텐데."

 

여주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했다.

 

"두고 보세요. 제가 이길 테니까."

 

그 길로 둘은 정말 마당을 가로질러 내달렸다.

범규가 반 발짝 차이로 먼저 담장에 손을 짚었다.

그런데도 여주는 순순히 인정하지 않았다.

 

"방금 그거 무효예요! 도련님이 먼저 뛰었잖아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아가씨가 늦게 뛴 거지."

"흥, 그럼 한 번 더요."

 

둘은 그렇게 몇 번이고 다시 내달렸고, 매번 결과를 두고 티격태격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사이, 어색함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뛰어다닌 끝에, 둘은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골랐다.

 

"도련님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아요?"

"…아가씨가 자꾸 말을 시키니까 그렇죠."

"핑계는."

 

여주가 픽 웃자, 범규도 못 이기는 척 따라 웃었다.

낯설던 얼굴이 어느새 조금씩 편해지고 있었다.

 

 

 

*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어른들은 여전히 사랑채에 남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범규와 여주는 하인들 몰래 뒷마당으로 숨어들어, 수풀 사이로 반짝이는 반딧불이를 쫓았다.

 

"저기, 저기 있어요!"

 

여주가 가리키는 쪽으로 정신없이 뛰던 범규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얏……!"

 

무릎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범규는 아픔보다 창피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여주가 놀란 얼굴로 달려와 무릎을 살폈다.

 

"어떡해, 많이 아파요?"

"…안 아파요."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

여주는 잠시 고민하더니, 머리에 묶고 있던 댕기를 풀어 그의 무릎에 야무지게 싸매주었다.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프게 해줄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 한마디에, 범규는 거짓말처럼 울음을 뚝 그쳤다.

 

그때는 세상이 그렇게 다정할 줄로만 알았다.

 

 

 

*

 

 

 

조금 진정된 뒤, 둘은 나란히 툇마루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품속에 넣어두었던 옥패 한 쌍이 옷깃 사이로 삐져나오자, 범규가 그제야 생각난 듯 그것을 꺼내 보였다.

 

"참, 이거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아까 아버지가 주신 거예요. 원래 한 쌍인데, 이제부터 저희 두 집안이 하나씩 나눠 가지는 거래요."

 

손바닥 위에 놓인 두 개의 옥패에는, 낯선 듯 낯익은 문양이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범규는 그중 하나를 집어 여주에게 내밀었다.

 

"이건 아가씨 몫이니까, 아가씨가 가지고 있어요."

 

여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것을 받아 들더니, 범규 손에 있던 하나와 나란히 맞대어 보았다.

두 개의 문양이 나란히 놓이자,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우와, 이거 봐요. 딱 맞아요!"

 

여주가 신기한 듯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 웃음에 범규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여주는 자기 몫의 옥패를 조심스레 품에 넣고는, 범규가 쥐고 있던 나머지 하나 위에 자기 손을 포갰다.

 

"이거, 도련님도 잘 가지고 있어야 해요. 이 담에 크면 정말 낭군 각시 하는 거예요."

 

배시시 웃으며 건네는 그 말에, 범규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저 옥패를 꼭 움켜쥐었다.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약속이 될지, 아무도 몰랐다.

 

그 웃음소리를, 그 손의 온기를, 범규는 훗날 단 하루도 잊지 못하게 된다.

 

 

 

*

 

 

 

밤이 깊어 돌아갈 채비를 할 즈음, 조승학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소이다. 좋은 연을 맺는 자리에 괜히 오래 머문 건 아닌지 모르겠소."

"별말씀을요. 살펴 가시지요, 대감."

 

최시헌의 배웅을 받으며, 조승학이 먼저 대문을 나섰다.

곧이어 최시헌과 김유형도 대문 앞에서 다시 한번 굳게 손을 맞잡았다.

 

"다음엔 우리 쪽에서 찾아뵙겠네."

"언제든 오시게. 사돈 될 사람을 이리 박대할 수야 있나."

 

두 집안의 웃음소리가 대문 밖까지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말에 오르던 조승학이 그 웃음소리에 흘낏 고개를 돌렸다.

웃는 낯은 이미 지워진 뒤였다.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너무 가까워졌구먼, 두 사람이."

 

고삐를 쥔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풀렸다.

그 혼잣말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의 볕 좋던 웃음소리도, 그 아래 조용히 드리운 그림자도, 그때는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채였다.

 

 

 

 


 

 

이 날은 범규와 여주의 첫만남이기도 하지만 모든게 시작된 날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라 따로 사진은 첨부하지 않았습니다 ㅎㅎㅎ

아마 다음편으로 외전도 완결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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