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83화. 고백



훈지 씨가 알려 준 주소를 따라오다 보니,

예전에 그를 몰래 뒤따라왔던 날이 떠올랐다.





문 앞에 선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팔에 깁스를 한 훈지 씨가 서 있었다.




"아니... 이게...

얼굴도 그렇고 몸에도 상처가 왜 이렇게 많아요?

배우는 몸이 생명인데...

이런 상태로 촬영을 어떻게 한 거예요..."





"팔은 스무 바늘 정도 꿰맸어요.

얼굴은 다행히 긁힌 정도라 흉터는 남지 않는대요.

그래도 나 걱정해 주니까 너무 좋다...

빨리 들어와요."





"멍은 또 왜 이렇게 많아요?"





나는 그의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며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곳곳에 남은 상처와 퍼렇게 든 멍을 보는 순간,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면서 촬영을 했는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정작 자신의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갑작스러운 내 방문이 마냥 반가운 눈치였다.




"이 쪽으로 와서 앉아요.

마실 거 뭐 줄까요?

집에 뭐가 있지?

라테 마시고 싶으면 주문해 줄게요.

나에 관한 기사 검색해 본 거예요?

내가 다친 거 어떻게 알았어요?"





"훈지 씨...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라...

몸을 왜 이렇게 다쳐 가면서 촬영을 했어요?

팔 말고 다른 데는 괜찮은 거예요?

검사 제대로 받은 거 맞아요?"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이...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렇게 호들갑이에요.

이제 나도 액션 배우잖아요.

이 정도는 다 영광의 상처죠."




"사고는 한순간이에요.

제발... 몸 조심하면서 촬영해요.

부탁이에요."





"알았어요.
 
명심할게요.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됐죠?

이리 와서 앉아요.

우리 오랜만에 만났잖아요."





그 순간,

태형 씨가 자신은 훈지 씨에게

내 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다고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런데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난 태형 씨가 알려준 줄 알았는데,

물어보니까 아니라던데요?"





"아... 그게...

대표님이 정아 씨랑 통화하는 걸

사무실에 갔다가 우연히 들었어요.

그래서...

기회를 보다가...

대표님 휴대폰에 있는 연락처를 확인했어요."





"태형 씨 휴대폰을 몰래 뒤졌다는 말이에요?

훈지 씨.. 그건 좀..."





"알려 달라고 해도

대표님이 안 알려 주실 게 뻔하니까...

미안해요..."





"파리에서부터 훈지 씨의 새로운 모습을

계속 보게 되네요.

코난도 울고 갈 추리력과 실행력까지...

정말 뭐예요?"





"그럼 어떡해요.

연락처를 알아낼 방법이 없는데...

난 정아 씨가 휴대폰을 갖고 있는 줄도 몰랐어요.

대표님과 통화하는 걸 듣는 순간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라요."





"휴대폰을 만들고 나서

처음으로 김 대표한테 전화한 거였어요.

그 전에는 휴대폰도 없었어요."




"아... 맞다!!!!!! 줄리앙..."




휴대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휴대폰을 만들게 된 이유가 떠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이번 주말 줄리앙과 그의 부모님을

만나기로 했던 약속도 생각났다.





"어떡해... 내가 진짜 미쳤나 봐...

어떡하지..."





"왜요?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내 휴대폰이... 로밍이 안 되어 있잖아.

훈지 씨 휴대폰 좀 빌려줘요.

급하게 전화해야 할 곳이 있어요."





나는 훈지 씨의 휴대폰을 받아서

바로 줄리앙에게 걸었다.





"지금 프랑스가 몇 시지?"




수화음이 울리는 동안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여보세요?"




"줄리... 나예요.

지금 프랑스가 몇 시죠?"
 
아니 무슨 요일이에요?"





"정아 씨? 지금 어디예요?

혹시 한국이에요?"





"맞아요... 급하게 한국에 오게 됐어요."





"왜요? 이번 주말에 파리로 오기로 했잖아요.

갑자기 한국은 왜 간 거예요?

계속 전화했는데 휴대폰도 꺼져 있고...

내가 스페인으로 가봐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어요."






"미안해요.. 줄리..

한국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정신없이 오게 됐어요.

정말 미안해요. 부모님은 무사히 도착하셨어요?

내가 약속을 못 지켜서 많이 실망하셨죠?"





"혹시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나 가족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간 거예요?"





"아... 네..."





"우리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부모님은 한 달 정도 계실 예정이니까

다음에 만나면 되죠.

그나저나 정아 씨 가족은 괜찮은 거예요?

혹시 누가 갑자기 편찮으신 거예요?"





"아... 그건... 만나서 자세히 이야기할게요.

여기 일은 잘 해결됐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약속을 못 지켜서 정말 미안해요."





"갑자기 일이 생긴 거잖아요.

정아 씨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얼마나 급한 일이었으면 연락도 못 했을까...

나는 그게 더 걱정됐어요."




나는 미안한 마음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정아 씨?"




"네..."




"걱정하지 말고,

한국에서 일 잘 마무리하고 돌아와요.

스페인으로 가지 말고
 
바로 파리로 와요. 알았죠?"





"그렇게 할게요.

한국에서 바로 파리로 갈게요.

비행기 예약하는 대로 연락할게요."




"알겠어요.
 
저기... 있잖아요..."




"네?"




"... 사랑해요..."




그가 처음으로 한 고백이었다.





"... 나도요."





나는 순간 훈지 씨의 얼굴을 살폈다.

내 통화를 모두 듣고 있던 그의 표정은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줄리앙과의 통화를 끝내고,

훈지 씨의 휴대폰을 돌려줬다.





"혹시...

내가 당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죠?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통화를 해요?"





"... 나는 그 사람을 선택할 거예요." <84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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