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겐 숨 쉬듯 당연한 일들이 내게는 늘 높은 벽이었다.
좋아한다는 거창한 고백은커녕, 다친 곳에 밴드 하나 건네는 일조차 수천 번을 망설이고 수만 번을 되뇌어야 했다. 들키고 싶지 않으면서도 아주 조금은 알아봐 주길 바라는 비겁한 마음 끝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가 없는 빈 책상 위에 이름 없는 조각 하나를 남겨두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는 것뿐.
그것이 내가 낼 수 있는 용기의 전부였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벽을 너무나 쉽게 넘는다. 망설임의 무게 같은 건 모른다는 듯, 툭 내뱉는 가벼운 말 한마디로 나의 진심을 지워버린다. 공들여 준비한 내 마음이 갈 곳을 잃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내 진심을 가로채 간 그 녀석보다, 내 것이라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나 자신의 무력감이 날 짓이긴다.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네 곁에 머물 자격조차 얻지 못한 채 비겁한 침묵 뒤에 숨어 있는 이방인일 뿐이다.
제4화. 첫사랑
"응. 내가 의외로 좀 섬세해."
수호의 담담한 대답이 교실의 어수선한 소음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주변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떠드느라 이쪽의 기류 따위엔 관심도 없었지만, 이한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마치 정적 속에서 외치는 것처럼 선명하게 박혔다.
시은은 수호의 대답에 아주 잠깐,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고마워."
그 말 한마디가 이한의 가슴을 서늘하게 긁고 지나갔다.
시은의 손에 들린 저 밴드는, 시은이 상처 입은 얼굴로 돌아올까 걱정하며 준비한 이한의 진심이었다.
타인의 따가운 시선이 무서워 늘 숨어 지내던 이한이 처음으로 그 공포보다 앞서 용기를 냈던, 이름조차 적지 못한 채 시은의 책상 위에 떨구고 온 가장 작고도 간절한 고백이었지만, 수호의 무심한 대답 한 번에 그 진심은 너무나도 쉽게 주인을 잃었다. 억울함보다 더 지독한 건, 수호를 바라보는 시은의 눈빛과 주위의 공기를 살피느라 입조차 떼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었다.
비겁한 침묵이 길어질수록 주위의 소음은 아득해졌고, 이한의 시야 위로 낡은 기억들이 노을처럼 번졌다.
눈앞의 풍경이 노란빛으로 일렁이며 흐릿해지는 사이, 웅성거리던 교실의 소음은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하게 멀어져 갔다. 그 아득한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 건 눅눅하고 피 냄새와 닮은 진득한 흙내음이었다. 마치 잊고 싶었던 3년 전의 그 지독했던 장마철이, 무의식 속의 이한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기억은 늘 가장 비참했던 감각부터 되살아난다.
기분 나쁘게 끈적이던 습기, 땀에 젖어 살갗에 축축하게 달라붙던 교복 셔츠의 불쾌한 감촉 같은 것들. 이윽고 그 기분나쁜정적을 뚫고, 기억의 가장 구석진 곳에 처박아두었던 날카로운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회상 속의 교실은 늘 그런 식이었다. 제 집인 양 내 책상을 점령하고 앉은 놈들이, 잔뜩 움츠러든 내 몸을 구경거리 삼아 낄낄거리던 지옥 같은 풍경.
“야, 이 새끼 배 튀어나온 것 좀 봐. 너는 평생 굶어도 안 뒤지겠다? ”
목소리 큰 놈 하나가 이한의 교복 셔츠 위로 불거진 뱃살을 손가락으로 쥐어 짜내며 희열에 찬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저열한 유희가 신호탄이 되었는지, 사방에서 터져 나온 비웃음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이한을 겹겹이 에워쌌다. 공기마저 웃음소리에 점령당한 듯 숨통이 막혀올 때쯤, 누군가 이한의 어깨를 툭 치며 내뱉었다.
“나였으면 쪽팔려서 진작 자살했다."
그 잔인한 농담에 무리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놈은 이한의 일그러진 표정을 즐기듯, 인심이라도 쓰는 양 말을 이었다.
“운동 좀 할까? 나 빵 먹고싶은데 빵 좀 사와 이한아”
"이야-, 친구 운동까지 시켜주고. 진짜 이런 친구가 어딨냐, 안 그래?"
조롱 섞인 다정함이 더 역겨웠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닥으로 동전 몇 개가 무심하게 내팽개쳐졌다. 낱개로 흩어져 굴러다니는 동전들은 마치 이한의 짓밟힌 자존심 같았다. 놈들은 대답조차 기다리지 않은 채, 제들끼리 떠들며 메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 메로나.”
“오, 그럼 난 딸기우유.”
“웩, 딸기우유? 너 여쟈냐? 취향 진짜 극혐"
자기들끼리 어깨를 치며 터뜨리는 웃음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그 소란스러운 소음 속에서 이한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고립되어 있었다. ‘싫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이한은 아무말도 하지못한채 고개를 숙이며 바닥의 동전을 하나씩 주워 담을 뿐이었다.
그때, 낄낄대던 놈 하나가 굳어 있는 이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뭐 해? 안 사 오고.”
재촉하는 서늘한 목소리에 숨이 턱 막히던 찰나였다. 뒷문을 가로막고 서 있던 무리 뒤편으로, 빗줄기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 하나가 꽂혔다.
“나와.”
아이들의 시선이 쏠린 곳엔, 아무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의 연시은이 서 있었다. 시은은 나를 구해주러 온 영웅은 아니었다. 그저 제 갈 길을 막고 선 놈들을 향해 무미건조한 사실을 내뱉었을 뿐이었다.
“비키라고.”
순간, 교실을 가득 채웠던 눅눅한 공기가 단번에 씻겨 나가며, 수십 명의 눈동자가 무서워 고개도 못 들던 내 세상을, 시은은 그 작은 몸으로 너무나 쉽게 부수고 들어왔다.
겁이라곤 한 점도 섞이지 않은 그 서늘한 눈동자. 당당하다 못해 건조하기까지 한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바닥에 흩어진 동전을 쥔 채 멍하니 생각했다.
'멋있다.'
분명 동경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심장 한구석이 간질거리다 못해 아릿해지는 이 감각은, 단순한 선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낯선 종류의 진동이었다. 소년의 좁은 세계에 처음으로 일렁임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름조차 붙이지 못해 방황하던 그 간지러운 마음이, 훗날 나를 이토록 아프게 찌르는 지독한 짝사랑의 시작이었음을.
“……고마워.”
찰나의 회상을 날카롭게 자르고 들어온 시은의 목소리에, 이한은 비로소 현실이라는 지독한 구렁텅이로 추락했다.
멀어지는 기억 속의 흙비린내가 사라진 자리에, 지금 이 교실의 건조한 공기와 아이들의 무심한 소란이 들어찼다. 3년 전 교실 바닥에 엎드린 채 시은의 뒷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던 그때처럼, 시은에게 닿아야 했던 이한의 진심은 오늘도 너무나 쉽게 주인을 잃고 유실되고 있었다.
이름 모를 동경이 사실은 사랑이었음을 깨달은 대가는 잔혹했다. 자각한 순간 빼앗겨버린 진심은, 차라리 몰랐을 때보다 몇 배는 더 날카로운 통증으로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한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제 손바닥이 짓이겨지도록 주먹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3년 전의 비겁했던 소년은, 훌쩍 커버린 지금의 교실에서도 여전히 침묵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때, 침묵을 깬 건 수호의 가벼운 목소리였다.
"고마우면 밥이나 같이 먹자. 어때?"
수호가 시은의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한은 그 거침없는 다가감이 못내 부러워 주먹을 꽉 쥐었다. 시은은 잠시 수호를 응시하며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짧게 대답했다.
" 그래."
그 대답과 동시에 앞문이 열리며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교실 안이 순식간에 정돈되었지만, 이한만은 넋이 나간 듯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야, 거기 서있는 놈. 가만히 서서 뭐해!"
선생님의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든 이한이 어버버거릴 때, 뒤에 앉아 있던 친구가 옷자락을 툭툭 쳤다.
"야, 앉아. 뭐 해?"
"어? 아…… 미안."
이한은 도망치듯 자리에 앉았다. 칠판을 채우는 판서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한의 눈은 자꾸만 대각선 앞줄의 시은과 엎드려 잠이 든 수호에게로 향했다.
.
.
.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교실은 급식실로 향하는 아이들의 발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수호는 여전히 팔에 얼굴을 묻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은은 가방 정리를 끝내고 수호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일어나"
"아,...10분만……."
"밥 먹자며."
무심하게 툭 던진 시은의 말에 수호가 번쩍 눈을 떴다. 부스스한 머리를 털며 일어난 수호는 시은을 보고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가자. 밥 먹으러."
수호는 시은이 학교 근처 맛집이라도 데려갈 줄 알았는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따라나섰다. 하지만 시은이 멈춰 선 곳은 익숙한 냄새가 진동하는 학교 급식실 앞이었다. 수호는 멍한 표정으로 급식실 줄을 바라보다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 밥 먹자는게 급식이었어?"
"밥 먹자며."
시은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식판을 집어 들었다. 수호는 골 때린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즐겁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하, 그래. 진짜 너답다."
수호는 어이없어하면서도 그게 또 시은이답다고 생각하며 순순히 뒤를 따랐다.
배식대 앞에 선 시은은 평소처럼 먹는 둥 마는 둥 소량의 반찬만 담으려 했지만, 그때 수호의 집게가 쑥 들어오더니 시은의 식판 위에 제육볶음을 산더미처럼 듬뿍 얹어주었다.
"밥을 잘 먹어야 키도 크고, 아까처럼 안 맞고 다니지 "
수호는 능글맞게 윙크를 하며 제 식판에도 고기를 가득 담았다.
"잘 먹을게-"
자리에 마주 앉은 수호는 정말 맛있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시은은 제 식판에 수북이 쌓인 고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부류였다. 타인의 영역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제멋대로 비집고 들어와 밥을 얹어주고, 적막이 당연했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소란스럽게 수저를 움직이는 존재.
그동안 시은의 세상은 무채색의 고요함뿐이었다. 누구도 시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시은 또한 누군가와 온기를 나누며 식사하는 풍경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수호가 만들어내는 소음이 시은의 잔잔했던 일상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시은은 제 식판을 채운 낯선 온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색했다. 누군가가 자기를 도와주고, 당연하다는 듯 곁을 지키는 이 상황이 분명 낯설고 생소한데, 어쩐지 싫지만은 않았다.
시은은 젓가락을 움직여 수호가 얹어준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었다. 항상 무미건조하게 넘기던 급식이, 오늘따라 조금 다른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나쁘지 않네.'
항상 고요하고 차가웠던 시은의 세계에 처음으로 타인의 온기가 섞여 들고 있었다.
급식실을 나오자마자 시은은 자연스럽게 교실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밥을 먹었으니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복습을 이어가는 것이 시은에게는 당연한 일과였다. 하지만 채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뒤에서 단단한 손길이 시은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
“가서 공부해야 돼.”
당연하다는 듯 내뱉은 시은의 대답에, 수호가 길을 막아서듯 시은의 어깨 위로 팔을 올렸다. 그러고는 마치 세상 중요한 진리라도 전수하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과장된 한숨을 내뱉었다.
“아— 진짜 뭘 모르시네, 시은 씨. 원래 점심 먹고 나면 매점 한 번 찍어주는 게 국룰이거든요.”
갑자기 훅 끼어든 수호의 무게감에 시은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를 살짝 틀었다.
“배불러. 너 혼자 먹어.”
시은이 귀찮다는 듯 팔을 쳐내려 했지만, 수호는 오히려 싱긋 웃으며 시은의 팔꿈치 언저리를 가볍게 낚아챘다. 그러고는 제멋대로 몸을 돌려 매점 방향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야, 넌 좀 살 좀 쪄야 돼. 사달라고 안 할 테니까 가자, 좀.”
결국 시은은 수호의 기세에 못 이겨 매점까지 끌려가고 말았다. 시끌벅적한 아이들 틈에서 수호는 냉장고를 뒤적였다. 그러다 문득 분홍색 우유 팩 하나를 집어 들고는 시은을 빤히 쳐다봤다. 하얗고 서늘한 시은의 얼굴 옆에 딸기우유라니. 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수호는 한 손에는 콜라를, 다른 한 손에는 딸기우유를 들고 나타났다
“자.”
수호가 시은의 손에 딸기우유를 툭 얹었다. 평소의 시은이라면 “필요 없어”라며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방금 급식을 같이 먹은 탓일까. 아니면 저도 모르게 수호의 페이스에 말려든 걸까. 시은은 거절하는 타이밍을 놓친 채 얼떨결에 우유를 받아들었다.
두 사람은 교정 한편에 자리한 나무 정자에 나란히 앉았다.
“이렇게 바람도 쐐야, 머리가 돌아가는 거야.”
수호가 콜라 캔을 따며 시원하게 들이켰다. 시은은 제 손에 들린 딸기우유 팩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팩 겉면에 맺힌 차가운 이슬이 손바닥을 적셨다. 무심하게 빨대를 꽂아 한 모금 들이키자, 인공적인 딸기 향과 지나치게 달콤한 맛이 혀끝을 감돌았다.
계획이 어긋났는데도 이상하게 짜증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정자 위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볕과 옆에서 쫑알거리는 수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선명한 색으로 시은의 오후를 채우고 있었다.
시은은 우유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생각했다. 이런 점심시간도, 나쁘지는 않다고.
항상 무채색의 적막뿐이었던 시은의 세상에, 처음으로 낯선 색채의 온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타인의 소란이, 한 모금의 우유처럼 예고 없이 달콤하게 스며드는 것.
시은에게 ‘첫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같은 시간, 그 따스한 풍경을 멀리서 지켜봐야만 하는 이에게 첫사랑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각한 순간 빼앗겨버린 진심.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 걸음조차 떼지 못한 채 침묵이라는 감옥에 갇혀버린 비겁함.
이한에게 첫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전하지 못한 고백이 날카로운 상처가 되어 돌아오고, 용기 내지 못한 대가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지독한 형벌.
누군가에겐 흩날리는 봄볕의 온기로, 누군가에겐 짓씹은 입술의 핏물로.
서로 다른 온도로 타오르기 시작한 두 종류의 첫사랑이, 그렇게 같은 계절 아래 엇갈리며 흐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