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3세가 꽃집에 빠진 이유

11. 재벌3세가 꽃집에 빠진 이유

W.오후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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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기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천천히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여주는 알람이 울리기 전인데도 눈이 떠졌다. 익숙하지 않은 침대였다. 하지만 불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만큼 깊게 잔 뒤였다. 잠깐 멍하니 천장을 보다 몸을 일으켰다. 복도 쪽에서 낮은 소리가 들렸다. 문 여닫는 소리와 옷 스치는 소리. 아주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여주는 슬리퍼를 끌고 문을 열었다.

이층 복도 끝에서 석진이 서 있었다. 셔츠 단추를 채우고 있었고 이미 머리는 말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어제 밤의 느슨한 모습은 다 사라지고 출근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여주가 나오자 석진의 시선이 바로 향했다.

 

 

“깼어?”

“방금요.”

 

 

여주는 잠이 덜 깬 얼굴로 계단 쪽 난간에 기대 섰다. 머리는 아직 대충 묶은 상태였다. 석진은 넥타이를 고쳐 매다가 손을 멈췄다.

 

 

“더 자도 되는데.”

“으응, 석진씨 가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요”

 

 

석진이 짧게 웃었다. 웃음이 크지 않아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늘도 화이팅!”

“..오늘따라 가기 싫다 이따 데리러 갈게”

“뭐예요 그게. 얼른 가요~ 늦겠다.”

“오늘은 일찍 갈게. 집에서 가져올 짐도 있잖아.”

“...네에 이따 봐요.”

 

 

석진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여주의 머리 위를 한 번 바라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집 안을 한 번 울렸다. 그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여주는 난간에서 몸을 떼어냈다.

 

여주는 어제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집을 나섰다. 석진의 집엔 내가 입을 옷도 없을 뿐더러 당분간 입을 옷도 전혀 없기에 바로 집으로 향했다. 석진의 동네를 빠져나와 원래 살던 동네로 들어서자 공기가 달랐다. 익숙한데 반갑지는 않은 풍경이었다. 여주는 현관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누르기 전에 잠깐 멈췄다. 어제의 물소리와 축축한 바닥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문을 열자 냄새가 먼저 왔다. 눅눅한 공기. 완전히 마르지 않은 수건 냄새. 바닥은 다행히 밤새 더 번지지는 않은 상태였다.여주는 신발을 벗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어? 학생.”

 

 

집주인 아주머니였다. 아침 일찍 무슨... 아 어제 문자를 보냈었지. 라고 생각한 여주는 웃으며 아주머니를 반겼다.

 

 

“아 안녕하세요.”

“어제 문자 봤어요. 밤에 많이 놀랐겠네.”

“아 괜찮아요. 제가 늦게 들어와서.”

 

 

여주는 괜히 웃으며 말을 흐렸다. 집주인은 욕실 쪽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배관이 오래돼서 그래요ㅎㅎ.. 아니 근데 이상하네.”

“네?”

“아침에 기사 부르려고 했더니 이미 다 처리됐다고 하더라고.”

“아..”

“응. 밤에 불렀다던데. 배관도 교체했고 물 새는 것도 다 잡았다고.”

“아하하.. 고쳤다고 문자 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다행이네~ 아침에 문자 보고 까암짝 놀랬어~”

“.......”

“잘 곳은 있고? 이거 바닥 마르려면 좀 걸릴 것 같아”

“네. 잘 곳은 이미 구했어요.”

 

 

집주인 아주머니는 여주의 얼굴을 한 번 더 살폈다.

 

 

“그래? 다행이다 얘.”

 

 

얘기를 나누던 여주는 현관 옆 신발장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잠깐 손을 놀렸다. 꼭 뭔가 더 설명해야 할 것 같으면서도 굳이 말 얹고 싶지는 않았다.

 

 

“요즘 밤에 혼자 있으면 불안하잖아.”

“아 네 그쵸.”

“어제도 물 터졌다길래 혹시나 해서 말이야.”

 

 

여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이 아주 크지는 않았다. 대신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했다.

 

 

“괜히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아니야. 이런 건 집주인이 챙겨야지.”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한 번 욕실 쪽을 힐끗 봤다. 마른 바닥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인 듯했다.

 

 

“그래도 기사 불러준 사람 센스 있네. 배관까지 다 갈아놨더라.”

“…그러게요.”

“요즘 그런 사람 흔치 않은데.”

“…..”

“짐 챙기고 가는 거지?”

“네. 옷만 좀 가져가려고요.”

“그래요. 먼저 갈게요 학생~”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연락 필요하면 언제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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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옷장 문을 열자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오늘 입을 옷만 골라 꺼냈다. 너무 튀지도 너무 힘주지도 않은 옷. 엄마를 만날 때 늘 입던 그쪽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어제 입고 나갔던 옷을 벗어 침대 위에 정리해 두고 갈아입었다. 단정한 셔츠에 바지. 거울 앞에 서서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며 스스로를 한 번 더 다잡았다. 이때 , 휴대폰이 침대 위에서 짧게 울렸다. 진동 소리가 방 안에 또렷했다.

석진이었다.

 

 

뭐해?

 

 

여주는 잠깐 멈칫했다. 지금 상황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준비 중이에요.

 

 

오늘은 꽃집 몇 시 오픈인가요?

 

 

음.. 평소보다 조금 늦게 할 것 같아요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그 말은 석진씨가 더 들어야 하는데.

 

 

나한테는 해당 없음

 

 

왜요?

 

 

오늘 아침 누구 덕분에 기운이 넘치거든.

 

 

ㅋㅋㅋ 그게 뭐야... 이따 봐요 그럼!

 

 

여주는 잠깐 멈췄다. 괜히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느낌이었다. 별 말 아닌데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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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아직 여유는 있었지만 더 미루면 괜히 마음이 흐트러질 것 같았다. 가방을 어깨에 걸고 현관을 나섰다. 문을 잠그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잠깐 멈췄다. 병원 근처. 예전엔 너무도 익숙했던 동선이었다. 그 길로 출근하던 수많은 아침들이 겹쳐졌다. 피곤한 얼굴로 커피를 들고 걷던 자신.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인사하던 사람들. 자동문이 열리던 소리까지 또렷했다.

 

여주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지금은 그쪽으로 들어가는 날이 아니었다. 지하철에서 본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심장이 생각보다 차분했다. 도망치는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 선택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병원 근처 역에 도착하자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예전보다 훨씬 조용한 골목. 익숙한 건물들 사이로 카페 간판이 보였다. 여주는 잠깐 숨을 고르고 문을 밀었다.

 

 

카페 문을 밀고 들어서자 특유의 커피 냄새가 먼저 코끝에 닿았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주는 안쪽으로 몇 걸음 더 들어가다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창가 쪽. 벽을 등진 자리. 그제야 시선이 멈췄다. 엄마가 앉아 있었다.

 

이미 자리를 잡고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엄마가 보였다. 여주는 잠깐 그대로 서 있었다. 먼저 다가가지도 못한 채 시선만 머물렀다. 이 근처를 수없이 오갔던 사람처럼 엄마의 모습은 너무 익숙했고 그래서 더 어색했다.

 

엄마가 먼저 여주를 발견했다.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맞췄다.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그냥 여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엄마는 컵을 한 번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김이 거의 사라진 커피였다. 여주를 똑바로 보며 말을 꺼냈다.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재밌었니?”

 

 

질문처럼 들렸지만 답을 기대하는 말은 아니었다. 여주는 잠깐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표정에 가까웠다.

 

 

“재밌다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봐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

“이렇게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도.”

 

 

여주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알아요.”

“고등학교 때 얌전했던 이유가 고작 이거니?”

 

 

여주는 천천히 말을 고르듯 입을 열었다.

 

 

“그땐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해서 였어요.”

“......”

“지금은 선택지가 많아졌고요.”

 

 

여주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엄마의 입술이 잠깐 굳었다. 실망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 많은 선택지 중에...!”

“꽃집이요”

“그래. 꽃집”

“.......”

“의대 나와서”

“네.”

“집안에서 그만큼 밀어줬는데.”

“.......”

 

 

엄마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 특유의 숨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다시 한 번 밀어 정리하듯 두 손을 모았다.

 

 

“임여주.”

 

 

이름을 부를 때만큼은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지금은 네가 뭘 해도 자유로운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

“.......”

 

 

여주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근데 그건.”

 

 

엄마의 시선이 여주의 얼굴에 고정됐다.

 

 

“지금만 그래.”

“.......”

“다 정리하고 돌아와.”

 

 

 

 

 

 

 

 

 

 

 

 

 

 

 

 

 

 

이번 편은 어두운 장면이 조금 많네요 ㅜ.ㅜ 서둘러 힐링 장면을 데리고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