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
01. 나의 마지막 연인





"어제 늦게 잤어?"


그런 사람이 있다.

때를 가리지 않고 일상 속에 불쑥불쑥 나타나, 머리와 마음을 헤집어 놓는.

우정을 위장한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그 이상의 감정이 자라나게 만드는 사람.

나에겐 그가 한때 첫사랑이었다.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내 감정을 용기 낼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게 만든 사람.

정작 그는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나는 달랐다.

적어도 그와 함께 하는 순간만큼은 의미 부여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때로는 행복하지만, 때로는 나 홀로 마음 시린.



'야, 첫사랑 못 잊는 것도 중증이야.'

'새 사람 찾으라니까? 사람 잊는 데에는, 사랑이 답이야.'

'넌 나이 스물여덟이나 돼서 그깟 인연 하나 못 잊고 있냐-'

'너무 과거에 목메는 거, 안 좋아. 그거 너만 다친다니까.'


쾅. 물을 마시다 말고 신경질적으로 식탁 위에 유리잔을 놓은 사라가 부스스한 머리를 연신 쓸어넘겼다. 말이 쉽지.

어젯밤 과음을 했더니, 다시금 첫사랑 꿈을 꾼 모양이었다. 첫사랑을 떠올릴 때, 자연스레 따르는 부정적인 감정도 함께.


한사라
……나쁜 새끼.

곧이어 표정을 구기며 낮게 욕을 읊조린 사라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소화제를 마셨다.

마셨다기보다는… 입안에 털어 넣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한사라
…….

그리고선 시곗바늘 확인하는데… 이제서야 약속이 있던 게 생각난 모양인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소화제 뚜껑을 닫았다.




머리는 다 말리지도 못한 상태로, 대충 옷만 갈아입고 가방만 챙겨 나온 사라는 주변을 둘러보다 저만치에 서있는 누군가를 보곤 그를 향해 걸어갔다.


한사라
내가 좀 늦었다, 미안.

이 또한 하나의 루트인 것처럼, 자연스레 따뜻한 커피가 담긴 잔을 누군가에게 건넨 사라.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전정국
한사라 눈 실종됐네.

역시나 자연스레 커피를 받아든 그는 사라를 보며 옅게 웃음 지었다.


한사라
실종된 지 좀 됐다-.

애석하게도 한 번 실종된 눈은 돌아올 생각을 안 하네. 자포자기한 어조로 툴툴거리며 커피 한 모금 마신 사라는, 모자와 마스크에 가려진 그를 유심히 쳐다봤다.


한사라
그러는 전정국 눈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그 동그랗고 크던 눈 어디 갔지. 마치 어젯밤에 과음한 그를 은근슬쩍 건드려보듯이 말하는 사라. 그럼 그저 웃기만 하는 정국이고.

그의 이름은 전정국. 사라와 대학 동기로, 9년차 절친. 게다가 같은 회사에서 근무 중이라- 멀어지려야 멀어질 수가 없는 친구 사이다.

물론, 정국이는 군대 다녀오느라 사라보다 입사 후배지만 같은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두 사람.


한사라
우리 오늘… 외근이랬나.


전정국
어. 회사 가지 말고 바로 가면 돼.

그 말을 끝으로 자연스레 자기가 주차해둔 차로 걸어가는 정국이에, 사라가 그를 붙잡았다. 그냥 지하철 타자, 나중에 퇴근할 때 차 밀려.


전정국
난 상관없는데, 너 불편할까 봐.

내가 불편하긴, 빠르고 좋지 뭐. 정국의 옷깃 붙잡은 사라는 제 쪽으로 질질 끌었다.


전정국
그래도, 사람 많으면 좀 그럴 텐데.


한사라
나 그런 거 상관 안 써-

그리고, 기름값 오른 거 몰라? 결국 다 돈이야 저것도. 운전석에 타려던 정국을 강제로 지하철역으로 이끄는 여주였다.




역시나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 안. 가까스로 자리 하나 구하자마자 정국은 사라를 앉혔다. 자신은 사라 앞에 서고.

아무 말 없이 앉으며 가방에 있던 종이 서류 몇 개를 꺼내든 사라는 줄글을 읽어내려가기 바빴고.


한사라
……근데 왜, 굳이 식물원이야?

그러다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생기면, 정국에 물어보기 마련이었다.


전정국
그러게.


한사라
…우리 회장님 취향인가.


전정국
이해가 안 되긴 해, 다른 곳 놔두고 굳이 식물원에서 창립 기념식을.

그러니까. 대기업이면 레스토랑 하나를 빌리던가, 호텔 하나를 빌려도 남을 재력인데 식물원이라니. 의아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사라였다.

그렇다. 두 사람은 지금 회사 창립 60주년을 맞아 창립 기념식을 개최할 후보 장소에 답사 다녀오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다.


처음에 회사에서 누가 외근 다녀올지 정하다가…

회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주저 않고 바로 YES부터 외친 둘은 출근을 안 한다는 사실이 그저 좋을 뿐.



전정국
식물원 갔다가 천천히 밥 먹고 오지, 뭐.


한사라
그렇게 여유로워도 돼?

사라의 물음에, 제 백팩에서 지갑을 꺼내는 정국. 그 안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들고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사라
……그게 뭔데?


전정국
…이걸 모른다고?


한사라
모르는데.

회사 카드잖아... 법인 카드. 자랑스레 공중에서 흔들어보인 정국. 그에 걸맞는 리액션 마냥 사라의 두 눈은 커졌다.


전정국
본부장님이 주셨어.


한사라
우리가 쓰라고...?

대박. 금세 입가에 미소 스며든 여주는 애초에 본 목적이 업무가 아니었던 사람처럼 서류를 다시 가방 안에 던지듯 집어넣었다.



한사라
비싼 거 먹자, 비싼 거.




한사라
네, 도착했습니다.

식물원 입구에 들어서기 무섭게, 상사로부터 걸려온 전화. 망설임 없이 받아든 사라는 간단한 대화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정국
팀장님?


한사라
응-.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라 어깨를 붙잡고 식물원 안으로 이끄는 정국이었다. 춥다, 얼른 들어가자.



실내로 들어서자, 식물원의 따뜻하면서도 습한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천장이 꽤 높은 이곳을 찬찬히 둘러보는데… 주인이 누군진 몰라도 되게 공들였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각종 식물들을 다룬 솜씨 하며… 주변 인테리어까지, 이렇게 분위기 있는 곳은 처음인 것 같기도.

평일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이곳을 둘러보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아 보였다. 잔잔한 재즈가 구석구석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간간하게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도 들리고.

도심 속 잠시 쉬어갈 만한 평화로운 곳이 있다면 여기가 어울렸다.


그냥 들어온 자리 그대로 서서 감탄사를 내뱉으며 둘러보고 있는데… 눈여겨 보던 빈티지스러운 하얀 계단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멀리서 봐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얼핏 봐도 이곳 주인 같으셨다. 나이는… 우리랑 비슷하신 것 같기도.



전정국
주인분이신가.

응. 그런 것 같은데? 핸드백을 고쳐 멘 사라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를 향해 다가가자, 그런 사라의 뒤를 따르는 정국이었다.

어느 정도 그 사람과의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먼저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건네는 사라였음을.


한사라
안녕하세요_

전화로 말씀드렸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스로 말을 멈추는 사라였다.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을 보이는 듯했는데… 그러긴 사라의 맞은편에 서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서로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나의 마지막 연인이었다.


과거의 추억에 얽매여 지친 나에게 조금의 빛이 되어주었던 사람.

몇 년간, 깊은 밤을 함께하고- 밝아오는 아침마다 같은 곳에서 눈을 뜨면 나를 제 품에 안기게 해서 놓아주지 않곤 했다.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타오르는 불꽃같은 사랑을 했다.


그와 나는 우리의 관계에 단 한 번도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다.

…나만 아니었더라면, 그 관계도 영원했겠지만 말이다.



그 어느 누구가 직장에서 전 연인을 다시 만날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는 내게 조심스레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그 특유의 눈웃음까지 보이며.

왜인지 모르게, 그의 웃음을 볼 때마다 가슴 한편이 저릿했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기엔, 내가 그에게 잘못한 게 너무나도 많아서.


그리고, 이 갑작스러운 만남이 우연의 절정인 줄 알았다면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곧 더 어마어마한 우연이 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