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age Blue (메리즈 블루)”

19화 | 짧은 감정의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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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사고?.

그래. 사고. 그날 여주 부모님도 같이 갔었어. 엄청난 부상을 입고, 결국 돌아온 사람은 여주 한 사람 뿐이였지만.

전정국의 말을 듣고나서야, 그제서 여주의 다이어리에서 본 부모님의 기일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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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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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그래. 그날이였어. 여주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이.

다이어리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인지하지 못 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을 떠난 날짜도 2월 12일. 같은 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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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이제 알겠어?. 무슨 짓을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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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기억… 이랑도 관련있는 거야?.

돌아온 대답은 예스, 였다. 왜, 그때 더 격렬하게 반항하지 못했을까. 뒤늦게 후회해봤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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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어디까지 기억하는거야?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와서 여주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기억하고, 기억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궁금했다. 정말로 나에 대해 전부 다 잊은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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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딱 한 사람만 기억 못 해.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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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그게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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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그래. 박지민. 너 하나만 기억 못 한다고.

많은 생각이 잠긴 눈으로 정국이를 바라보던 난, 입을 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래. 안 좋은 기억은 빨리 잊을 수록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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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니 말이 맞아. 미안하다. 억지 부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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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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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알았으면 됐다.

금세 수긍하는 지민의 모습이 좀, 당황스러웠지만 정국은 입술을 말아물고는 돌아섰다.

그래. 이거면 됐어. 원하는 걸 이루었잖아.

그런데, 왜. 기분이 이렇게 찝찝한 건지.

정국이 자리를 떠나고. 한참동안 그 자리에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던 지민은 오늘 일을 닫아놓고. 원래 계획대로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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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원래 계획대로 하면 되는거야… 그래.

애써 괜찮다고 손으로 심장을 쓸어 내리며 자기합리화를 해보지만, 당연히 괜찮을 리는 없었고.

심장은 평소보다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설렘이 아닌 공포감이 온 몸을 지배했다.

“원래 계획이였잖아. 얼굴만 보고 떠나는거…”

“그러니까. 난 괜찮아.”

그날로 부터 며칠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둘이 맞춘 것 처럼 정국과 지민에게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 했다.

그 시간동안 여주는 찝찝한 기분을 감추고 출근을 해야했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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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디자이너님. 안에 있는 거 알아요. 문 좀 열어봐요.

쿵쿵, 여러번 현관문을 손으로 두드려 보지만. 쥐 죽은 조용한 것은 기본이고, 부스럭 소리 조차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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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답답해서 찾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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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을테니까. 나와서 얼굴 보고 얘기 좀 나눠요. 일 때문에 그래.

그렇게 한참을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을 했을까. 현관 너머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띠리릭-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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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뭐에요. 진짜 그동안 전화도 확인 안 하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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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미안해요. 며칠 정신이 없어서.

새 하얗게 질린 얼굴과 핏기 없는 입술,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식은 땀에. 의학 지식이 없는데도 얼굴만 보고, 이 사람이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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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어디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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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아, 아니에요. 그냥 좀… 일이 있어서.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만 봐도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겠는데. 거짓말은. 손을 뻗어 내 머리와 그의 머리를 번갈아 짚어보는데 확연히 차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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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미쳤나봐. 열이 이렇게 나는데. 약은 먹었어요?.

아, 그게… 제대로 답 하지 못하고 말 끝을 흐리는 걸 보니, 챙겨 먹었을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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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들어갈게요.

안, 안 그래도 돼요. 말을 더듬으며 문을 가로막는 그에게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거 많은데, 안 물을게요. 그러니까, 좋게 내 말 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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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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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나 되게 참고 있는 거 모르죠.

솔직히 그날, 되게 화 났는데. 그냥 넘어 갔잖아요. 평소와는 다르게 장난스러움은 없고 진지하게 말하는 여주에, 지민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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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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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그러니까, 이번엔 내 맘대로 할 거에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현관문을 비집고 들어간 나. 그도 더이상 나를 막지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비상용 약 꾸러미 들. 몇개는 벌써 먹은 건지 바닥에 껍질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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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딱 보니까, 병원은 안 간 것 같고. 밥은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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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아뇨.

일단 청소부터 하는게 좋겠네. 근처에 쓰레기통을 들고, 테이블 아래에 떨어진 약 껍질들을 손으로 하나씩 주워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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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이걸 여주씨가 왜, 해요. 내가 할게요.

쓰레기통을 가져가려는 행동에, 아픈 사람이 하길 뭘 해요. 라며 인상을 쓰니까, 놀란 아기 고양이 처럼 수그린다.

그렇게 물어보는게 싫은가. 금세 입을 꾹_ 다물고 안절부절 못 하는 얼굴로, 주위를 멤돌았다.

그렇게 한, 30분 가량 지났을까.

집 안에 있는게 쌀 하나 뿐이라. 흰 쌀 죽을 만들어 수저와 함께 테이블에 세팅하니, 그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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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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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고마우면 일단 나아요. 그 뒤는…

말끝을 흐리다가 결국 말을 못 마쳤다. 순간적으로 무서워서. 진짜 이 남자와 전정국이 알고 있는 그 비밀이, 내가 감당할 수 없을까봐.

전정국의 말대로, 차라리 모르는게 나을 비밀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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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여주씨, 나 다시 미국으로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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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네?.

숟가락으로 죽을 먹던 그의 뜬금없는 발언에, 생각하느라 놓고있던 정신을 되찾았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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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아. 물론, 프로젝트는 마치고 떠날거에요. 프로젝트는 당신이랑 나랑의 약속이잖아.

결국. 말 안 해주고 도망치는거네요. 씁쓸한 미소와 함께 죽을 먹던 숟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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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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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진짜 못돼 쳐 먹은거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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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네.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요. 여주씨 한테 제일 먼저 말해 주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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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왜요?, 왜 나한테 먼저 말해주고 싶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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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그건…

그것도 말 못 해주겠죠?.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내보인 여주가 의외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요. 잘 떠나요. 나도 미련하게 안 잡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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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여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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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당신 진짜 못 이기겠다ㅎ. 이번엔 당신이 이겼어요_

짧은 시간에 느낀 이 감정이, 어디서 나온 건지 깨닫기도 전에. 이렇게 끝이 빨리 찾아올지

예상하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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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내일 회사에서 봐요.

1. 지민이 떠날 날, 여주 부모님의 돌아가신 날이다.

2. 지민의 아버지는 거짓말을 했다.

3. 여주는 사고 후유증으로 선택적 기억장애를 갖고있다.

[-오늘의 정리 끝-]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