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age Blue (메리즈 블루)”

03화 | 시간은 흐르는데, 난 한 없이 고여있구나

잔뜩 화가 난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고 ‘너 먼저 올라가.’ 라는 말에, 결국 정국이를 놔두고 홀로 집 안으로 올라왔다.

평소 같았으면 ‘같이’ 있겠다고 고집부렸겠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오늘의 정국이는 정말로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가 너무 무서웠다.

김여주 image

김여주

얘 대체, 왜 안 오는 거야...

몇 분이 지나도 올라오지 않는 정국에, 불안한 마음에 나는 현관문 앞에서 서성였다.

불안한 마음에 손톱을 물어뜯는데, 현관문의 똑똑- 거리는 노크소리에 달려가 난 현관문을 벌컥, 하고 열었다.

벌컥, ㅡ

전정국 image

전정국

뭐야, 나 기다렸어?.

아까와는 달리 차분한 얼굴로 들어온 정국의 얼굴엔, 약간의 미소가 피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뭐지?, 잘 풀린 건가?.

잘 풀렸냐고 묻기도 전에, 손에 분홍색 보자기를 손에 쥔 채 집 안으로 들어와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으로 향하는 정국을 향해 ‘어떻게 됐어?.’ 라고 묻자, 분홍색 보자기를 식탁에 올려다놓곤 ‘그냥, 뭐... 잘 보냈어.’ 라며 어중간하게 답 했다.

김여주 image

김여주

어중간 하게 대답하지 말고, 사람 더 불안해지게. 제대로 돌아간 거 맞아?.

전정국 image

전정국

잘 돌아갔다니까.

보자기를 풀어헤치는 것과 동시에 코를 찡긋거리는며 잘 돌아갔단 말에 더욱 의심스러웠다. 설마, 어디 한 군데 부러트린 건 아니겠지?.

김여주 image

김여주

설마, 때렸어?.

전정국 image

전정국

나를 뭘로 보고. 내가 다짜고짜 주먹부터 나가는 사람인 것 같아?.

보자기에 싸온 반찬통들을 하나씩 냉장고에 넣으며 서운하다는 듯 말하는 정국. ‘아깐 때렸잖아...’ 라고 말하자 말을 더듬는다.

전정국 image

전정국

…그건 네가 하도 위험해 보이길래.

헛 기침을 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은 걸 보면, 때리긴 한 모양이였다.

김여주 image

김여주

하... 또, 어디 때렸어?.

전정국 image

전정국

안 때렸다니까, 정말로. 그냥 말로... 곱게 다그쳤어.

그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하는 얼굴로 쳐다보니 정국은 냉장고의 문을 쿵- 하고 닫더니 팔로 냉장고를 짚은채 바라봤다.

전정국 image

전정국

내가 그렇게... 못 미덥냐?.

김여주 image

김여주

응... 미안한데, 못 미더워.

못 미덥다는 건 장난이였다. 평소처럼 잘 받아주는 정국이 덕에, 아까의 공포감은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지은 미소에, 정국이도 이제서야 안심한 건지 식탁에 기대며 밥 안부를 물었다.

전정국 image

전정국

밥은, 챙겨 먹었고?.

밥... 당연히 안 먹었다. 웨딩 드레스를 입느라고 말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또, 씁쓸해진다.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네가 본 걸까, 정국이는 ‘아...’ 라며 짧게 탄식하곤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했다.

전정국 image

전정국

그래, 넌 좀 살 좀 빼야겠다. 요즘 포동포동하게 올라왔네.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볼을 찌부시키는 정국이. 이 사소한 행동, 모든 순간순간마다, 권우현 그 녀석이 껴 있었다.

권우현 image

권우현

여주야, 안 추워?.

김여주 image

김여주

춥긴 한데_ 하늘에 내리는 눈이 몸에 떨어지는게 너무 좋아ㅎ.

그날은 연애한지 1년 째 되던 날. 하늘에선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고, 눈을 좋아하던 난 그와 뽀득뽀득한 눈을 밟으며 걸었다.

권우현 image

권우현

하여간, 완전 천방지축이야. 이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남색의 긴 목도리를 내 목에 둘러주고는, 추워서 붉게 변해버린 내 두 뺨을 감쌌다.

권우현 image

권우현

하얀 얼굴이 다 새 빨개졌네. 완전 사과 같아.

김여주 image

김여주

못 났다는 거 아냐?. 권우현씨?.

권우현 image

권우현

설마요. 이렇게 예쁜 사과가 어디있다고ㅎ.

이미 선택은 했고, 시간은 흘러가고 있는데. 이 자리에서 나 혼자만 한 없이 고여있는 것만 같았다.

전정국 image

전정국

야... 너 울어?.

뺨에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그 물기를 닦을 새도 없이, 엄청난 울분이 목을 치고 올라왔다.

김여주 image

김여주

나...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안 괜찮나봐...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쉴 틈 없이 눈에서 흐르는 눈물. 정국이는 날 끌어안고 아이를 달래 듯 천천히 등을 토닥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괜찮으면 이상한 거지.”

“나도 그랬어. 시간이 약인 줄 알았는데...”

“오늘보니까, 전혀 괜찮지 않네.”

그대로 전원이 꺼진 것 처럼 앞이 캄캄해졌다. 많이 울어서 탈진으로 쓰러진건지, 아니면 충격 때문에 쓰러진건지. 하지만 이것 만은 알겠더라.

전정국만은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믿어줄 거라는 걸.

울다 지쳐 잠이 든 여주를 침대에 눕히고 집에서 나와, 후드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 더듬었다.

전정국 image

전정국

...아, 나 담배 끊었지.

담배를 끊은 것도, 담배를 시작하게 된 것도. 전부 다 김여주의 영향이였다. 이제는 내 인생이 빠질 수 없게 되버린 그 녀석.

어쩌면 이기적일 수도 있겠지만, 여주가 권우현과 헤어지겠단 말을 한 그 순간.

나는 기뻤다.

전정국 image

전정국

이번엔 이기적일게.

오늘 밤은 왠지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