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생이, 일진의 아내?
감정적인 공주님


곱상하게 생긴 얼굴에 용포를 입은 사내가 천천히 별관 쪽으로 걸어갔다.

- 내 혼자 들어가야겠으니, 여기서부턴 아무도 따라오지 말도록 하게.

그의 목소리는 깔끔하고 고왔지만, 질투심에 사로잡힌 악한 목소리였다.

상궁
예에…….

궁녀와 무관들이 전부 별관의 모퉁이 앞에 멈춰 섰다, 사내는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걸어 모퉁이를 돈다.

그러고서는 가죽이 붙은 제 검집에서 길다란 칼을 빼어 들고, 빠른 속도로 작은 별관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 다기보단 걷어차다시피 한 사내가 소리에 놀란 000과 태형을 보다가, 이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태형의 목에 칼날을 갖다 대었다.

사내의 표정에서 태형에 대한 깊은 증오가 우러나왔다.


000
…세자저하.

- 공주 마마, 이러려고 소인과 약혼을 하였소?

- 소인은 눈 뜨고 코 베인 셈이 되는 것이 아니오.

사내는, 세자는 태형을 벌레 보듯이 내려다보았다.

곧 잡아 죽일 해충을 보는 눈빛.

- 그것도, 이런 되먹지 못한 양반가 자식에게 말입니다, 마마.

- 이 자도 약혼을 한 몸이 아닙니까?

- 마마에게, 소리를 치는 목청도 좋더랍니다. 이 새끼는.

세자가 칼을 태형의 목에 마찰한다. 피가 묻기 시작한다.


000
저하! 그만두시옵소서!

- 마마!

잠깐 고요해졌다.


000
…세자 저하, 제발 부탁이옵니다. 이 소첩이 간청하오니 부디, 부디 그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저하.

- 참 흥미가 돋게 하십니다.

세자가 태형의 목 부근을 조금 더 짓이누른다.

긁힌 것보다는 이제, 찍힌 것에 가깝다. 옅지만.

태형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변하고, 세자가 칼을 빼내어 태형의 도포에 그의 피를 떨군다.

엄청난 수치를 주는 것이었다.

- 소인이 마마를 줄로 묶어둬야 정신을 차리시겠습니까!

태형은 피가 흐르는데도 목에 손을 갖다대지 않고, 그 자세로 버텼다.

- 마마는, 소인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왜 자꾸 일탈을 하시려 드는!


태형
세자 저하.

태형이 세자에게 더욱 고개를 숙였다.

세자는 분이 나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태형의 눈 앞에 칼을 내리꽂았다.

- 네가 감히 왕족의 여자를 건드려!


태형
…세자 저하, 소저 감히 말씀드리옵니다.


태형
지나가는 어느 궁녀가 보아도 공주 마마는 저를 더 사모하실 것입니다,


000
태형!



태형
소저의 목을 걸고 말씀드리는 바이옵니다.

태형은 상황에 맞지 않게 간결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을 해 나갔다.

비록, 그의 목에서는 붉은 피가 숨을 쉬는 박자에 맞추어 툭, 툭.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박지민
…아.

누워 있던 박지민은 눈을 떴다. 급작스럽게,

그래, 이제 모두 알아차리겠구나.


지민
- 마마는, 소인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슬린다니까.


김석진
공주님, 나 모르지?

갑자기 교실에서, 그것도 자습 중인 고 삼 교실에서 잘생긴 애 옆에 잘생긴 애 옆에 못생긴 내…가 서 있으니 인기를 탄 건가,

아무튼 잠들어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일어났다.

김태형의 눈빛이 돌변했다.


김태형
아무래도 우리, 자리를 옮겨야겠는데.

잘생긴 선배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열린 뒷문으로 나갔다.

상황에 맞는 말은 아니지만 왜 저렇게 잘생겼냐…

내가 홀린 듯이 선배를 쳐다보고 있자 김태형이 내 정수리를 눌렀다.

아프다! 아프다 이 악마야아악!


김태형
마마 또 바람 핀다, 또.

나는 금방이라도 김태형 뺨을 한 대 칠 것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근데 얘는 입모양으로 '뭐.' 하고 말하는 게 고작이다.

내가 너랑 있으면서 성격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변했는지 아니?

겨우 사 일이지마는, 어? 어어?

…라고 태클은 걸고 싶지만, 둘 다 나갔으니 나도 착한 공주 여주인공 해 줘야지.

난 없었던 사람처럼 조용히 문을 닫고 마구 뛰었다.


김태형
수지, 이 곳에서는 이름이 뭐래?


김석진
아마 배수지였나 그럴 거야.


김태형
…제아무리 전생이라지만 꼴도 보기 싫어. 여기서는 더욱 더.


김석진
000은, 어떻게 생각한대.


김태형
글쎄. 얘 왜 이렇게 안 오지.

오오, 여기 완전 명당. 잘 들리고 어두워. 오오.

난 계단 위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잘생긴 선배와 김태형의 이야기를 엿들을 겸 계단 사이의 어두운 부분에 몸을 구겨넣었다.

교복이 조오금 더러워지겠지만, 뭐 어때. 어차피 내년이면 고삼인데.


김태형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가 000 찾으러 갔다 올게.

헐, 안 돼 태형. 딱 일 분만요.


김석진
아니, 가지 마.


김석진
얘기 끝내고 가자. 그래서, 공주님은 수지에 대해 뭐라고 하던데?

와, 선배님 천사.


김태형
…난 아직 당신 본명도 모르는데.


김석진
김석진.


김석진
너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이 짧다, 김태형?


김태형
형이니까.


김석진
지금은 아니지.


김태형
전생에 왜 지금의 우리한테 힌트를 준 거야?


김태형
아니, 어떻게 우리에게 힌트를 주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거야?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갑자기 이 년간 공부하느라 감춰 왔던 나의 집순이 드라마덕 성향이 뿜어져나온다.


김석진
진은, 전생과 후세 뭐 그런 것들을 연구하는 애더라고.


김석진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지금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야.


김석진
그리고 남기생이기도 하지. 덕분에 돈 많은 양반들 비밀 거리 뜯어내기는 일도 아니야.


김태형
…남자를 상대하는 일이라니 힘들겠네.


김석진
야, 말은 똑바로 하지? 내가 리드하냐?

팝콘이랑 콜라가 너무 간절하다.


김태형
아무튼 그 수지라는 애, 반드시 찾아야 돼.


김석진
방금 전까지 다시 보기 싫다던 애가, 너 감정이 수시로 막 바뀌고 그래?


김태형
…아니고, 걔가 너무 큰 힌트를 입에 물고 있어서 그래.


김석진
뱉는 순간 끝장이야. 걔가 우리의 진실을 아는 순간, 우리의 지금도 쇼윈도우마냥 까발려지게 돼.


김석진
그건 일종의 주민등록번호 같은 거지, 그 수지라는 애가 가진 힌트는.


김석진
왜 있나 싶다가도…, 필요한 데가 너무 많아.


김태형
정말 이게 전생이 확실해?

잠깐 정적이 감돌았다.


김석진
전생이 확실할 뿐만 아니라, 전생이 떠오르는 순간 지금에서도 영향을 입게 돼.


김석진
내가 실험해본 결과.


김태형
…실험?

너무 흥미로워지는데.


김태형
누구와 실험했는데?


김석진
기생집 단골 손님.

이야, 실험의 클라스가?


김태형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김석진
김남준. 옆 반이고, 전생의 기억은 잘 몰라도 돈 많은 집 자식인가 봐.


김석진
물론 걔가 추파 던질 때마다 깨어나면 오지게 부끄러워지지만.

아, 맞다. 남기생이랬지.


김석진
같이 잠을 자면 같은 전생이 동시에 보여.


김석진
기억 난 전생에서 다치면 지금에서도 다쳐.


김석진
…너도 오늘 밤 잘 때 조심해, 태형. 오늘은 위험할 거야.

미래 예지도 하시나?


김태형
잠깐만, 그럼 아까도.


김태형
손, 다쳤잖아!

무슨 일인진 몰라도 잘생긴 선배의 손에서 피가 나나 보다.


김석진
전생에서 나에게 신호를 주기 위해 그랬나 보지.


김석진
일부러 얕게 베었어.


김태형
...김석진 제법이네.


김석진
자꾸 반말 할래 너.

아아, 김석진 선밴갑다.


김태형
너무 큰 대우를 바라지 마, 나한테.


김태형
적어도 지금에서는.


김석진
그래, 니가 일진이라는 걸 잠깐 까먹고 있었네. 아이고 무서워 죽겠어 아주.


김석진
일진 형님, 무릎이라도 꿇어드릴까?

와, 저 선배도 깐족거리는 게 엄청나네.


김태형
닥쳐.


김석진
이게 자꾸, 그래. 아무튼.

석진 선배가 목을 가다듬었다.


김석진
또 다른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 전생에서 말이야.


김태형
…000, 민윤기, 전정국, 정호석.


김석진
확실히 우연이라기엔 너무 많아.


김태형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있어?


김석진
전생의 사람 중 한 명이, 지금을 알아버린 거지.


김석진
자신의 후세에 닥칠 연들을 미리 알아버린 거야.


김태형
너 아니야?


김석진
이 새끼는 잘해줄래도,


김석진
아무튼 십사세기 때만 해도 판을 쳤던 주술이나 판점을 어느 물체에 묶어두었겠지.


김석진
우리가 필연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헐, 미친.


김태형
…그럼 그게,


김석진
수지는 아니야.

잉?


김태형
딱 잘라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김석진
수지는 아니야, 배후에 누군가가 또 있어.


김태형
걔한테 친구가 또 있단 소리야?


김석진
아니.

석진 선배가 내가 있는 틈을 살짝 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린다.

못 보셨겠지…?


김석진
000과 니가 닿는 게 세상 제일 위험한 사람.


김석진
세상 제일 질투 나고, 싫은 사람.

김태형은 가만히 서 있다가 계단을 내려와, 내 앞으로 스쳐지나가버렸다.

살짝 본 표정은 화가 나 있었다.

석진 선배는 천천히 내려와, 내 앞에 멈췄다.


000
…!


김석진
나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난 조심히 나왔다.

교복 조끼에 먼지가 잔뜩 묻었다.

으! 거미줄!


김석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석진 선배는 조끼를 털어 주고, 김태형을 따라갔다.

뭐지, 저 시크한 자상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