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생이, 일진의 아내?
그대에게 결국 거짓말


하늘이 참 예쁘다.


000
아무도, 아무도 없는 것이냐!

하얗게 올라오는 구름과 섞인 붉은 노을이, 참 예쁘다.


000
이게, 이게 무슨 일인 것이냐! 대체, 대체….

노을 아래 타오르는 노란 불꽃이 예쁘다.


000
세자, 세자! 콜록, 큽. 윽.

그래도, 이렇게 예쁜 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그만으로도 너무 좋지만 나는 하지 못 한 말이 있어.


000
태형, 태형… 내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있는데.

문은 열려 주지 않았다. 공주는 불이 붙은 가마 속에서 죽었다.

세자는 그 날 평소 심성이 고왔던 공주를 잃은 것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

그가 던진 말은 간략했다. 한 문장, 그게 끝이었다.


지민
마마님은, 단 하루도 저를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김 의원 댁 둘째 아들과 교제를 시작한 지 이 년, 정략결혼하게 된 지 겨우 일 년이 되어.

조선의 공주 000은 그녀가 머무르던 행궁에서 가마로 이동하던 중 죽었다.

아침에 뒤숭숭한 꿈을 꿨다. 내가 죽어가는 꿈.

일어났더니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손 위에, 까슬까슬한 화상 흉터가 생겼다.

정말 죽일 순 없고 이렇게 알려줘야 했나 보다.

가만히 듣고 메모하기만 하는 사 교시를 보냈다. 쉬는 시간에는 그냥 잤다.

김태형이 나에게 오려다가 마는 게 다 느껴졌다.


000
그렇구나.

나는 일부러 점심을 빨리 먹고 홀로 가만히 내 책상에 앉아있었다.


000
나는 하다 못 해 전생에도 김태형이랑 이루어지지 못했었구나.


000
그래서 김태형은 배수지랑 결혼했구나.

이 꿈이 과연 김태형에게도 전달되었을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지민과 내가 꿈을 가진 전부였으니까.

그럼 나는 지민이한테 죽은 셈이 되는 거네. 정확히는 지민이의 하인이지만.

갑자기 구토가 올라왔다. 나는 화장실로 뛰어갔다.

하지만 변기를 붙잡는 순간 토는 나오지 않고, 극심한 슬픔이 밀려왔다.

나는 왕실 피로연 후에, 다시 돌아가는 길에 죽었다. 그 혼비백산한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아무도 제대로 만나보지 못 하고.

그렇게 파리해진 안색으로 반에 걸어들어가자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김태형이 앉아있었다.

전생이 이렇게 나를 뒤흔드는구나.


김태형
000.

그는 알고 있을까?


김태형
무슨 일인데 울었어, 너.

모르네.

나는 피식 웃었다. 비웃음처럼.


000
뭘 무슨 일이 있어, 성적 때문에 그래.


000
전생이랑 엮이는 바람에 좀 낮아졌더라고. 열흘 하고도 이틀 정도밖에 안 지났을 텐데.

거짓말이다. 성적이 떨어졌다고 벌써 알려왔을 리가.


김태형
너무 힘들어하진 말고.

나는 내 오른손을 주머니 속에 밀어넣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000
그래야지.

손이 너무나 따갑다.

태형은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상복처럼 흰 윗도리에 아랫옷을 걸치고.

그 날의 태형은 서른 두 살이었다.

그는 수지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시켜 왔으니.

허나.


태형
- 소인은 마마 말고는 품어 본 적도 없습니다.

000은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까? 태형은 그리 생각했다.

내가 다시 찾아간다면, 그녀는 나를 기억해줄까?


태형
저하.

태형이 웃는다. 그녀가 죽고 십삼 년 동안, 한 번도 지어 본 적이 없는 함박웃음.

어느 날의 맑은 날씨처럼 그의 하늘도 파랗게 개어 있었다.

눈 앞에 000이 보였다. 그에게로 내려와서 손을 잡는다.


태형
저하.


태형
소저, 많이 그리워했음을 아십니까.

태형이 그녀에게로 손을 뻗는다. 그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먼젓번 석진이 떨구었던 그 검은 피처럼, 바다 속으로 빠진다.

더 깊이, 더 깊이 잠겨들어갈수록.

태형은 더 해사하게 웃는다. 그의 입이 귀에 걸린다.

아무 물고기도 그를 물어뜯으려 하지 않는다. 아무 괴수도 그에게로 헤엄쳐 가지 않았다.


태형
저하.

태형의 눈물이 바다에 섞여들어간다.


태형
이제 소저, 마음껏 당신을 품을 수 있겠지요?

태형은 유서 한 장을 남겨 놓고,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하나의 파도로 사라졌다.

그 유서에는 간결한 붓글씨로 그리 적혀 있었다.


태형
- 소자는, 남은 생을 행복하게 잘 보내다가 먼저 가옵니다.


태형
- 저승 문 앞에서, 꼭 기다리겠사옵니다.

다 거짓말이었다. 000이 없는 생이 그에게 행복했을 리가 있나.

태형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기가 가시고 고통의 낯빛이 밀려왔다.

허나 그는 단 한 번을 몸부림치지 않았다.

깊은 바닥 틈으로 빛이 보였다. 태형에게만 보이는 밝은 빛이.


000
- 태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