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왕족 [시즌 2]
52.



그 후로, 꽤 시간이 흘렀다고 할 수 있겠지.

달각 -

연하게 타진 커피가 절반 정도 담긴 잔을 내려놓은 태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그마치 한 달이 흘렀는데, 정한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랄까.

그날 보냈던 군사들이 데려온 건 피투성이가 된 석진, 정국, 호석, 쓰러진 정한과 혼이 나간 것 같은 남준이었다.

그나마 정신이 가장 붙어 있었던 정국에게 상황 설명을 들은 바로는 일방적인 승우 쪽의 자결이었다고 한다. 그냥 단순하게 자기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하지만 문제는 그들에게 정한이 잡혔다는 것이겠지.

정한을 끝까지 놔주지 않았던 승우는 지민에게 무언의 명을 내리고, 때맞춰 도착한 병사들을 보고 바로 폭탄 같는 걸 날렸다고 한다. 정국은 그런 건 처음 봤다 했으니 아마 지민이 준비한 인간들의 무기일 테지.

바로 옆에서 그 충격을 받은 정한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였다. 그래도 신속한 수술 덕이었는지 기적적으로 숨은 쉬고 있는 상태. 하지만 여전히 의식은 되찾지 못했다.

"폐하, 들어가겠습니다."


김태형 (25)
"... 누구?"

덜컥 -

문이 열리며 전보다 훨씬 야윈 것 같은 남준이 들어왔다. 요새 통 정한의 옆에서 떨어지질 않고 잠도 안 자더니, 저러다가 정한보다 먼저 큰일나는 건 아닐까 싶다.


김태형 (25)
"어제 또 안 잤어?"


김남준 (27)
"응? 아니, 잤어. 걱정하지 마."


김태형 (25)
"형이 지금 걱정 안 할 얼굴이야, 그게?"


김남준 (27)
"신경 쓰지 말라니까."


김태형 (25)
"..."


김태형 (25)
"형... 제발, 형 몸부터 챙겨."


김남준 (27)
"그런 잔소리 사절. 오늘은 중요한 날이잖아."


김태형 (25)
"..."


김남준 (27)
"준비는 다 됐어. 너 나가서 집행하고, 편안하게 보내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 한 달 전에 우리가 싸웠던 곳은 이제 정리 끝났어. 워낙 난장판이다 보니까 한 달 걸렸네."


김태형 (25)
"형."


김남준 (27)
"곧 있으면 정호석이랑 전정국 와서 호위할 거야. 내려가면 바로 시작할 거다. 잘 몰라도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김태형 (25)
"형!"


김남준 (27)
"왜, 바빠 죽겠는데. 그리고 네가 말한 정한이 약은 구하긴 했는데 조금 뒤에 사용해 보기로 했어. 아직 지금 넣는 약 반응을 보자고 하네."


김태형 (25)
"..."


김태형 (25)
"됐고, 형은 오늘 장례식 빠져."


김남준 (27)
"... 뭐?"


김태형 (25)
"아마 모두 장례식에 참석할 거야."


김남준 (27)
"당연하지, 네가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잖아."


김태형 (25)
"그 말은, 몇 시간 동안은 궁 안의 사정을 제대로 보살필 자가 없다는 말과 같아. 물론 형은 총리니까 날 따라오는 게 맞아."


김태형 (25)
"하지만, 형은 정한이한테 따뜻한 보호자로써의 역할을 먼저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계속 정한이 옆에 있어 줘."


김남준 (27)
"... 야."


김태형 (25)
"그러면 정한이도 좋아할 걸?"


김남준 (27)
"그래도... 오늘 장례식에 빠지고 싶은 마음은 없어."


김태형 (25)
"명령이라고 해야 말 들을래? 형 없어도 석진이 형이 대신 하면 되니까 크게 틀어지는 거 없어. 그러니까 형 몸은 얼른 정한이한테 가시고요, 조금의 마음만 우리와 한 공간에 두시면 됩니다."


김남준 (27)
"..."


김태형 (25)
"정 그러면 형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정한이를 위해서 한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그럼 됐잖아."

"폐하, 정국과 호석입니다. 이제 슬슬 가셔야 해요."


김태형 (25)
"..."


김남준 (27)
"..."


김태형 (25)
"갈게. 나중에 보자."

태형은 그대로 살짝 웃으며 망토 하나를 걸치고 나갔다.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히며 잔에 남아 있던 커피가 약간의 파동을 자아냈다.

남준은 들고 있던 서류 몇 장을 태형의 책상 위에 놓으며 긴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태형의 말에 틀린 건 하나도 없다. 제가 부리는 건 다 억지인 것이다.

맞다. 지금 자신은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밥도 안 먹고, 하다못해 생명 유지를 위해 가끔 먹어줘야 하는 피도 마다하고 있었다. 그 시간에 하는 건 정한의 옆에서 계속 업무를 처리하는 것.

앞에서 색색거리며 숨을 이어가는 정한을 보고 있으면, 뭐 하나라도 해야 그나마 진정이 됐다. 그래서 뭐, 업무를 일부러 더 하고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지금 몸 상태의 원인이다.


김남준 (27)
"... 아저씨가 하는 게 맞는 걸까, 정한아."

방금 전에 정한의 수액을 또 다른 걸로 교체했다고 의사에게 들었다. 가봐야 하는 건 맞는데,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자 제가 이래도 돼는 건지 혼란이 왔다.

정한이 말을 못 하게 된 상황, 몸이 엉망으로 상한 와중에 혼자 꽁꽁 숨기고 있었다는 거, 그런 자신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늑대의 몸으로 싸운 상황 모두 다 함께한 남준이다.

근데, 어떻게 단 한 번도 도움이 되지 못했을까.

이대로 자신이 다시 팔을 벌려 그 조그만 아이에게 사과하면, 천사나 다름없는 아이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스르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겠지. 그건 안 된다.


김남준 (27)
"... 정한아."


김남준 (27)
"그래도... 아저씨가 양심 있게 그런 짓은 안 할게."


김남준 (27)
"정한이한테 더 좋은 상대가 될 수 있게... 더 더 많이 노력해볼게. 꼭 그렇게 할게."

아이가 다시 상처 받는 건 절대로 싫었다. 남준은 주먹을 꽉 쥐며 발걸음을 옮겼다.

폐하께서 감히 공식 행사에 빠지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그걸 어기면서까지 정한을 안 보는 행위를 저지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정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도록, 다시 천천히 다가갈 생각이다.

"이로써, 하늘에 보내드립니다."

"라화랑 족 마지막 뱀파이어였던 변백현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태워 올립니다."

"부디, 편히 날아가시길."

"남은 생에서는 꼭, 행복하시길."


눈이 조금씩 내리는 횡량한 벌판에 뱀파이어들이 모두 모여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거대한 행렬의 가장 앞에는 흩날리는 약간은 밝은 갈색 머릿결을 가진 태형이 있었다.

왕이라는 지위에 맞게 꽤 화려한 망토를 어깨에 두른 태형. 그는 장례식을 지휘하는 이의 마지막 말과 함께 고개를 살짝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내 장례식을 진행하던 분위기는 조금씩 정리됐고, 하나 둘 장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는 이따금 태형에게 인사를 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가벼운 눈이 날리는 벌판에는 어느덧 일곱 명만이 모여 서 있었다.


문 빈 (23)
"백현 씨, 좋은 데 가시겠지?"


김석진 (27)
"당연하지."


정호석 (27)
"정말 좋은 분이셨으니까, 분명히 빛이 환한 곳에서 날아다니고 계실 거다."


김예원 (23)
"그러고보니, 백현 씨가 제대로 웃는 걸 본 적이 없네. 거기선 많이 웃으셨으면 좋겠다."


전정국 (22)
"보고 싶다... 백현이."

다들 한마디씩 내뱉다가 정국이 나지막히 말하자 입을 다물었다. 정국의 눈꼬리에 살짝 물이 맺혀 있었다. 그 천하의 전정국이, 울다니.


문 빈 (23)
"... 전정국, 눈물 흐른다. 닦아라."


전정국 (22)
"내가 그렇게 마음을 준 애는 정말 오랜만이었어."


김석진 (27)
"알지."


전정국 (22)
"어쩌면, 동갑은 말 그대로 처음이었을 지도 몰라."


정호석 (27)
"백현 씨한테도 넌 분명히 특별한 존재였을 거다."


전정국 (22)
"..."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김태형 (25)
"그러게."


전정국 (22)
"형도 그래?"


김태형 (25)
"... 응. 나도 그래."


김태형 (25)
"백현 씨가 이제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다."


김태형 (25)
"끝까지, 고맙고 죄송하네."


김석진 (27)
"넌 최선을 다했어."


김태형 (25)
"... 응."


김예원 (23)
"이제 들어갈까?"


문 빈 (23)
"난 들어갈래. 김예원, 지금 갈 거야?"


김예원 (23)
"응, 갈래."


전정국 (22)
"누나 가면 나도 가."


문 빈 (23)
"자식아, 눈물부터 닦아라. 마지막 길 그렇게 줄줄대면서 보내면 백현 씨가 퍽이나 좋아하시겠다, 응?"


전정국 (22)
"됐어... 가자."


정호석 (27)
"김석진, 우리도 가자."


김석진 (27)
"어?"

방황하는 석진이게 호석이 살짝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석진이 알았다는 듯 바지를 털며 일어났다.


김석진 (27)
"갈게, 너희 둘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들어와. 감기 걸려."

대답도 않는 태형과 은비를 두고 나머지 이들은 천천히 자리를 비켰다.

귀에 들리는 건 오직 거친 편인 바람 소리다.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힘없이 흩날렸다.

오래 있지 말랬던 석진의 말은 어느새 뒷전이었다. 둘 다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다 보니 어느새 한참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의 침묵이 이어지다가, 결국 태형이 제 망토를 벗어 은비의 어깨에 내려주며 살짝 그녀를 품에 넣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김태형 (25)
"분명 좋은 데 가셨을 거야."


황은비 (23)
"..."


김태형 (25)
"행복도 하실 거고."


황은비 (23)
"..."


김태형 (25)
"이제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마음껏 날개 펴고 날아다니기도 하시겠지."


김태형 (25)
"아, 아끼던 옛날 친구분들도 다 만나셨으려나."


황은비 (23)
"..."


김태형 (25)
"..."


김태형 (25)
"은비야."


황은비 (23)
"응."

태형이 살짝 허리를 숙이곤 앞만 휑하니 보고 있는 은비를 저와 마주보게 돌렸다. 여린 눈동자에 떨어지기 아슬아슬한 물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눈물을 참은 건지.


김태형 (25)
"오빠 봐. 은비야, 울고 싶으면 울어."


황은비 (23)
"아니야."


김태형 (25)
"..."


김태형 (25)
"은비야."


황은비 (23)
"응?"


김태형 (25)
"오빠가 하는 말 중에 틀린 거 있었나?"


황은비 (23)
"... 꽤 많았지."


김태형 (25)
"잊어라."


황은비 (23)
"뭐야, 그게."


김태형 (25)
"아무튼... 이번에 해주는 말은 믿으라고."


황은비 (23)
"오빠 말은 다 믿어."


김태형 (25)
"그럼 됐네. 은비야, 백현 씨는."


황은비 (23)
"알아."


김태형 (25)
"어?"


황은비 (23)
"..."

살짝 미소를 머금은 은비가 다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꽤 오랜 시간을 밖에 있었어서 그런지 양 볼이 봉숭아처럼 붉었다.

후, 숨을 쉬자 퍼지는 제 입김을 가만히 바라보던 은비는 곧 몸을 다시 태형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그의 품에 쏙 들어가며 말을 이었다.


황은비 (23)
"알아, 알아. 이제 백현이는 행복해야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만 해야지."


황은비 (23)
"..."

"누구 동생인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제 사람이 저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늘 밝던 그 사람의 미소가 이번만큼은 슬픈 기운을 더했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김태형 (25)
"당연하지."

태형은 은비를 꼭 안아주며 작게, 천천히, 그리고 동화책을 읽은 듯이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태형 (25)
"은비 너랑 백현 씨랑, 웃는 거 참 닮았을 거 같아."


황은비 (23)
"... 그래?"


김태형 (25)
"응. 그리고 방금 웃은 거, 은비야."


황은비 (23)
"응."

귀 끝이 시린 눈 오는 2월 쯤. 아마 올 초 겨울의 마지막 눈이지 싶었다. 태형은 발 아래 소복함을 살짝 밟으며 제 앞의 소중한 아이를 꼭 안았다.

이번 일로 너무 고생을 많이 하게 뒀다. 제가 모르는 사이 많은 고민과 당황에 빠졌을 제 연인에게 너무 미안했다. 무사히 마무리하긴 했지만, 그만큼 잃은 마음 아픈 것들도 꽤 있다.

틈이 없을 정도로 꽉 힘을 줘 은비를 감은 태형이 고개를 숙여 은비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작게 간지럽다고 투정이 들려왔지만, 태형은 아랑곳 않고 바로 속삭였다.


"예뻐, 예뻤어. 웃는 거 정말 예뻤어, 은비야."

"고생했어, 수고 많았어."

"내 옆에 여전히 있어줘서 고마워... 사랑해."

"백현 씨는 분명히 우리 보고 있을 거니까, 우리도 잘 지내는 모습 예쁘게 보여드리자. 알았지?"

"너무 고생 많았어. 이제 더 행복하자."


아직 완결 아닙니다! 그리고 꼭 드리고 싶었던 말인데요! 요새 내용 별론데, 계속 읽어주시는 모든 노을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많이 못난 작가라서 죄송해요. ㅠㅠㅠㅠㅠ

많이 부족하다는 거, 저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완결까지, 끝까지! 열심히 할게요. 결말이 예쁘게 나오는 그날까지!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힘 내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