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고 일어났더니 남자친구가 생긴 건에 대하여
W. 그쁨
2주가 지났다. 그 말은 즉, 김석진과 채여주가 연애를 시작한 지 꼭 15일 째 되는 날이었단 소리다.
솔직하게, 채여주는 이 연애가 오래 가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연애였다. 애정도, 사랑도 없이 그냥 술 처먹고 실수하는 바람에 생긴 애인…. 이렇게 말하니까 나 무지하게 쓰레기 같은데? 채여주가 생각했다. 사실 틀린 소리도 아니라 더 슬펐다.
아무튼, 채여주는 김석진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별로 없었다. 잘생기고, 성격 좋고(어쨌든 겉보기엔 그랬다. 채여주는 좀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돈도 많은, 그야말로 완벽한 연애 상대이지만, 사귀고 싶은 상대인가? 하고 묻는다면 어… 굳이? 하고 대답할법한, 그런 사람. 적어도 채여주에게는 그랬다. 배가 쳐 불렀네. 어디서 이유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채여주가 귀를 후비적거렸다. 근데, 그건 김석진도 마찬가지 아닌가?
"영화 볼래?"
전공 강의가 막 끝난 참이었다. 채여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석진을 올려다보았다. 늘 그랬듯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는 김석진의 얼굴에 미약한 기대감이 서려있었다. 좋아하는 감독 영화가 재개봉했거든, 답지 않게 들뜬 목소리로 영화 포스터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조금 옛날 영화긴 한데…, 하며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가는 김석진이 채여주는 조금 낯설었다. 뭐 얼마나 좋아하는 감독이길래…? 생각하다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봐요, 그럼."
"그럴래? 그럼 시간이…, 조금 남긴 한데,"
"밥 먹고 가면 딱이겠네요."
채여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러면 되겠다. 김석진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에 채여주는 여전히 어색함이 깃든 웃음을 내보였다. 그럼, 갈까?
에프
영화관 근처에 마땅히 먹을 게 없다며 김석진이 채여주를 데려간 곳은 평범해 보이는 양식집이었다. 인기 메뉴라는 통새우 로제 리조또는 채여주의 입에 꼭 맞았다. 채여주는 그릇을 싹싹 비웠다. 가리는 건 없지만 원체 입이 좀 짧다는 김석진은 토마토 파스타를 조금 남겼다. 계산은 김석진이 했다.
"제가 계산하려고 했는데요. 영화도 선배님이 예매하셨잖아요."
"음, 그럼 팝콘 사주면 되겠네."
"영화 보면서 뭐 안 먹는다면서요…."
"들켰네."
결국 팝콘 대신 영화관 내 카페에서 음료만 한 잔씩 샀다. 커피는 제가 살 거예요. 채여주의 단호한 말에 슬쩍 제 카드를 꺼내들었던 김석진이 더 고집부리지 않고 물러났다. 9,400원 입니다. 채여주가 계산을 마치고 마주한 김석진의 표정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평일 낮 시간대 영화관은 한산했다. 재개봉한 영화는 로맨스 영화였다. 영화 잘 안 보는 채여주도 제목 정도는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었다. 봤다는 사람마다 꽤 재미있었다는 평을 남겼었던 영화. 재개봉까지 할 정도면 인기가 제법 있었나 보지…. 그럼에도 널찍한 상영관 내부에는 고작 열명 남짓한 관객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스크린에서 적당히 떨어진 좌석에 앉으며 채여주는 생각했다. 로맨스라니, 그 김석진이 고른 영화 치고는 제법 의외인 구석이 있노라고. 흘긋 쳐다본 김석진의 표정이 들떠 보여서 더 그랬다.
영화는 김석진의 취향일지언정, 애석하게도 채여주의 취향은 아니었다. 채여주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영화에 통 집중하지 못했다. 애초에 때리고 부수고 싸우는 쪽이 더 취향이었다. '그 애는 널 참 좋아해', 남자 주인공이 대사를 내뱉는 것을 가만 듣다 채여주는 저도 모르게 김석진을 바라보았다. 스크린에 집중하는 그 모습을 보았다. 왜 나를 만나는 걸까. 통 취향이 아닌 영화 대신 잘난 옆태를 구경하고 있자니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튀어나왔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자꾸만 무언가를 했다. 그건 시답잖은 대화일 때도 있었고, 수줍게 내미는 손을 붙잡는 행동일 때도 있었다. 사랑, 그 형체 없는 단어를 입안으로 굴려보다 채여주는 앞에 앉은 커플에게로 시선을 주어 보았다. 머리를 맞대곤 소곤거리다 키득거린다. 붙잡고 있는 손이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평범한 연인의 모습임이 틀림없다. 그래, 평범한.
채여주는 충동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냥 건드려보기만 할 심산이었다. 뭘? 의자 손잡이 위에 가만히 얹어진 김석진의 손을. 그러면 어렴풋이라도 알 것 같았다. 이 속 모를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 아주 조금이라도. 채여주의 손이 김석진의 손을 톡, 건드리고 내려왔다. 짧은 마주침이었다. 차가운 김석진의 손이 작게 움찔거렸다.
"……."
채여주는 시선을 스크린으로 돌렸다. 주인공들이 입을 맞췄다. 애달프게 서로의 뺨을 쓰다듬고, 목에 팔을 감고, 허리를 끌어당겨 안는다. '사랑해'하는 진부한 대사가 흘러나왔다. 채여주의 시선이 다시금 스크린에서 떨어졌다. 텅 빈 팔걸이로 눈길이 갔다.
역시, 좋아해서 사귀는 것 같진 않았다.
에프
"영화 어땠어?"
"괜찮았어요."
"진짜?"
텅 빈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채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영화 자체는 제법 재미있었으니까. 단지 채여주의 취향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김석진이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
"난 또 재미없어서 내 얼굴만 보나 싶었지."
"…미친, 알고 있었어요?"
"시선이 너무 뜨거워서 모를 수가 없던데,"
"…아오…,"
채여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쪽팔려. 창피함에 목을 벅벅 문대는 채여주를 보고 김석진이 웃었다. 장난스레 들이미는 얼굴에 재밌어 죽겠단 기색이 역력했다. 채여주는 괜히 발걸음만 빨리했다. 홧홧 해진 얼굴이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여서 그랬다.
목적지도 없이 한참을 걸었다. 걷는 내내 김석진은 싱글벙글했다. 왜 봤어, 나? 영화 재미없었던 거 아냐? 보면서 무슨 생각 했어? 채여주의 양 뺨이 발갛게 물들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에는 김석진이 자꾸만 묻는 질문들이 한몫했을 것이다. 진짜 쪽팔려 뒤질 거 같다. 남 얼굴 쳐다보는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었다. 정작 관찰당한 사람은 싱글벙글 웃는 낯인데도…. 왜 보고 있었는지 안 알려줄 거야? 하고 묻는 김석진을 보며 채여주가 생각했다. …변탠가?
"그냥 봤습니다, 그냥."
"그런 것 치고는 눈빛이 뜨겁던데."
"뜨겁긴 개뿔이…, 진짜 그냥 봤다니까요? 보면서 잡생각이나 좀 했어요."
"그래? 무슨 생각 했는데?"
"선배님 참 잘생기셨단 생각이요."
"너무 영혼 없는 대답인데,"
바쁘게 걷던 채여주의 발이 느릿해졌다. 덩달아 김석진의 걸음도 느려졌다. 진짜 안 알려줘? 완전히 멈춰 선 채 김석진이 물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있는 얼굴로 채여주를 내려다보았다. 얄미웠다. 동시에 갈등이 일었다. 채여주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내내 채여주를 괴롭히던 질문 하나. 선배는 왜 나랑 만나요?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잘해주는 이유를 채여주는 몰랐다. 이대로면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채여주의 입이 달싹거렸다. 물어볼까? 스스로에게 한번 더 되물었다. 마른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텅 빈 영화관 좌석 팔걸이가 떠올랐다. 동시에 말갛게 웃어 보이는 김석진의 얼굴도. 채여주는 정말로 묻고 싶었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나랑 만나는 이유가 대체 뭔데요? 혹시,
나를 좋아해요?
"…다음에 말할래요."
"음, 그래. 꼭 말해줘."
묻지 못했다. 채여주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글쎄, 왜일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암만 생각해도 이유랄 게 없었다.
아니, 사실 채여주는 알고 있었다. 원하던 대답이 아니면 상처받을 것 같아서. 어쩌면 좋아해서 그랬다는 아주 뻔한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단지 김석진이 그 대답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라는 이유로 질문을 피했을지도 몰랐다. 모르겠다. 김석진에 대해 채여주는 아는 게 없었다.
채여주의 보폭에 걸음을 맞춘 김석진이 앞서 걸어갔다. 두 발자국의 거리가 생겼다.
ක⃛
그로부터 2주가 더 지날 때 까지도 김석진과 채여주는 헤어지지 않았다.
어김없이 강서영의 자취방엔 채여주와 이유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험이 코앞인 터라 공부를 좀 해보자는 목적으로 모인 자리였는데, 당연하게도 공부는 뒷전이었다.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할 손은 젓가락 쥐고 라면 면발 건지고 있었고, 가만히 있어야 할 조동아리만 라면 면발 삼키며 끊임없이 수다를 내뱉었다.
잘 만나고 있어. 김석진과 어떻게 되어가느냐는 강서영의 물음에 채여주가 대답했다. 이유민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하도 질색을 하길래 난 빨리 헤어질 줄 알았지. 하는 말에 채여주가 웃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건 채여주도 마찬가지였다.
"사귀는데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진짜 뭔 꿍꿍이가 있어 보이거나 하진 않았고?"
"막 양다리 걸치고 그런 거면 어떡해."
채여주가 고개를 저었다. 시작이 찜찜한 연애긴 했다만 김석진은 채여주의 애인 노릇을 톡톡히 해내는 중이었다. 그 얼굴이 연애한다고 어디 망가질 얼굴인가. 여전히 인기도 많고, 여전히 고백도 많이 받고, 여전히 에타에는 김석진의 이야기가 오르내리고 있었지만 김석진은 그런 것들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되려 여자친구 있다는 말로 전부 내쳤으면 모를까. 세컨드여도 괜찮다는 말까지 들어봤단다, 하는 채여주의 말에 강서영과 이유민이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로? 와, 미친 거 아냐? 세상에 진짜 별 사람이 다 있네…. 하는 그들에 채여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잘 거절했으니까 된 거지.
"아니면 몸만 보고 만난다거나,"
음, 전혀. 채여주가 대답했다. 원나잇으로 시작된 사이라고는 해도…. 한 달이 지났는데 잠자리를 가지긴 커녕 손도 아직이다. 잡으려는 낌새도 없었다. 그건 그거대로 이상한데? 하는 이유민의 말에 나름대로 여주 신경 써주느라 그런 거 아닐까? 하고 강서영이 대답했다. 자기도 나름 첫 시작이 신경 쓰였다거나, 하는 말들을 가만히 듣던 채여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됐든, 몸만 보고 만나는 건 아닌 게 확실했다. 그럼 됐지 뭐.
"그래, 그럼 됐지 뭐…. 하긴, 아직까지 네가 멀쩡히 만나고 있는 걸 보면 김석진 선배가 어지간히 괜찮은 사람이긴 한가보다."
채여주는 그 말에는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괜찮은 사람? 맞다. 적어도 근 한 달간 채여주가 본 김석진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뭐 부족한 점이 있어야 트집을 잡던 말던 하지. 채여주가 생각했다. 여전히 꺼림직한 구석이 있기는 했다. 그럼에도 김석진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 채여주는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어쩌다 보니 차지한 김석진의 연인 된 입장에서 느껴본 바로는 그랬다.
"이 정도면 진짜 석진 선배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닐까?"
채여주는 생각했다. 그건 정말 아닌 것 같아. 지난 2주간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면 진짜 그랬다. 채여주는 앞에서 신나게 떠들어대는 강서영과 이유민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입을 열고는,
"헤어지려고,"
"…어? 갑자기?"
"뭐야, 뭔 일 있었어?"
냅다 폭탄을 던졌다. 강서영과 이유민이 화들짝 놀라 라면 먹던 젓가락도 던져버리고 채여주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슨 일? 있었다. 그것도 채여주의 심경을 아주 복잡하게 만든 사건이. 채여주가 그간 있었던 일을 가만히 되짚어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또 속이 들끓는 기분이라 에라, 하고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짜증 나, 중얼거리는 채여주에 강서영과 이유민이 서로의 팔뚝을 퍽퍽 쳐댔다. 웬일이니, 잘 사귀고 있댔으면서 진짜 무슨 일 있었나 봐…. 그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며 채여주가 몸을 뒤로 기대고는 입을 열었다. 야, 들어봐 봐.
2주 전에 말이야…,
බ⃜
2주 전의 채여주는 이렇게 생각했다.
김석진과의 만남이 애정을 기반으로 한 만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난 뒤에도 김석진과 채여주의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사이가 나빠진다거나, 갑자기 김석진을 대하는 채여주의 태도가 어색해진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고, 데이트를 하고, 연락을 이어가는, 어디 한 군데 모자라면서도 그럭저럭 괜찮은 연애를 이어가고 있었단 소리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채여주가 김석진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다는 아주 사소한 것 하나 뿐이었다.
이맘때쯤의 채여주는 언젠가 한번 날을 잡은 뒤 김석진을 탈탈 털어볼 생각으로 가득했었다. 그러니까, 일전에 차마 묻지 못했던 이 연애를 시작하게 된 이유라던가, 술에 만취했던 그 날 있었던 일 A to Z라던가. 아무튼 채여주와 김석진의 사이를 평범한 관계로 정의 내릴 수 없게 만드는 그들 사이의 모든 것에 대해 파헤쳐 볼 작정이었다. 그래, 한마디로 '대화'라는 걸 해볼 생각이었단 뜻이다.
문제가 있다면, 좀처럼 그 '대화'라는 걸 할 기회가 오지 않았다는 것 하나였다. 비단 채여주가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김석진과 채여주가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한 연애를 하는 동안에도 시간이 착실히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즉,
"전공 과제 또 있는 거 실화냐?"
"교수 새끼들, 내가 지 수업만 듣는 줄 알지…."
"…야, 국제경제학 시험범위 추가됐다는데?"
"…아 존나 빡쳐…."
지랄맞게도, 시험 기간이었다…. 마치 시험기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미친 듯이 쏟아지는 과제와 쪽지시험, 그리고 기말고사 등에 깔려죽기 직전이었던 대학생 둘에게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시간 따위는 없었다. 자연스레 채여주의 원대한 계획은 무기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대화 따위가 아닌 데이트 코스 바꾸기 따위밖에 없었기에.
"도서관은 자리 없겠죠?"
"아마도."
"…카페라도 가실래요?"
"좀 먼 곳으로 가자, 그럼."
근처 카페도 사람 많을 것 같아서, 김석진의 말에 채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트북과 전공 책을 바리바리 챙겨든 채여주가 조용히 김석진의 차에 올라탔다.
그것이 김석진과 채여주가 과제를 위해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한적한 카페에 자리를 잡게 된 경위였다. 확실히, 조용해서 좋긴 하네…. 노트북을 키며 채여주가 생각했다.
"케이크 먹을래?"
"네. 근데 제가 살 거예요, 선배님."
"음, 얻어먹는 건 익숙하지가 않아서."
"이참에 좀 익숙해져 보시던가요…."
김석진의 얼굴을 본 카페 알바생이 넋을 놓고 있는 동안 채여주는 고심 끝에 조각 케이크 하나랑 카페모카를 골랐다. 김석진은 아메리카노 한 잔만 주문했다. 잘 먹을게요. 꼴랑 사천 원짜리 커피 한 잔에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는 꼴이 뭔가 아니꼬워서 채여주는 생각했다. 다음엔 내가 밥도 산다, 진짜로.
그 투닥거림을 끝으로 그들이 카페에서 한 일이라고는 정말로 과제밖에 없었다. 포크 달그락거리는 소리나 얼음 달그락 거리는 소리, 노트북 키보드 소리를 제외하곤 둘 사이에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채여주가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반절도 못했는데 벌써 커피가 동이 났다. 괜히 얼음만 와그작와그작 씹어대던 채여주가 맞은편에 앉은 김석진을 쳐다봤다. 이제는 공대생 안경으로 전락해버린 동그리 안경이 잘 어울렸다. 동그란 안경 너머 새카만 눈동자가 바쁘게 노트북 화면을 훑고 있었다.
김석진은 채여주와 눈이 마주칠 때면 항상 눈꼬리를 접어 가며 웃었다. 오늘도 그랬다. 얼음을 입안에서 굴리며 김석진을 가만 바라보던 채여주와 노트북에서 시선을 뗀 김석진의 눈이 마주쳤을 때 김석진은 어김없이 빙긋 웃었다.
"다 끝났어?"
"…그건 아니고, 커피 더 시킬까 해서요. 선배도 뭐 더 드실래요?"
"음, 아니. 난 괜찮아. 주문하고 와."
텅 빈 채여주의 잔과는 달리 김석진의 잔에는 아직 반절 가량의 음료가 남아있었다. 채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을 챙겼다. 김석진이 내민 카드는 뺏어서 다시 그의 주머니에 쏙 넣어주었다. 채여주는 김석진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는 카운터로 걸음을 옮겼다.
음료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하는 알바생의 말에 채여주는 계산을 끝마치고 곧바로 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카운터 앞에서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커피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카페의 소음을 배경 삼아 남은 과제를 끝내는 데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지를 계산하던 채여주는 끝도 없는 과제 목록들을 떠올리다 이마를 짚었다. 아오, 이래서야…. 김석진과의 대화는 개뿔, 과제를 하느라 삼일 밤낮을 새야 할 것이 뻔했다. 개 같은 학교, 채여주가 중얼거렸다.
"…누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하는 알바생의 말과 동시에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채여주가 고개를 돌렸다. …김태형? 제 이름이 들려오자 아주 말간 웃음을 지어 보이는 얼굴이 채여주의 시야 안으로 불쑥 나타났다. 여주 누나! 반가워 죽겠다는 듯한 김태형의 목소리에 채여주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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