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 빙의글] 그 집 남자들

1화. 그 집에 들어가다

캐리어 바퀴가 보도블록 틈에 걸릴 때마다 여주는 괜히 짜증이 났다. 원래 살던 원룸에서 당장 나와야 한다는 연락을 받은 건 고작 사흘 전이었다. 집주인은 건물이 팔렸다고 했고, 보증금은 정리되는 대로 주겠다고 했다. 말은 쉬웠다. 하지만 여주에게 사흘 안에 새 집을 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부동산을 돌고, 친구들에게 연락하고, 잠깐 머물 곳이라도 찾으려고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연락한 건 엄마의 오래된 지인이었다. 그리고 그 지인이 알려준 주소가 바로 지금 여주가 서 있는 이 고급 빌라였다.

 

 

“여기가 맞나.”

 

 

여주는 휴대폰 화면과 눈앞의 건물을 번갈아 봤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로비는 조용했고, 바닥은 너무 반짝여서 캐리어를 끌고 들어가는 것조차 민망했다. 잠깐만 머무는 거라고 했다. 길어야 2주. 방 하나가 비어 있고, 집주인 쪽에서도 괜찮다고 했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는 사람 집에 들어가 지내는 건 이상했다. 여주는 한숨을 작게 내쉬고 인터폰 앞에 섰다. 손가락이 초인종 버튼 위에서 잠깐 멈췄다. 돌아갈 곳도 없으면서, 이상하게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문이 먼저 열렸다. “혹시 윤여주 씨?”

문 안쪽에서 나온 남자는 생각보다 키가 컸다. 편한 니트 차림인데도 단정했고, 얼굴에는 낯선 사람을 맞이하는 어색함보다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침착함이 먼저 보였다. 여주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들어와요. 밖에 춥죠.”

남자는 자연스럽게 여주의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여주는 반사적으로 “아, 제가 들게요” 하고 말했지만, 그는 이미 캐리어를 안쪽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었다. “괜찮아요. 바퀴 소리 들으니까 무거워 보이던데.” 별말 아닌데 이상하게 긴장이 조금 풀렸다.

 

 

여주는 조심스럽게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거실 한쪽에는 커다란 소파가 있었고, 맞은편에는 낮은 테이블과 책장이 있었다. 누군가 막 먹다 둔 컵라면 용기가 테이블 위에 있었고, 그 옆에는 반쯤 접힌 담요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고급 빌라라고 해서 차갑고 정리된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사는 집 같았다.

 

 

 

 

“나는 석진이에요. 이야기 들었죠?” “네. 잠깐만 신세 지겠습니다.”

여주가 허리를 숙이자 석진은 조금 난처한 듯 웃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그냥 편하게 있어요. 방은 안쪽에 준비해뒀고, 욕실은 복도 끝에 있는 거 쓰면 돼요. 주방은 아무 때나 써도 되고, 냉장고에 있는 것도 먹어도 돼요. 대신 이름 써 있는 건 건드리면 안 됩니다. 그건 전쟁 나요.” 여주는 그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거실 안쪽 방문이 벌컥 열렸다.

 

 

“형, 택배 왔어?” 문틈으로 나온 남자는 머리를 대충 말린 듯 수건을 목에 걸고 있었다. 그는 거실에 서 있는 여주를 보고 그대로 멈췄다. 눈이 동그래졌다가, 곧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 새로 온 사람?” 석진이 한숨을 쉬었다. “말을 꼭 그렇게 해야 돼?”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

 

 

남자는 여주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손을 가볍게 들었다. “정국이에요.” “윤여주입니다.” “진짜 여기서 살아요?”

너무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여주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석진이 정국의 등을 툭 쳤다. “잠깐 머무는 거야. 말 좀 예쁘게 해라.” 정국은 맞은 등을 문지르며 작게 웃었다. “아니, 신기해서 그렇죠. 우리 집에 누가 들어오는 거 처음이라.”

 

 

우리 집. 그 말이 여주에게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맞다. 여긴 남의 집이었다. 여주는 다시 긴장한 얼굴로 캐리어 손잡이를 꼭 잡았다. “불편하시면 제가 다른 데 알아볼게요.” “아니요.” 대답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렸다.

 

 

 

 

거실 끝, 창가 쪽에 앉아 있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주는 그제야 그곳에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두운색 셔츠에 편한 바지를 입은 남자는 무릎 위에 책을 펼쳐두고 있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얼굴이 반쯤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시선이 갔다. 그는 여주를 한참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편하지 않아요.”

 

 

그 말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들렸다. 여주는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아니, 낯설지 않다기보다는 괜히 가슴 한쪽이 불편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물건을 갑자기 마주친 것처럼.

 

 

석진이 분위기를 끊듯 말했다. “태형이야. 말수는 별로 없는데 나쁜 애는 아니에요.” “형, 그 소개가 더 나빠 보이는데요.”

정국이 중얼거리자 석진은 가볍게 웃었다. 여주는 태형에게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태형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여주의 얼굴을 보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짧은 대답 이후로 거실에는 이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국은 괜히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고, 석진은 여주의 캐리어를 다시 끌며 복도 쪽으로 걸었다. 여주는 태형의 시선이 아직도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것 같아 괜히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방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작은 침대와 책상, 옷장 하나가 전부였지만 며칠 지내기에는 충분했다. 창문을 열면 옆 건물 벽이 보였고, 책상 위에는 새 수건과 칫솔,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여주는 그걸 보고 조금 멈칫했다. “이거 누가 준비해주신 거예요?” “태형이가요.” 석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제부터 계속 신경 쓰더라고요. 손님 오는데 방 너무 비어 있으면 불편하지 않냐고.”

 

 

“저를 아세요?” 질문은 생각보다 빨리 튀어나왔다. 석진은 문가에 서서 여주를 바라봤다. 아주 짧은 순간,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하지만 곧 평소처럼 웃었다. “오늘 처음 봤죠.” “아…” “왜요? 어디서 본 것 같아요?” 여주는 고개를 저었다. 본 적은 없었다. 분명히 없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 집이, 이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아니에요. 그냥요.”

 

 

석진은 더 묻지 않았다. “짐 풀고 쉬어요. 저녁은 같이 먹어도 되고, 불편하면 방으로 가져다줄게요.”

“아니에요. 같이 먹을게요.” “그래요. 그럼 조금 있다 불러줄게요.” 문이 닫히자 여주는 침대 끝에 앉았다. 조용한 방 안에서 갑자기 현실감이 몰려왔다. 낯선 집, 낯선 남자 셋, 그리고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야 하는 자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무섭다기보다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저릿하다는 거였다. 여주는 책상 위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었다. 병뚜껑에는 작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비 오는 날엔 창문 너무 오래 열어두지 마요.

 

 

여주는 메모를 한참 바라봤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적어둔 걸까. 그리고 왜 자신은 이 문장을 보자마자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드는 걸까.

 

 

 

 

저녁 식사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석진은 된장찌개를 끓였고, 정국은 반찬을 꺼내다 말고 계속 뭐가 어디 있는지 몰라 석진에게 혼났다. 태형은 말없이 수저를 놓았다. 여주는 어색하게 식탁 끝에 앉았다. 정국은 그런 여주를 보며 젓가락으로 반찬 접시를 밀어줬다. “이거 먹어요.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근데 말 너무 딱딱하게 한다.” “처음 뵙는 사이니까요.”

 

 

정국은 그 말에 잠깐 웃음을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곧 그는 다시 장난스러운 얼굴로 돌아왔다. “그럼 친해지면 말 편하게 해요?” “그건 생각해볼게요.” “오. 철벽이네.” 석진이 웃음을 터뜨렸고, 여주도 아주 조금 웃었다. 태형은 그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여주의 물컵이 비면 조용히 채워주고, 여주가 매운 반찬을 피해가자 그 접시를 조금 멀리 밀어뒀다. 여주는 그 행동들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신경이 쓰였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여주는 캐리어를 열었다. 옷을 정리하고, 세면도구를 꺼내고, 충전기를 꽂았다. 별것 아닌 행동을 반복하다 보니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때 방문 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자요?” 태형이었다. 여주는 급하게 문을 열었다. 태형은 문 앞에 서서 작은 담요 하나를 들고 있었다. “밤에 추울 수 있어서요.” “아, 감사합니다.” 여주가 담요를 받으려 하자 태형의 손끝이 아주 잠깐 여주의 손등에 닿았다. 별일 아닌 접촉이었다. 그런데 여주는 반사적으로 손을 움찔했다. 태형도 그걸 봤는지 손을 바로 거뒀다.

 

 

“미안해요.”

“아니에요. 제가 놀라서…”

“여전히 그러네요.”

 

 

여주는 눈을 들었다. “네?” 태형은 잠깐 말이 멈춘 사람처럼 여주를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시선을 피했다. “아니에요. 푹 쉬어요.” 그는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여주는 닫힌 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여전히 그러네요. 그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여전히이라니. 마치 예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방 안으로 돌아온 여주는 침대에 앉아 담요를 내려다봤다. 부드럽고 따뜻한 담요에서 희미하게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이상하게 익숙한 냄새였다. 여주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아주 오래된 장면 하나가 스치듯 지나갔다.

 

 

비 오는 날, 낡은 대문, 누군가가 내밀던 우산. 그리고 낮은 목소리. 괜찮아. 여기 있으면 돼.

 

 

여주는 숨을 삼켰다. 하지만 장면은 금세 사라졌다. 기억이라고 하기엔 너무 흐릿했고, 착각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다.

그날 밤, 여주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낯선 집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 집이 낯설어서가 아니라, 이상하게 익숙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걸. 문밖 거실에서는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정국이 먼저 말했다. “형, 진짜 말 안 할 거야?” 석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말해봤자 혼란스러워져.” 잠깐의 침묵 뒤, 태형이 대답했다. “이미 혼란스러워 보이던데.” “그래도 기다려.”

 

 

여주는 문 앞까지 다가갔다. 들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발이 멈추지 않았다. 세 사람의 목소리는 낮았고, 문 너머라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태형의 말만큼은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들렸다.

 

 

“진짜 기억 못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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