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주말. 유하민이 온 뒤로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네, 하고 생각하며 나는 내 침대 위에서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OTT 신작 목록을 뒤적이다가 며칠 전부터 기다리던 영화가 올라온 걸 발견했다. 상체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어!”
좋아하는 배우가 주연으로 나온 액션 영화였다. 개봉했을 때부터 보고 싶었는데 시험 기간과 겹치는 바람에 극장에서는 놓친 작품이었다.
흠, 보고 싶은데. 혼자 보기엔 재미가 없단 말이지. 난 늘 영화를 혼자 본 적이 없으니까.
주변에 사는 친구는 없고, 예준이는… 어쩐지 얼굴을 잘 못 보겠고.
…역시 그 수밖에 없나.
나는 방을 나와 옆방 문을 두드렸다.
“유하민.”
안에서 짧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하민은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하민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왜?”
“너 오늘 뭐 해?”
“별거 안 하는데.”
“그럼 나랑 영화 볼래?”
하민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랑?”
“응. 보고 싶었던 영화가 오늘 올라왔어. 집에서 보려고.”
말하고 나니 괜히 민망해졌다.
뭐지. 영화 하나 보자는 건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거야.
“아, 집에서.”
“싫으면 말고.”
“누가 싫대?”
하민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거실로 나왔지만 TV 앞은 이미 엄마와 아빠가 차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주말마다 챙겨 보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과자와 과일까지 펼쳐져 있었다.
리모컨을 넘겨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엄마, 이거 언제 끝나?”
“두 시간은 더 하지 않을까?”
두 시간.
영화 한 편을 다 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잠시 고민하는데 하민이 옆에서 말했다.
“노트북으로 볼래?”
“화면 작잖아.”
“영화 보기에는 괜찮아. 누나만 괜찮으면 내 방에서 봐도 되고.”
하민이 잠깐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불편하면 노트북만 빌려줄게.”
배려해 주는 걸까? 표정은 아무 변화가 없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괜시리 쿨한 척 대답했다.
“뭐가 불편해. 같이 보지 뭐.”
하민은 가만히 나를 보더니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부엌에서 콜라와 뜯은 봉지과자를 쟁반에 놓곤 하민의 방으로 향했다.
그새 하민은 책상 위에 있던 노트북을 가져와 침대 위에 놓고, 벽 뒤에는 큰 베개를 놓아 세팅해두었다. 내가 그의 오른쪽에 앉자 하민은 침대용 작은 걸상을 위에 올려 노트북을 올렸다. 그 앞에 쟁반을 두는데 하민이 옆에 있던 푹신한 쿠션을 내게 건네주었다. 자연스레 그 쿠션을 받아 품에 끌어안았다.
아, 유하민 냄새. 같은 샴푸, 같은 바디워시를 쓰는데도 나랑은 좀 향기가 다른 것 같아. 슬쩍 하민을 바라보는데 별생각도 없어 보여. 그저 인터넷 창을 열고 OTT에 접속해 로그인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이거, 좀 사귀는 사이 같지 않나. 큼. 헛기침을 하는데 하민이 날 돌아봤다.
“왜?”
“누나 보려는 영화 뭔데.”
“아, 내가 틀게.”
노트북의 터치패드로 오른손을 뻗는데, 몸이 기울어져 어깨가 맞닿았다. 으아, 나 이제 이런 것도 의식이 되나 봐. 두근두근 떨리는 건 티를 안 내면서, 나는 영화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다행스럽게 영화가 시작되자 금세 다른 생각은 사라졌다.
시작부터 추격 장면이 이어졌다. 자동차가 뒤집히고 건물이 무너질 때마다 몸에 힘이 들어갔다. 기다리던 배우가 처음 등장하자 나도 모르게 하민의 팔을 두드렸다.
“쟤가 내 최애야.”
“안 궁금해.”
“잘생겼지?”
“아니.”
그의 퉁명스러운 대답은 사실 잘 들리지도 않았다. 영화가 시작한 지 몇 분 되지도 않아 과자와 콜라가 동났다. 나는 더 집중하기 위해 쿠션을 끌어안고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화려한 액션씬이 끝나고, 조연들의 대화가 오고갔다.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여러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부터, 별로 안 궁금한 조연들의 러브씬까지. 조금 지루해지자 눈이 반쯤 감겼다. 내 최애는 이제 더 안 나오는 건가. 그럼 의미가 없는데.
그러곤 어느 순간부터 장면이 듬성듬성 끊기기 시작했다. 뒤이어 다시 총성이 들리고 시끄러운 장면은 재개된 듯했으나, 역시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쿠션 위로 고개를 조금 기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스르르 눈이 전부 감겼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침대 위 창문으로 주황빛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어깨까지 이불이 덮여 있었고, 영화를 틀어놓았던 노트북과 가져왔던 쟁반은 어느새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아.
나 잠들었구나.
몸을 일으키려다 옆에 누워 있는 하민을 발견했다.
얘도 잔 건가? 이불은 얘가 덮어줬겠고….
하민은 나를 향해 돌아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팔로 베개를 만들고, 나머지 한쪽 손은 내게 안 닿게 제 배 언저리에 두고 있었다. 저돌적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이런 면도 있네. 솔직히 내 허리 감고 있을 줄 알았다.
평소에는 항상 눈을 똑바로 마주쳐 와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고 있으니 속눈썹이 제법 길었다.
미간에도 힘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는 얼굴은 생각보다 순해 보였다.
코도 오뚝하고. 피부도 곱고. 무슨 여자애 같네.
조금만 움직여도 얼굴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하민이 숨을 내쉴 때마다 코끝 근처로 희미한 바람이 스쳤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도 알 것 같았다. 나 진짜 얘를 좋아하는 게 맞나 봐.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제서야 확신이 들었다. 어쩐지 그를 보고 있는 내 눈이 반짝일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하민의 눈이 열렸다.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헉.”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 나 언제 잠들었대!”
목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커졌다. 하민은 누운 채 아무 말 없이 나를 올려다봤다.
“영화는? 다 끝났어?”
“…응.”
잠긴 목소리가 낮았다. 그르릉거리는 것 같은, 마치 하울링 같은 목소리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살짝 부시시한 검은 머리칼에, 잠결에서 깨서 미처 다 뜨지 못한 눈은 그윽했다. 검은 반팔 아래로 보이는 단단한 팔뚝에, 날 올려보는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시선까지.
야, 너 지금 굉장히 자극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거, 알아?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큼큼 소리를 내며 목을 다듬곤 고개를 돌렸다.
“배고프다. 나가자.”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하민이 내 팔을 붙잡았다.
“으앗!”
팔이 뒤로 당겨졌다.
균형을 잃은 몸이 다시 침대 위로 엎어졌다. 손바닥으로 침대를 짚기도 전에 하민의 팔이 등 위로 둘러졌다.
그대로 하민의 품에 안겼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하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길게 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아아…….”
뭐야.
얘 왜 이러지?
막 잠에서 깨서 아직 정신이 덜 든 건가.
등을 감싼 팔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밀어내려면 밀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침대 시트만 살짝 움켜쥐었다. 두근, 두근. 심장소리가 들렸다. 이건 내 심장소리일까 아니면 얘 심장소리일까.
한동안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민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하민도 나를 따라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넘어갔는지 방 안은 푸른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민은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를 봤다.
“무신경한 건지, 무심한 건지.”
하민은 그 말만 남기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배고프다며.”
하민은 두 걸음 만에 방문 앞으로 가, 곧장 문을 열곤 나갔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는 혼자 침대 위에 남아 조금 전까지 하민이 누워있던, 우리가 껴안은 채로 있던 침대를 내려다봤다.
아직도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걸 모르는구나.
바보.
내가 왜 가만히 안겨 있었겠어. 자기도 무방비했으면서.
아직도 단단한 팔이 내 등을 감쌌던 감촉이 선명한데. 어깨 부근을 손으로 문지르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밝은 거실로 향했다.
5화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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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먼저 영화를 보자고 한 건 처음이었다.
“나랑?”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혹시나 했다.
지금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 않다던가, 주말에 둘이 같이 영화를 보자고 하는 데 다른 뜻이 있다던가.
그런 기대를 아주 잠깐 했다. 심지어, 내 방에서 영화를 보겠다고. 이건 어디에 물어봐도 그린라이트라며 꺅꺅거릴 전개 아닌가. 후, 자꾸만 마음이 들떴다. 가라앉히기가 쉽지가 않다.
그리고 누나가 재생한 영화의 첫 장면에서 자동차가 폭발했다.
그럼 그렇지.
로맨스는커녕 시작한 지 오 분도 안 돼서 사람이 창문을 깨고 건물 밖으로 뛰어내렸다.
나는 노트북 화면을 보면서 짧게 숨을 내쉬었다. 순식간에 표정과 마음이 건조해졌다. 아마 누나는 모르겠지만.
진짜 무신경한 사람이다.
그것도 모르고 누나는 좋아하는 배우가 나왔다며 신이 나 있었다.
“쟤가 내 최애야.”
내 팔을 두드리는 손길에 시선이 저절로 옆으로 향했다.
안 궁금해.
속으로 생각했던 말은 꽤 퉁명스럽게, 솔직하게 입 밖으로 나갔다.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신경 쓰여 옆을 쳐다보는데 상처 받기는 개뿔, 그냥 집중해서 영화만 보고 있었다.
진짜 몹쓸 여자네.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모르겠고, 온 신경이 옆에 이 무신경한 여자에게로 쏠려 있었다. 영화 내용은 뭐, 그냥 평범한 히어로 액션 영화였다.
조금 지루해지는 부분이 나오자 누나는 곧장 집중력이 흐려졌다.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눈을 감은 채 쿠션에 볼을 묻고 있었다.
“누나.”
작게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진짜 잠들었네.
액션 영화를 보자고 해놓고 절반도 못 버텼다.
무신경하고 무심한데 무방비하기까지. 후, 한숨을 쉬며 노트북의 소리를 줄였다. 그래도 깨지 않기에 침대 위에 거치적거리는 노트북과 걸상, 쟁반을 모조리 치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내 침대에서, 좋아하는 여자가 자고 있다.
제법 자극적인 상황이었다. 이 누나는 그걸 알까.
침대 끝에 밀려 있던 이불을 끌어와 몸 위로 덮어줬다. 그리고 그 옆에 나도 누웠다. 팔을 뻗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정도만 옆으로 치워줬다.
날 믿는 건가.
되게 안일하네.
눈을 감고 있으니 평소보다 더 어려 보였다. 새액, 새액. 조용한 숨소리만 귓가에 울렸다.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던 손은 저도 모르게 손이 입가에서 멈췄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조금씩, 얼굴이 가까이 기울어졌다.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근대는 커다란 심장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입을 열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누나의 입술이 바로 앞에 있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닿을 거리.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이내 떨리는 숨이 입술 사이로 빠져나가고, 나는 얼굴을 뒤로 뺐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후, 한숨을 쉬곤 눈을 감았다 떴다. 자리를 비켜줄까 싶어 방문을 바라봤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내 앞에서는 매번 도망치면서 내 침대에서는 이렇게 편하게 자는 게 괘씸했다.
얼굴이나 더 보고 있어야지.
누나를 마주 보는 방향으로 누워 잠든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예쁜데 귀엽고 다 한다니까.
한 손으로 셀프 팔베개를 하고 나니 다른 손을 둘 곳이 없어 그냥 내 배 위에 얹었다. 이렇게 얼굴 보는 건 처음인데. 꼭 꿈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끝으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
눈을 떴을 때 누나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잠에서 막 깬 탓인지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누나의 숨이 닿는 거리도, 조금씩 흔들리는 눈동자도 전부 또렷하게 보였다.
잠에서 막 깬 심장이 세게 뛰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놀라서 달아날 게 뻔했으니까.
예상대로 누나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헐레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 나 언제 잠들었대!”
허둥대는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졌다.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선명히 새겨졌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머리를 매만지고는 몸을 일으킨다.
“배고프다. 나가자.”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다. 얇은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누나의 몸이 침대 위로 넘어지자 그대로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누나의 몸이 굳었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밀어내지는 않는다.
하.
내 앞에 있는 흰 목덜미를 확 깨물어버릴까, 생각했다.
무슨 생각으로 내 옆에서 잠들고, 무슨 생각으로 자는 얼굴을 들여다본 건지.
나 혈기왕성한 17살 남자애라고. 지금도 제법 아랫배가 저릿하다고.
어깨에 얼굴을 묻곤,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조금만 더 안고 있으면 놓기 싫어질 것 같았다.
팔에 들어간 힘을 천천히 풀었다.
누나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나도 따라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방 안에 남아 있던 노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무신경한 건지, 무심한 건지.”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다음에도 이렇게 무방비하게 굴면.
그때는 오늘보다 더 솔직하게 굴어줄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