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N G에이중그리고
18호
W. 설하
"아무리 방치됐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경비병 한 명이 없을 수가 있냐,"
"네가 그렇게 큰소리로 떠들다간 없던 경비병도 불러 모으겠지."
"아니, 아무도 없다니까?"
"보통 공포영화에서 너 같은 캐릭터가 제일 먼저 죽잖아."
"…진짜 재수 없게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네가 그러면 진짜인 것 같잖아…."
김태형과 민윤기의 대화를 듣던 정호석이 숨을 죽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둘이 언제부터 저렇게 죽이 잘 맞았더라-,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보다 더 아래라더니, 밑으로 이어진 계단이 끝도 없이 길었다. 심지어는 계단을 밝히는 불 하나 없이 방치된 채라, 어디까지 이어져있는지 모를 계단을 안전하게 내려가기 위해 우리는 정호석의 마법에 시야를 의존해야 했다. 허공에 둥둥 떠있는 라이트 볼(Light Ball)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다 늦은 새벽에 굳이 도서관에 올 사람이 없기도 했거니와, 지하보다 더 아래 있는 장소를 아는 학생이 있을 리가 없다는 확신 때문인지, 도서관의 지하를 지키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따금 아카데미 순찰을 위해 도서관 건물 근처를 알짱거리는 경비병 한두어명만이 왔다 갔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우리는 별다른 방해 없이 지하에서부터 금서 보관서로 이어지는 계단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방치 수준이 아니라, 그냥 이 장소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린 거 아닐까? 아카데미 사람들이 전부."
"…거미줄…."
"앞에 봐라. 그러다 다친다."
그리 넓지 않은 원형 계단이 다섯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얼마나 아래로 내려갔을까, 선두에 있던 민윤기가 멈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길고 긴 계단의 끝이었고, 주욱 이어진 복도의 끝자락에 자그마한 문 세 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복도였다. 민윤기가 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열쇠는, 하난데."
"일단 가 보자. 혹시 모르니까."
고풍스러운 조각들로 가득한 복도를 망설임 없이 지나갔다. 책에서만 봤던 왕국 시대의 복도 양식과 매우 흡사했다. 하기야, 아카데미가 지어진 지 500년이 넘어간다고 들었다. 크레아 왕국 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니 그 시대의 양식이 남아있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것만 빼면 말이다.
세 개의 문은 겉보기엔 차이점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똑같은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목재 문. 복도와는 다르게 어쩐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작은 문이었다. 키가 꽤 큰 편인 김태형이나 전정국이 지나가려면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의 크기였다.
"어디가 금서 보관소로 이어지는 문인지 알아?"
"그거까진 모르겠군. 내가 아는 건 '아카데미 도서관 지하보다 더 아래쪽에 금서 보관소가 있다'라는 게 전부다."
"함정일 수도 있고, 문 너머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함부로 만지는 건…, 야, 유, 율리아!"
수상한 기운이 폴폴 풍기는 문이었지만 어쩐지 위험한 느낌이 드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중앙에 있던 문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뒤에서 김태형이 놀라 소리를 빼액-, 지르는 게 들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끼익, 하는 낡디낡은 소리를 내며 문이 살짝 열렸다. 연다? 하는 내 말에 김태형과 정호석은 어쩐지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전정국을 보고 나는 문을 활짝 열었다.
"……."
"…와,"
"…설마, 이게 다 금서는…, 아니겠지…?"
그 앞으로 펼쳐진 장관에 우리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만했다. 그 문 너머로 보인 것은 반쯤 어둠에 잠긴 장소였고, 라이트 볼에 의한 빛으로 살짝 보이는 내부는 빈말로도 텅 비어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으니까. 높다란 책장이 수십 개였다. 그 책장에 채워진 책들은 더했다. 빽빽하게 채워진 책장을 보며 할 말을 잃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중간의 문을 열어두고는 성큼성큼 걸어 양쪽의 문 또한 죄다 열어젖혔다. 잠겨있는 문은 단 한 개도 없었다. 양 끝에 있던 문의 너머도 중간의 문 너머와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높다란 책장 수십 개와 빽빽하게 채워진 수많은 책들. 우리의 표정이 서서히 절망으로 물들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요컨대 이런 말이었다. 이 중에 우리가 찾는 [자료]라는 게 존재하긴 하겠지만…,
"…이 서고들을 죄다 뒤져서, 그 [자료]를 찾아내야 한다 이 말이군."
"말이 돼? 저걸 언제 다 헤집고 다녀!"
"솔직히 이럴 줄은 몰랐지. 금서란 게 이렇게 많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
"큰일 났네요…, 몇 시간 뒤면 오전 수업이 시작될 텐데,"
금서 보관소에 몰래 잠입하기 위해 사람이 없는 새벽 시간대를 이용하긴 했다지만, 당연하게도 시간이 넘쳐나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동틀 녘엔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야 하니까.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남짓한 시간뿐이었다. 다음에 다시 와야 할까?
"책을 다 살펴볼 필요는 없어."
민윤기의 말에 나머지 시선들이 그에게로 쏠렸다. 제게 몰린 의아한 눈빛들에 민윤기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열쇠, 아직 쓰지도 않았잖아. 하는 그 말에 다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입을 떡 벌릴 뿐이었다.
"그래, 열쇠가 있었군,"
"문을 여는덴 열쇠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다른 곳에 열쇠가 쓰인다는 뜻이겠네. 그럼 책을 다 살필 게 아니라…."
열쇠가 쓰일만한 곳, 혹은 다른 것을 찾으면 된다. 세 군데의 서고를 빠르게 돌아보기 위해 우리는 팀을 나누었다. 세 팀으로. 다섯 명이었기에 한 명은 혼자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민윤기가 흔쾌히 그 혼자 오른쪽 서고를 돌아보겠다 했다. 김태형과 정호석이 왼쪽 서고를, 전정국과 내가 자연스럽게 중앙의 서고로 향했다.
"두 시간 뒤에 다시 입구에서 만나는 걸로 하지."
전정국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걸음들이 언뜻 들뜬 것 같기도 했다.
게임 내에서
언뜻 보기에도 넓어 보였던 서고는, 내부로 한 발을 들이민 순간 우리가 보았던 것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창 하나 없는 서고의 뒤쪽은 캄캄한 어둠에 삼켜진 채였다. 빨리 가지, 하는 전정국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정호석이 새로이 만들어준 라이트 볼이 전정국의 근처에 떠있었다.
쪽문이라던가, 다른 장소로 이어진 것 같은 문을 먼저 찾아보자는 전정국의 의견에 동의했기에, 우리는 책장을 꼼꼼히 살피는 대신 빠르게 지나쳐갔다. 바닥은 물론이고 벽면을 훑는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김태형한테 물어볼 생각인가?"
갑작스러운 전정국의 말에 나는 벽면을 살피는 것도 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전정국은 여전히 벽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으나, 이따금 나를 향해 흘긋거리는 것으로 보아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싶었다. 나는 다시금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간단히 대답했다. 그래야지,
"너도 내 말을 들은 뒤 알아차렸다고 했으니, 김태형이 스스로 깨달았을 확률은 낮을 테니까. 이야기해 주는 쪽이 낫지 않을까?"
"모두에게 물어볼 셈인가."
"눈 뜨고 당할 순 없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플레이어의 기억을 잃어가는 거라면,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대책이라도 세워야지."
"……."
"둘이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것보단, 여러 명의 머리를 빌리는 쪽이 훨씬 나을 수도 있으니까."
서고는 보기보다 넓어 걸음을 빨리 한 채로 꽤 오래 걸었음에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여전히 어두컴컴한 앞을 라이트 볼로 밝히며 전정국이 걸음을 옮겼다. 나는 책장을 비롯한 벽면을 살피는 것 또한 잊지 않으며 그 뒤를 따랐다.
"뭐, 따로 생각해 둔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곳에 온 뒤로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있다. 뭐든 기록해두는 게 나중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고."
"그거 괜찮은 방법이네."
"한국어로 써서, 과연 나중에 읽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서고도 끝이 보였다. 책장이 대체 몇 개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한참을 걷다 보니 문과의 정 반대쪽에 위치하고 있을 벽면이 나타난 것이었다. 문이 있던 복도와 같이, 왕국 시절에나 사용되었을법한 장식들이 걸려있는 벽면을 보며 전정국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이 벽면에도 문 따위는 없다. 하다못해 열쇠구멍이라던가, 자그마한 상자 하나조차도.
"부탁이 하나 있다, 율리아."
벽면에 새겨진 정체불명의 생명체 조각을 보며 전정국이 입을 열었다. 뭔데? 하는 내 물음에도 그는 망설이는 듯,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거렸다.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선, 플레이어들이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것 같다는 사실은 김태형에게만 알렸으면 좋겠다."
"어, 왜? 민윤기나 정호석한테는 숨기란 뜻이야?"
"그래. 정확한 증거는 되지 못하겠지만, 어쩐지 말해선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정확히, 민윤기에게만. 그 능력도 그렇고, 어쩐지 위험하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그래…, 그렇다 치고, 정호석은?"
전정국이 목덜미를 몇 번 쓸어보더니 대답했다. 정호석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는 그 대답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머쓱한 듯 자꾸만 뒷목을 긁적였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호석은 가끔 사람 같지 않을 때가 있다."
"…?"
"역시나 이해 못 한다는 표정이군. 하는 행동이나 이런 걸 떠나서, 기척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조금 미묘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게 다 느껴져?"
"글쎄, 전직을 하고 난 뒤부터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 같긴 했다."
전정국이 걸음을 돌렸다. 다시 문쪽으로 돌아가자는 듯 손짓하는 그에 나 또한 벽면을 바라보고 있던 몸을 돌려 그의 뒤를 따랐다. 올 때와 달리 상당히 느긋한 걸음걸이였다.
"일단 김태형한테만 말해볼게."
"고맙다."
"아니 뭐, 김태형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 기억을 잃는 게 아닐… 수도, 있고…."
어쩐지 착잡해지는 터라 말꼬리를 늘리는 나를 보며 전정국이 옅게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군, 하는 그 말에 나는 다시금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전정국이 기억을 잃어간다는 사실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터, 김태형마저도 기억을 잃어간다면 플레이어들 간의 공통점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 으억,"
"조심…!"
굽이 낮은 구두의 코가 무언가에 걸림과 동시에 몸이 휘청였다.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며 넘어질 때를 대비해 팔을 앞으로 뻗었으나, 손바닥이 바닥에 닿는 일은 없었다. 허리를 단단하게 받친 전정국의 팔이 보였다. 삽시간에 얼굴이 화악,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심 좀 해라, 하는 그 말에 어, 어어…. 하는 얼빠진 대답을 내놓을 정도로.
전정국은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나를 바로 세웠다. 발바닥에 땅에 제대로 붙었음을 확인한 내가 재빨리 몸을 바로 세웠다. 허리춤에서 전정국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누군가에게 허리를 잡힌 게 처음도 아닌데 얼굴이 식을 줄을 몰랐다. 왜이런대,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나는 부러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전정국의 시선이 나를 따라 바닥으로 향했다.
"뭐에 걸린 거지?"
"그냥 바닥에 파인 흠…, 어? 잠시만, 이거…,"
"손잡이?"
전정국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바닥을 살폈다. 바닥이 패인 게 아니었다. 철로 된 손잡이가 바닥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재빨리 몸을 숙이고 바닥을 살폈다. 서서 볼 땐 몰랐건만, 손잡이 근처에 사각형의 모양으로 실금이 가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재빨리 사각형의 실금 안에서 몸을 옮겼다. 금을 밟고 있던 전정국을 뒤로 당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뒤 손잡이를 잡고 힘껏 들어 올리려 했건만….
"…뭐가 이렇게 무거워!"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힘을 줬건만, 바닥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전정국이 나섰지만 문은 덜컹거리는 소음만 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열리는군, 하는 전정국의 말에 나는 다시금 몸을 숙여 바닥을 살폈다.
"설마, 저거 열쇠구멍이야?"
손잡이 아래쪽의 자그마한 원형의 금속을 본 내가 그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새 꽤 길게 자란 손톱으로 원의 중앙을 꾹 눌러보니, 열쇠 모양으로 구멍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찾았다, 하는 내 말에 전정국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나는 내 눈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눈을 끔뻑이며 가만히 서 있자, 전정국이 재촉하듯 제 손을 한번 흔들었다. 뭐 하나, 안 잡고. 하는 그 말에 의문 어린 눈빛을 보내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또 넘어지면 안 될 것 아닌가."
어쩐지, 보호받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에 귓가가 후끈 달아올랐다. 나는 조심스레 전정국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단단한 손이, 언제부턴가 잔잔히 떨리던 손을 힘 있게 감싸 쥐었다. 어쩐지 한결 안심되는 기분이어서, 나는 한껏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
세 개의 문이 있는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다시 말해, 복도로 돌아온 것이 나와 전정국뿐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언젠가 진이 선물해 주었던 손목시계를 흘긋 들여다보았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한 시간쯤 이른 시간이었다.
문을 발견하고, 열쇠를 발견한 것 까진 좋았다. 문제가 있다면, 각각 다른 방으로 흩어진 이들을 어떻게 문이 있는 복도로 불러 모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럴 때 휴대전화 하나만 있었어도…,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인벤토리를 뒤적였다. 혹시나 쓸만한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전정국 또한 별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탓인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문 세 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내가 직접 들어가서 불러오는 게 빠르겠군, 하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금서 보관소는 생각보다 컸다. 나와 전정국이 갔던 곳도 그랬지만, 다른 곳도 만만치 않게 클 것이다. 괜히 길이 엇갈리는 게 배는 손해였다.
"괜찮아."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는…,"
"방금 방법이 생겼어."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들며 내가 말했다. 참 나, 이게 도움이 될 줄이야. 하기야, 저번 '수색'퀘스트에서도 전정국과 김태형이 이걸로 한몫 톡톡히 하긴 했다. 혹시나 해서 열어본 건데, 딱 필요한 게 나와줄 줄이야.
내 손에 쥐여진 동그란 무언가를 본 전정국의 표정에 의문이 들어찼다. 그건… 뭔가? 하는 그 말에 나는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콩알탄.
"콩…, 그건 또 어디서…."
"랜덤박스 있잖아, 저번에 협력 퀘스트 하고 받은 거."
내 말에 전정국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협력, 무려 세 명의 플레이어가 죽어나갔던 그 끔찍한 퀘스트의 보상으로, 나는 스킬 [난사]와 [랜덤박스]를 받았었다. 그건 김태형과 전정국도 마찬가지였고. 차이점이 있다면 전정국과 김태형은 지난 수색 퀘스트에서 랜덤박스를 사용했다는 사실이고, 나는 여전히, 인벤토리 한구석에 짱박아둔 채 잊어먹고 있었다는 사실쯤.
"내가 보기엔, 랜덤박스가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한 걸 주는 그런…, 그런 박스 같아."
"…콩알탄으로 뭘 어쩌겠다는…,"
"너 어릴 때 콩알탄 가지고 논 적 없어?"
이게 이래 봬도 소리가 장난 아니거든-, 전정국의 손에 콩알탄을 대여섯 개 쥐여준 나는, 내 손에도 콩알탄을 그 정도 남긴 뒤 나머지는 죄다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다.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전정국에 나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콩알탄 하나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따닥-,'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울리는 소리에 전정국이 흠칫 놀라며 미간을 찌푸렀다. 그제야 내 말을 알겠다는 듯, 전정국이 오른쪽에 위치한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닫고 던지자. 잘 하면 바깥에도 들리겠어."
"…귀마개 같은 건, 없는 건가?"
"음…, 어쩔 수 없잖아. 좀 참아."
전정국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문 너머로 발을 디뎠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힘과 동시에, 문 너머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따닥, 탁, 하는 소리가 문 너머로 작게 들려왔다. 응, 이 정도면 바깥까지 들릴 위험은 없겠네-, 하며 나는 왼쪽 문으로 들어섰다. 쿵, 하며 닫힌 왼쪽 문에, 복도에 남아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난 누가 도서관에 폭탄 던져놓은 줄 알았어, 율리아."
"미안하다니까?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순 없잖아."
"정호석도 만만찮게 놀랐거든?"
"그래? 미안해요, 급해서 그랬어요."
"아니, 아니, 괜찮습니다…."
콩알탄, 그 조그마한 것이 연달아 터지는 소리에 김태형과 정호석은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큰 소리에 놀라 달려온 탓에 얼굴이 일그러져 엉망진창이었는데, 그 구겨진 얼굴은 내가 바닥에 콩알탄을 하나하나 던지는 꼴을 보고는 더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더랬다. 그 뒤로 쭉 저 상태였다. 전정국과 내가 발견한 문으로 가는 내내 투덜거리는 김태형을 보며, 전정국이 못 살겠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민윤기는 콩알탄이 터지는 소리를 듣고 혼령을 보내 무슨 일인지 알아보게 했더랬다. 해서 그리 놀라지 않고 무사히 전정국과 만났다고.
급한 마음에 전정국과 내가 문의 위치를 따로 표시해두지 않은 탓에, 다섯이서 바닥만 쳐다보며 걷는 불상사가 일어났지만, 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민윤기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들었다. 열쇠구멍과 열쇠의 모양을 대충이나마 확인하는 듯했다. 크기는 얼추 맞아 보였기에, 그가 망설임 없이 열쇠를 꽂아 넣었다. 찰칵,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열렸어."
민윤기의 말에 우르르 몰려있던 나머지가 문을 밟지 않기 위해 물러났다. 열쇠를 뽑아 다시 제 주머니에 집어넣은 민윤기가 바닥의 손잡이를 쥐고 들어 올렸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서서히 바닥이 들렸다. 먼지가 잔뜩 일었다.
"…또 계단이야?"
"참 철저하게도 숨겨놨군그래,"
지하보다 더 아래쪽의 지하, 그리고 그보다 아래로 통하는 수상한 통로. 전정국의 말마따나 참으로 철저하게도 숨겨놓았다. 그런 것치고 경비는 허술하긴 했지만. 정호석이 다시금 라이트볼을 만들어냈다. 문을 완전히 열어젖힌 민윤기가 라이트 볼 하나를 띄우고는 앞장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금서 보관소로 내려올 적 한참을 걸어내려왔던 것을 생각하면, 그 3분의 1 정도의 길이에 불과했다. 다섯이서 굳이 다 내려갈 필요가 없다는 의견 하에, 문안으로 들어온 것은 민윤기와 나, 그리고 전정국이 전부였다. 셋만 내려왔는데도 비좁은 계단이 꽉꽉 들어찬 걸로 봐서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저기 뭐가 있어,"
민윤기의 손끝이 가리킨 곳은 제단과도 같은 모양새를 한 것이었다. 제단, 그 외에는 달리 표현할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온갖 괴이쩍은 형상들이 조각된 제단, 그리고 그 위에 곱게 올려진 책 한 권. 우리는 별말 없이도 다 같은 생각을 했음이 분명했다. [자료]가 저것을 뜻하는 것임을.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숨겨놨을까?"
오래된 책이었다. 아니, 책 보단 노트에 가까워 보였다. 누군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오래된 노트. 나는 제단에 가까이 다가가 책으로 손을 뻗었다. 위험할지도 모른다 말하는 전정국과 달리 민윤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책장에 손을 댔음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전정국도 퍽 안심한 눈치였다. 나는 한 손에는 라이트볼을 든 채, 나머지 한 손으로 책장을 넘겼다. 제국어가 아닌, 왕국 시절에나 쓰이던 언어가 적혀있었다. 고대어라기엔 글자가 제국어와 유사해 보였지만, 제국어는 확실히 아니었다. 모르는 언어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차에,
"히샤크어다."
"히샤크어?"
"제국이 왕국일 적엔 히샤크 왕국보다 약했다고들 하지. 자연스레 언어 또한 강대국을 따라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니, 왕국 시절의 기록은 대부분 히샤크어로 되어있다. 물론, 칭제 후엔 죄다 제국어로 갈아치운 문서들이 더 많지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전정국이 친히 설명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샤크, 제국의 바로 옆에 있는 왕국이었다. 역사서에도 꾸준히 나오는 왕국이었기에 기억하던 바였으나, 히샤크어를 쓸 정도로 크레아 왕국이 약소국이었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하긴, 제국씩이나 되어서 약소국에 가까웠던 과거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도 위신이 상했을 것이었다.
"히샤크어를 읽을 줄 알아?"
"조금은 알고 있다."
유려한 필기체로 쓰인 첫 장은 [일기장]이 전부라 했다. 일기장? 놀라 되묻는 내 말에 전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일기가 금서가 될 정도라니, 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전정국은 개의치 않고 한 장을 더 넘겨 문장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따금 제국어와 유사한 글자는 대충 그 뜻을 유추할 수 있었기에 나는 대충이나마 그 내용을 짐작해가며 문장을 눈에 담았다. 전정국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가는 것은 보지 못한 채로.
"…돌아가지, 서두르는 게 좋겠다."
"갑자기? 왜 서두르는…,"
"곧 해가 뜰 시간이다. 그러니 나머지 내용은 기숙사에 돌아가서 해석하는 게 낫겠군."
어쩐지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 표정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윤기도 딱히 반발을 표하지 않았다. 이건 내가 챙길게, 하며 내가 책을 집어 든 순간이었다. 시끄럽게 경보음이 울려댔다.
"…! 망할, 어쩐지 너무 허술하다 했어."
"빨리, 서둘러라!"
당황할 새도 없이 등을 밀어대는 전정국에 서둘러 계단을 올렸다. 금서 보관소에서도 경보음은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한껏 당황한 김태형과 정호석은 덤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자료에 손을 댈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너무 안일했어. 자료를 집어 들자마자 경보음이 울리지 뭐야,"
"이미 경비가 도서관 입구까지 들이닥쳤겠군."
"창문 같은 거라도, 뭐, 숨을 데라도 없나?"
"여기 지하야…."
"일단 나가라, 세 개의 문이 있는 곳까지만 가면 된다."
전정국의 말에 우리는 무언가를 따져볼 새도 없이 달렸다. 하필이면 구두를 신어서, 속으로 불평을 내뱉은 나는 구두를 벗어 손에 쥐었다. 맨발바닥에 닿는 나무 바닥이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설마, 이 세계에도 지문검사라던가 그런 게 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실없는 생각과 함께.
세 걔의 문이 있는 복도까지 도착한 우리는 전정국이 하는 양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그는 세 개의 문을 전부 다 닫더니,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한 나와 김태형의 얼굴에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포탈!"
"오기 전에 네 기숙사에 하나 던져두고 왔다. 바로 이동하는 게-,"
"잠시만! 우리만 여기서 사라진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
내가 급하게 전정국의 팔을 붙잡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함을 가득 담은 그 표정을 본 내가 말했다. 아카데미엔 마법사가 넘쳐나, 잊었어? 하는 그 말에 먼저 얼굴에 핏기가 가신 건 전정국이었다.
"기억 마법…,"
"그래! 그거 하나면 범인이 우리라는 건 그냥 들통나는 거라니까!"
공작저에서 본 적이 있었다. 기억 마법. 공작의 기밀 서류가 사라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마법사를 동원해 사용한 마법이 그것이었다. 사물이 기억하는 것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마법, 고위 마법사들만이 사용한다고는 하지만, 아카데미씩이나 되는 곳에서 그런 고위 마법사 한 명을 못 데리고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흔적을 지울 수도 없잖은가,"
"아뇨, 할 수 있어요."
앞으로 나선 정호석이 빙긋 웃어 보였다. 저는, 할 수 있어요. 하는 그 말에 전정국이 살풋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어떻게? 하는 그 말에 정호석은 말없이 허공에 손짓했다. 그의 손가락이 지나가는 곳마다 연둣빛 선이 생겨났다. 원 하나, 그 원을 사방으로 가로지르는 선, 알 수 없는 특이한 문자, 마법진이었다. 정호석이 합장함과 동시에 마법진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도서관 전체를 뒤덮었다.
됐어요, 포탈 여세요! 하는 그 말에 전정국이 바닥으로 노란 구슬을 내던졌다. 구슬이 바닥에 닿자마자 샛노란 빛으로 이루어진 선이 흘러나와 타원형의 포탈을 만들었다.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다섯 명이 거의 구겨지듯 포탈 안으로 몸을 쑤셔 넣었다. 경비병들의 발소리가 복도의 입구 가까이에서 들려올 때쯤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무모한 짓 하지 말자, 우리…."
A210, 내 기숙사의 방바닥에 늘어지듯 엎어진 김태형이 하는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내 품에는 여전히 낡은 노트가 들린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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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분 콩알탄 ㅋㅋ
쫓기는 장면 쓸 때
저도모르게 파바바바ㅏㄱ 썼다네요
나도 쫓기는줄...
흔적 남겨주시는 분들 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