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 내에서
23호
W. 설하
언니의 시체를 묻던 날을 나는 평생토록 기억할 것이다. 척박한 산중에서 죽어버린 언니의 시체를 차마 그대로 놔두고 갈 자신이 없어 그나마 볕이 잘 드는 곳에 언니의 시신을 묻었다. 탈진할 정도로 우는 날 데리고 이동할 자신은 없었는지 남은 일행들은 그날 그 자리에서 야영을 하기로 결정했다. 나 때문에 일정이 늦춰지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기에는 내게 찾아온 상실이 너무 컸다.
남은 계시자 셋이 내게 로체스터령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물었다. 아마도 나를 걱정했기에 건넨 말일 테지만, 나는 그들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언니는 이 여행의 결말이 궁금하다고 했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언니에게 들러 말해주고 싶었다. 언니가 가고 난 뒤에 이런 일들이 있었고, 저런 일들이 있었노라 꼭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만일 언니의 죽음이 배신자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나는 반드시 그 배신자를 찾아 찢어 죽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는 일행에 남아있어야만 했다.
여행은 계속되었지만, 일행의 분위기는 예전만큼 밝지 못했다. 일행 중 과반수가 죽어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중략)
훼손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다
(중략)
봐선 안될 것을 봐버린 것 같다. 아마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나도 죽이겠지.
도망갈 방법을 생각 중이다. 하지만 어떻게? 나 혼자 살겠다고 이 산중에 나머지 일행을 두고 갈 순 없다. 그랬다가는 배신자의 손에 또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 테니까. 어떻게 해서든 남은 두 사람은 살리고 싶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언니가 도와줬더라면…,
결국 또 한 명이 죽었다. 숨이 끊어지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는 나는 무작정 멜리아를 데리고 도망쳤다. 산을 구르다시피 내려온 탓에 온몸이 멍투성이 있다. 아픈 줄도 모르고 도망쳐 도착한 곳은 크레아 제국이었다. 앞으로는 어떡해야 할까. 배신자가 누구인지 직접 눈으로 목격한 멜리아의 충격이 큰 것 같다.
이안 바흐나인이 계시자 모두를 배신했다.
-비비안의 기록 中 발췌-
게임 내에서
"제국으로 돌아갈 거야."
무턱대고 내뱉은 내 말에 전정국이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하며 소파에 늘어져있던 몸을 일으키는 전정국과는 달리, 나머지 세 명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나는 진의 편지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김태형의 입술이 달싹였다.
"다 알고 있었다 이거지,"
"…일단 진정하고 우리 얘기를 먼저-,"
"말했어야지, 내가 여관으로 돌아오는 순간 바로 말했어야지."
"……."
"어떻게 제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걸 숨겨?"
전정국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쥔 채 그는 설명을 요구했다. 반란이라는 게 보통 그 국가의 지도자에게 반감을 가지고 내란을 일으키는 형태이지 않은가. 전정국이 들어선 몸은 엄연히 제국의 황태자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황태자로서의 기억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지금, 제국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격한 반응을 내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이따금 황녀의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하던 전정국의 모습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럴 법 했다. 율리아의 기억이 없는 나마저도 공작가 사람들이 걱정돼 미칠 지경인데 오죽할까. 김태형이 한숨을 내쉬고는 나와 전정국을 보며 앉으라 손짓했다. 사실대로 털어놓겠다는, 무언의 의미였다.
"일단,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해. 너랑 전정국은 3주 동안 바닷속에 있었잖아? 당연히 휴식이 먼저라고 생각했고, 정호석이랑 민윤기도 동의했어."
"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에 천천히 설명하려고 했어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걸 숨겨,"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내 상태를 살핀 김태형이 뻣뻣하게 굳혔던 몸을 풀며 소파에 푹 기대어 앉았다.
"지금 네 상태나 제대로 살피고 말해. 너 당장 기절해도 그러려니 할 정도로 피곤해 보여."
김태형의 말이 맞았다. 당장에라도 긴장을 풀면 까무룩 잠에 들 수 있을 정도로 율리아의 몸은 지쳐있었다. 틀린 말 하나 없다지만 어쩐지 속에서부터 자꾸만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진정하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는 정호석의 손길에 거칠었던 숨이 점차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지금 화를 내봤자 쓸데없이 힘만 빼는 꼴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서운함에 못 이겨 투정을 부린 것뿐이지.
어떻게 된 건지, 자세한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다는 내 말에 전정국이 동의했다. 김태형이 민윤기에게 눈짓했다. 네가 설명해 보라는 듯한 그 행동에 아무 말 없이 상황을 방관하던 민윤기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조용한 음성이 조곤조곤, 제국의 상황을 짚어나갔다.
"제국에서 귀족 피습 사건이 일어났어."
진의 편지에서 읽었던 내용이었다. 이 사건에 휘말려 글렌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말했지.
"그것마저도 꽤 큰 사건 축에 낄 법한 일이었는데, 귀족 피습 사건은 눈가리개였어. 수도가 아니라, 각 영지에서 일어난 일이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겠지."
"……."
"자연스레 수도에 밀집됐던 병력도 사건이 일어난 영지로 파견됐고. 그 틈을 타 반군이 황궁을 쳤어."
민윤기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시작은 황궁, 그다음은 피습당한 귀족들의 영지. 우두머리가 사라진 만큼 혼란에 빠져 있는 영지를 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으리라. 그다음은 그 근방의 영지들. 그렇게 반군의 손에 넘어간 영지가 제국의 절반에 가까웠다. 고작 3주 만에 일어난 일이 그랬다. 이미 황궁이 반란군에게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전정국이 마른 세수를 했다. 그 모습을 보다 나는 조용히 물었다. …오르테 공작령은?
"거긴 아직 괜찮아. 하지만 수도의 타운하우스는 이미 넘어갔을 거야."
민윤기는 수도는 이미 손쓸 도리 없이 반군에게 넘어간 이후라는 말을 덧붙였다. 타운하우스가 이미 넘어갔다면, 진은 이미….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절대로 제국으로 오지 말라던 진의 마지막 편지가 자꾸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할까. 소파의 등받이에 힘없이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복잡해 옅은 두통이 몰려왔지만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난 지금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내가 말했다. 김태형이 무어라 반박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그는 구태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안 돼, 하는 단호한 대답은 김태형이 아닌 다른 이에게서 튀어나왔다. 정호석이 낯을 단단히 굳힌 채로 말했다. 늘 유순히 늘어져있던 눈매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부드럽게 풀려있던 입매도 굳어있었다. 제국은 위험해.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 제국은."
"방법이 없을까? 아니, 애초에 너희들은 제국 상황을 어떻게 알게 됐는데? 제국에 연락망이 있다면 그쪽을 통해 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면 되잖아."
"주고받던 편지들이 다 끊겨버린 게 일주일 전이에요. …알아둬야 할 게 있어요. 우리가 제국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뭔데?"
"민윤기 씨의 능력을 이용했어요."
"꽤 멀리까지 악령을 보낼 수 있더라고."
정호석의 말에 민윤기가 덧붙였다. 나와 전정국의 눈이 크게 뜨였다. 민윤기, 슈가, 네크로맨서인 그가 망령들을 통해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히샤크 왕국에서 제국까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도 망령을 보낼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가 한정적이라는 사실이에요. 제국의 넓은 땅덩어리 중 어디가 반군의 손에 넘어갔고, 어디가 넘어가지 않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민윤기 씨의 악령을 제외하면 제국과 연락할 방법도 없어요."
"……."
"그 위험을 감수하고 국경지대를 넘었다 쳐도 그다음은요? 만약 우리가 얻게 된 정보가 한 발 느린 정보라 반군에게 붙잡힌다면요?"
"……"
"반군이 과연 황태자를 가만히 놔둘까요? 당신도 어쨌든 공녀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니 위험한 건 매한가지입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걱정되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걱정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행동해선 안돼요. 조금 더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조금이라도 더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선택지를 택해야 합니다. 시스템이 아닌 이 세계의 사람들로부터 목숨을 위협받고 있으니까요."
구구절절 죄다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수긍의 뜻으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게 보면 타국에 있는 게 기회일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 이곳에서라도 제국을 되돌릴 방안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계획을 완성시켜 실행한다면, 어쩌면 무작정 제국으로 돌아가 진을 구해내는 것보단 훨씬 더 안정적일지도 모른다. 그래,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공작가 사람들을 포기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난 좀 다르게 생각해."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는 민윤기에게로.
"난 제국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어째서죠? 제국으로 돌아가는 순간, 아니, 돌아가는 과정조차 위험할게 뻔한데도…."
"우리가 '근원'을 파괴하려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닐 때조차 위험은 존재했어. 죽을 뻔한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이제 와서 위험하니 하지 말자는 건 앞뒤가 너무 안 맞는 거 아닌가?"
"그거랑은 엄연히 다른 문제니까, 다르게 생각하는 게 옳지 않을까요."
"다르지 않아. 우리가 감수할 수 있는 위험이라고 확신해."
민윤기의 말에 정호석은 계속해서 반박해나갔다. 이어지는 둘의 설전을 듣고 있던 전정국이 정호석이 잠시 침묵하던 순간에 말을 꺼냈다. 일단, 민윤기의 의견도 들어보는 것이 맞다는 그 말에 정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다시피, 반군의 손에 넘어간 제국의 영토가 대충 절반에 가까워. 실상은 나머지 절반 또한 언제 먹힐지 모르는 상황이고."
"결국 위험하다는 소리 아닌가?"
"일단 들어봐. 다르게 생각하면 아직 넘어가지 않은 영토가 절반이라는 뜻이야. 그 절반의 영토에서도 충분히 계획을 세우고, 실현시킬 수 있어. 게다가, 제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제국과 가장 가까이에 붙어있는 데로바 왕국에도 전해지지 않았어. 여기라고 다를까."
"……."
"여기 남아서 대체 뭘 한다는 건데? 돌아가는 상황도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제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도와달라고 할까? 미친놈 취급받아 제국으로 압송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우리가 타국에 있어봤자 유리할 게 하나도 없어. 그리고-,"
네가 가장 걱정하는 건 제국으로 넘어가는 방법이 없다는 거 아니야? 민윤기가 손끝으로 정호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제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게,"
정호석의 침묵에도 아랑곳 않은 민윤기가 말을 이었다. 반군이 어디에 주둔하고 있는지, 제국 국경지대 어디가 반군의 손에 넘어갔고, 어디가 아직 안전한 곳인지. 어디로 가는 것이 안전하고, 어디로 가면 위험해지는지, 난 알 수 있어. 민윤기의 뒤편에서 흐릿한 검은 무언가가 떠올랐다. 망령이었다. 손짓 한 번에 민윤기는 그것을 어딘가로 보내버렸다. 아마도 국경지대 어딘가겠지. 제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민윤기는 제 앞에 놓여있던 찻잔을 들어 차를 홀짝였다. 전정국은 고민이 깊은 듯했고, 김태형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뭘 결정하던 따르겠다는 것처럼. 정호석은 잠시 민윤기를 바라보곤 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나도 곧 터질 것 같은 머릿속 때문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모두가 생각이 많았다.
어차피, 백날 여기서 죽치고 생각만 해봤자 나아지는 건 없었다. 무리했던 몸이 슬슬 한계에 도달한 것 같기도 했고, 전정국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 보고 결정하자며 김태형이 결론을 내렸다. 긴 회의의 해산을 말하며 김태형은 먼저 몸을 일으켜 제 방으로 향했다. 그 뒤를 전정국과 민윤기가 따랐다.
"…나도 올라가 볼게."
내가 말했다. 아직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던 정호석이 내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추었다. 굳어있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며 그래요, 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푹 쉬고, 내일 봐요."
"응, 잘 자."
천근만근 무거워진 다리를 이끌고 여관의 계단을 올랐다. 내가 2층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밟을 때까지도 밑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서 나는 정호석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쉽게 잠에 들지 못해 매번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피로에 절여지다시피 한 몸뚱이는 내가 침대에 몸을 뉘이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무언가 생각을 이을 틈도 없이 눈앞이 암전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온통 새파란 방 안에 있었다. 맨바닥에 뉘여져 있던 몸을 일으킨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온통 새파란 방. 아주 낯익은 방이었다. 혹시? 하는 생각에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는 벽면에 하얀 글씨들이 새겨지기를 기다렸다. 오래전, 그와 첫 만남 때 그러했듯이.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새파란 벽은 여전히 파란색의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새하얀 글씨로 새겨지는 장난 어린 문장도, 슬슬 귀에 익어가던 낭랑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금방이라도 시스템, '지민'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데 아무것도 생겨나질 않았다.
"……."
입을 벌렸다. 지민의 이름을 소리쳐 불려보려 했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쇳소리만 내뿜는 내 목에 인상을 찌푸렸다. 말이 만들어지질 않았다. 목소리가 없는 사람처럼 꺽꺽대는 볼품없는 소리만 튀어나왔다. 당연히 지민의 이름도 부를 수가 없었다.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키고는 벽면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목소리를 낼 수 없다면, 벽을 두드려서라도 내가 여기에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느릿하던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가까이 있는 듯해 보였던 파란 벽이 좀처럼 가까워지질 않아 나는 조급한 마음에 서서히 걸음을 빨리했다. 빨리, 더 빨리. 걸음이 뜀박질로 변했다. 숨이 차오르고,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힐 만큼 뛰어도 벽이 가까워지질 않았다. 나는 뜀박질을 멈추곤 주변을 살펴보았다. 난 여전히 제자리였다. 그제서야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나는 걸음을 돌렸다. 뜀박질로 뛰어왔던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이번에는 천천히 걷기만 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새파란 방의 정중앙에 있었다. 달라진 것은 한 가지였다.
"……!"
주저앉아있던 자리에 무언가가 생겨났다는 것. 나는 얼른 뛰어가 그 자그마한 물체를 손에 쥐었다. 익숙한 물건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그것을 집어 드는 순간, 새파란 방이 울렸다. 견고한 것만 같던 파란 벽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르릉-, 하는 사나운 소리를 내며 벽의 금이 점점 더 커졌다. 바닥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바닥에 나는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쩌적-, 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가 나를 뒤엎었다. 바닥이 무너졌다. 허공으로 내 몸이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번쩍, 뜨인 눈을 도르륵 굴려보았다. 침대에 엎어진 자세 그대로 잠든 탓에 베개에 얼굴이 눌린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나는 눈알만 굴렸다. 여관이었다. 나무 침대와 바닥에 널브러진 짐들, 그리고 책상에 널브러진 종이들. 익숙한 풍경임을 깨달은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꿈?"
뭐 이딴 꿈을 다 꾸나. 아직도 발밑이 훅 꺼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나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하-, 하는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잠에서 깬 머리가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꿈이다 이거지. 놀란 탓에 벌떡 일어나 앉았던 몸을 다시 침대에 뉘었다.
"악-,"
그리고 다시 일어났다. 등 한가운데를 무언가가 꾹 눌렀기 때문이었다. …조약돌? 방금까지 내가 누워있던 침대 한복판에 자그마한 물체 하나가 놓여있었다. 조약돌처럼 작고, 동글동글 예쁜 것. 마치 내가 꿈에서 붙잡았던 물체와 똑같은…,
[공간의 돌]
소비 아이템
깨트려 사용하면 지정된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
현재 지정된 장소 : 청(靑)의 아공간
남은 사용 횟수 : 1회
"…미친, 공간의 돌!"
익숙한 아이템 창에 나는 반쯤 괴성을 지르며 공간의 돌을 집어 들었다. 시스템! 꿈속에서 보았던 공간들이 주르륵 스쳐 지나갔다. 새파란 공간, 흰 글씨가 새겨지지 않는 벽, 목소리를 낼 수 없던 나 자신, 그리고 공간의 돌. 대충 조합해 보자면,
"퀘스트 창으로는 말할 수 없으니 직접 찾아와라?"
뭐 이런 건가? 중얼거리던 나는 침대 위에 공간의 돌을 내려놓고는 바쁘게 움직였다. 엉망이 된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외출복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짐가방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노트와 깃 펜을 꺼내 쪽지를 남겼다.
'시스템'
달랑 한 단어였지만, 김태형이든 전정국이든 이미 '지민'에 대해 알고 있는 두 사람이 어련히 알아서 해석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남긴 쪽지였다. 쪽지를 책상 위, 잘 보이는 자리에 올려둔 나는 공간의 돌을 쥐었다. 드디어 만난다. 3년 만의 재회였다. 아공간이 산산이 부서지던 날로부터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시스템을 볼 수가 없었으니까.
어쩐지 소풍을 떠나는 소녀마냥 설레는 마음을 끌어안은 채 나는 바닥에 공간의 돌을 내려놓았다. 콰직-, 밑창이 두꺼운 신발이 공간의 돌을 부스러트림과 동시에 하얀 연기가 발밑에서부터 솟아올랐다. 새하얗게 퍼져나가던 연기는 어느새 파란 그래픽 조각들이 되어 내 몸을 빠르게 감쌌다. 새파란 창으로 뒤덮인 시야가 불투명해졌다. 반투명한 그래픽 쪼가리들 사이사이로 일렁이는 여관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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