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낡은 야구 글러브
1.지구멸망위기
북극의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올라 일본을 포함한 섬 나라는 바다에 잠길 것이며 급격한 기후변화는 인간이 살기 어려워질 정도로 뜨거워질 것, 지구는 조금씩 생명력을 잃어갈 것이라 과학자들은 예상했다. 그러나 인간에겐 경각심은 없었다. 실질적인 문제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뉴스와 기사보도에 따르는 통계적 자료는 그다지 사람들의 의지를 불러일으키지 못한 이유이다. 안전불감증인 인간은 멸망의 징조가 살갗에 와닿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몰랐다. 대량의 북극의 빙하가 녹을 때에 인간은 무심했다. 그 결과, 섬나라의 절반이 바다에 잠겼다. 아아. 이제야 인간들은 지구멸망의 현실가능성은 이제 더이상 미래가 아니라 현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세계 모든 과학자, 환경보호가 등 지식이 빠삭한 전문가들이 모여 빠르게 지구를 다시 살리기 위한 대책이 이루어졌다. 지구의 이상 징후가 호전되는 것 같았지만 이미 늦은 탓일까.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지구는 회복력을 잃어버렸다. 인류는 절망했다. 수 천년을 지난 자신들의 과오를 무력하게 되돌려 받을 위기에 놓였으니. 인류의 대부분은 그렇게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는 무쇠같은 이들도 있었다. 그것은 우주를 꿈꾸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지구를 살리자'가 아닌 '지구를 대체할 다른 행성 찾기'로 방향을 틀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었다. 지금 눈앞에 놓인 위기도 해결 못해 쩔쩔매는 상황에 있을지 없을지 모를 행성에 한눈을 파냐며 쯧쯧 혀를 찼다. 그러나 몇 년 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지구를 대체할 행성을 찾은 것이다. 그들의 끈질김이 이내 빛을 바란 순간이었다. 인류에게 찾아온 새로운 기적이라 해성의 이름은 E-NM라 불렸다. E-NM은 지구와 매우 흡사한 행성이었다. 지구의 땅과 바다의 면적을 가지고 있었고 생명활동의 가장 중요한 '산소'가 존재했다. 이를 발견한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새로운 행성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세계의 관심과 투자를 받은 E-NM는 사람이 살아갈 인프라가 구축되며 지구에서 E-NM를 자유자재로 이동가능한 우주비행선이 개발되고 발전해갔다. 세계적으로 돈 많고 권력있는 이들은 E-NM에 자리를 잡았고 뒤따라 세계 국가들도 E-NM의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세계 국가들은 곧 멸망한 지구의 땅에서 안전한 E-NM의 땅으로 국민들을 이주시킬 전 국가적인 계획이었다. 그렇게 긴 프로젝트는 빠르게 빠르게 진행되었다. 지구의 인구 절반이 E-NM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지구와 E-NM이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서로 교류가 가능한 상태로 남았다. 지구가 실질적으로 멸망하기 직전까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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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여주는 지구에 산다. 우주 과학자인 아버지의 연구 때문에 지구에 남았다. 여주는 평범하게 한국 고등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이다. 올해로 18살. 여주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온 소꿉친구 김운학과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을 보낸다. 학교에는 아이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들 지구를 떠나 E-NM으로 이주를 간 탓이다. 서울에 위치한 고등학교이지만 전교생은 남녀포함 100명도 되지 않았다. 물론 학년마다 한 반에 30명씩 넣어둔 꼴이다. 그래서인지 학년간의 거리감은 없었다. 지나가면 다 한번씩 마주친 얼굴들이라 학년 구분없이 두루두루 잘 지내는 분위기였다.
2.개 조심
야구를 좋아하는 김운학은 방과후 나와 한 학년 선배인 동현선배와 종종 야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야구에 관심이 없어서 그 둘을 구경하는 게 일상이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야구가 끝나기까지 기다리는 이유? 내가 동현선배를 남몰래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둘의 야구를 구경하다보면 해가 저물어갈 때에 우리 셋은 함께 하교를 한다. 난 그 시간이 좋아서 마냥 기다렸다. 야구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동현이 혀엉, 여기"
슈욱-
탁.
"아, 엇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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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재밌나? 정신없이 주고받네.
나는 운동장 계단에 쭈그려 앉아 야구에 빠진 그 둘을 구경했다. 시골 개처럼 헥헥 거리는 둘의 얼굴은 빨갛게 익었다. 그럼에도 햇빛 아래 비친 두 눈은 반짝였다.
"와, 더워..-"
땀에 전 김운학은 수돗가에 얼굴을 적셨다. 따라 김동현도 쪼르르 다가와 물을 축였다.
"으, 하~"
걸쭉하게 목 한번 축인 김동현. 그 뒤를 따라 김운학도 김동현을 따라했다.
"으-하~"
'둘 다 아저씨냐고...'여주는 생각했다.
"김여주, 나 등에 물 좀 뿌려주라" 김운학은 내 앞에 엎드려뻗쳐 자세를 하며 허리를 들어 올렸다. "아, 나도 나도-" 따라 동현 선배도 나를 향해 엎드렸다.
"... 감기 걸려도 난 몰라"
나는 양동이를 가져와 가득 물을 채워넣은 다음 그 둘의 등에 왈칵 쏟았다. 둘은 "아! 으아!" 소리를 내면서도 실실 웃었다.
빠르게 젖어든 교복셔츠 아래로 철렁.- 내게도 물이 튀었다.
"악, 차가워!"
"젖었어?ㅋㅋㅋ"김운학은 쿡쿡 웃어댔다.
"아,진짜...김운학;" 놀리는 꼴이 맘에 안 들어 남아 있던 양동이의 물을 김운학 머리 위로 부어버렸다.
"아! 악! 야..!!" 발바둥 치면서 일어선 김운학은 차갑다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왜, 네가 뿌려 달라며" 메롱. 혓바닥을 빼꼼 내밀고 달려오는 김운학을 피해 도망쳤다.
"...싸운다, 또" 동현은 익숙하게 한숨을 쉬면서도 말리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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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썩. 팔이 잡힌 순간, 운학은 나를 향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젖은 머리에 튕겨 나온 물방울들이 나의 얼굴을 적혔다. "아! 김운학!!" 짜증짜증을 내며 두 손으로 김운학을 머리를 덥썩 잡았다.
콱.-
나는 이빨로 운학의 머리를 콱 물고 늘어졌다. "악!! 아 머리!! ..머리!!" 운학은 물린 머리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머리를 무는 게 어딨어..!!" 그렇게 몇 초간 실랑이 끝에 둘은 합의했다.
3.갑작스럽게
"진짜 머리를 물어버릴 줄 알았냐고... 개야?" 운학은 여주에게서 물린 자국을 문지르며 말했다.
"시비 턴 게 누군데..--"
"싸우지 마 애들아~" 느긋하게 싸움 구경한 김동현은 그제야 말 한마디 꺼냈다.
"아니, 형. 형은 안 말리고 뭐 했어요; 으... 아파.."
운학은 버럭 욱하면서도 물린 머리에 얼굴을 찡그렸다.
"어디 봐, 머리에 구멍 났나-" 동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운학이의 머리를 보면서 말했다.
"어, 진짜로 이마에 이빨 자국 났다ㅋㅋㅋ" 동현은 킥킥 개죽이 웃음을 지었다.
"뭐?? 진짜??" 운학은 손으로 물린 이마를 더듬더듬 짚었다. 진짜로 앞니 2개로 추정되는 움푹 들어 간 자국이 느껴졌다.
"... 미안"
너무 세게 물었나 괜스레 미안한 여주였다.
"그래, 사이 좋게 지내야지~" 동현은 여주와 운학의 어깨에 양 팔을 걸쳤다.
흠칫.- 묵직한 동현의 팔이 어깨 위로 느껴졌다. 밀착된 동현의 왼쪽 얼굴은 물에 젖어 반질반질했다. 또르륵.. 머리 위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은 그의 목빗근을 타고 내려왔다. '아차, 너무 쳐다봤나' 라는 생각이 들 때 고개를 돌린 동현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 뚫리겠네, 왜?" 동현은 씩 웃었다.
"아뇨, 그냥..." 나는 말을 잊지 못하고 묵음.
쿵쾅 요동치는 심장소리 들릴세라 흡! 숨을 들이마셨다.
...
"형, 근데 언제 간다고요?" 곰곰이 생각하던 운학이 운을 뗐다.
"내일모레" 동현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
"동현 선배 어디가?" 머리 속에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야, 너 몰랐어..? 동현이 형 E-NM로 이주하잖아"
"...뭐?"
몰랐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언제 동현 선배가 나한테 말한 적 있었나? ...그럴리가.
"하하, 말 안 했던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동현은 말끝을 흐렸다.
"...진짜야? 정말이에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휙 동현선배를 바라보았다.
"응, 부모님 직장이 옮겨져서.. 그렇게 됐네"
돌아오는 답변은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었다.
"...왜 그걸 이제야, 왜 하필 지금.." 울상이 된 얼굴로 어깨 위 동현의 팔을 밀어냈다.
"..여주야?" 울상이 된 여주를 본 동현은 당황했다.
"나 먼저 갈래요"
탁.-
나는 그 둘을 뒤로 한 채 달렸다. 한 쪽 팔은 얼굴을 가린 채 뛰었다. 서운함에 몰려오는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방금 전 내 어깨 위로 동현 선배의 온기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누굴 놀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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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보물창고
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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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여기있었네" 운학은 뛰어왔는지 창고 벽을 한 손으로 붙잡고 헉헉 숨을 몰아 내쉬었다.
"...뭐야, 왜." 김운학인 것을 눈치 챈 여주는 창고 안에 쭈그려 고개를 들지 않았다.
"혼자 간다더니 네 집에선 아직 안 들어왔다고 하지, 해는 벌써 졌지. 그럼 네가 갈 때가 어딨어" 운학은 여주의 옆에 똑같이 쭈그려 앉았다.
"...어쩌라고" 자신의 패턴을 눈치 챈 김운학에 여주는 괜히 승질을 냈다.
어릴 때부터 여주는 안 좋은 일 있으면 창고 안에 숨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은 11살의 나이에 엄마를 보냈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비보에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다. 툭하면 창고에 숨어 든 이유는 매일 울상이 된 아빠의 모습을 보기 싫어서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어린 마음에서였다. 엄마가 자신의 곁을 떠난 것도, 그 때문에 아빠가 슬픈 것도 싫었다. 창고에 몸을 숨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있으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 안정감이 들었다. 그러나 외로웠다. 혼자라는 고립감에 무서웠다. 그때마다 저 바보 김운학이 창고 안으로 들어와 내 곁을 지켰다. 묵묵히 앉아 나를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도.
...
달그락달그락..-
운학은 태평하게 창고 안은 뒤적거렸다.
"어, 이게 여깄었네" 운학에 손에 야구 글러브가 들려 있었다. 얼마나 잊고 방치했는 하얀 먼지가 수북이 쌓여 공기 중으로 쾌쾌한 냄새가 퍼졌다.
"...집에 안 가냐?" 귀찮게 구는 김운학이 신경쓰였다. 지가 왜 저러고 있는지. 이해가 안됐다.
"이거, 기억나?" 운학은 낡은 야구 글러브를 들어올렸다.
"...그게 뭔데" 나는 둥한 얼굴로 물었다.
"나한테 가장 소중한 거 하나 씩 가져와서 어른이 되면 찾아가자고 했었잖아, 이렇게 창고에 두고 새까맣게 잊고 있었어!"
"...아, 맞다" 뭐..그 타임캡슐 뭐라나... 7년 전 김운학이 들뜬 얼굴로 하자하자 쫄랐던 기억이 났다.
그날 김운학은 자신의 최애 야구선수의 사인이 그려진 야구 글러브를 가져왔다. 미래에 세계제일 야구 선수가 되면 그때 쓸 거라나 뭐라나.....
그때 나는 뭘 가져왔었지?
운학이 작은 선물 상자 하나를 꺼내었다.
"찾았다"
선물 상자에는 엄마의 펜던트 목걸이와 어릴 때 문방구에 파는 보석 반지가 있었다.
"이 보석 반지 오랜만이다. 어릴 때 문방구에서 팔 던 건데ㅋㅋ" 운학은 신기한 듯 보석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내놔, 내거야" 운학에 손에 들린 반지를 낚아챘다. 문방구 500원짜리 보석반지였지만 나한테 소중한 물건이었다. 동현 선배가 줬던 의미 있는 선물이었다. 어릴 적 김운학과 싸우고 서러워 우는 날 동현선배에겐 그저 어린 나를 달래려 손에 쥐어진 반지였을지 모르겠지만. 내게 첫사랑을 가져다 준 소중한 선물이었다.
여주는 보석반지를 보며 잊고 있던 기억을 꺼내어 보니 김동현이 더욱 미웠졌다. 말도 없이 떠난다니 그런 게 어딨어. 왜 진작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이럴거면 주질 말지' 반지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그게 그렇게 좋아?" 운학은 쭈그려 앉아 나와 눈을 마주했다. 조금은 쳐진 얼굴로.
"좋긴 무슨, 이젠 손에 맞지도 않는 걸" 나는 새끼손가락 중앙에 끼어 들어가지 않는 반지를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그치만 소중한 거 잖아" 운학이 말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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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또 한번의 이별
김운학과 함께 동현 선배를 배웅했다. 동현 선배 마지막 가는 날까지 해실실해서는 이삿짐을 챙겼다.
"이삿짐은 이 정도면 충부 하지? 형" 운학은 마지막 짐을 차에 실으며 말했다.
"응, 도와줘서 고마워"
"... 고마우면 자주 놀러 와" 운학은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었다.
사내가 울긴 무슨..., 이라고 하기에 내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둘다 바보 똥개처럼 주인 못 보내 울상인 똥개 두마리였다.
"다들, 잘 지내. 보고 싶을 거야" 동현은 끝까지 싱긋 미소를 지었다.
"형, 잘가.."
"..." 나는 끝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앙 다물고 속으로 울컥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았다.
동현은 마지막까지 말 없는 여주가 신경쓰였는지.
"여주야, 잘 지내" 동현은 마지막으로 여주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으흑, 안 보러 오면 죽일거야..끅!" 섬뜩한 한 마디에 동현은 하하 웃음을 짓더니 "응, 그럴게" 돌아서는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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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여주는 또 한 번의 이별을 겪었다.
...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 여주와 운학은 19살, 마지막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운학은 심심했다는 듯이 투덜댔다.
"아, 진로 상담"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들었다.
"뭐라고 했어?"
"그냥, 대학 간다고."
"네가 대학을??" 운학은 크게 놀라며 물었다.
딱콩.-
"왜, 나는 가면 안 되냐" 김운학한테서 저런 말을 들으니 왠지 괘씸해 머리를 한대 쥐어박았다.
"악, 왜 때려어..!!"
"맞을 짓을 하니까 그러지"
"...허-"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학의 말수는 확연히 줄었다.
무슨일이지, 왠지 오늘따라 운학의 입꼬리가 쳐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슨 일 있어?"나는 물었다.
"별로,..." 운학은 말을 흐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대학 갈까"
"너도?"
"응, 너 가는데 따라갈래" 운학은 그새 다짐한 눈으로 말했다.
"내가 어디갈 줄 알고.."
"한국대..?"
"...E-NM 갈려고" 여주는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뭐? 그러면 동현이 형처럼 여길 떠날 거라고??"
운학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응, 아무래도 뉴스에서 곧 멸망이라는 말을 떠들어대는 지구보다 개발된 E-NM에 가면 보는 시야가 넓어지지 않을까.." 라고 말했지만 동현선배가 보고싶은 마음도 약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 운학은 침울했다.
6.좋아해,
...
그때부터였다. 김운학이 나를 피하기 시작한. 처음에는 애가 좀 기운이 없는 듯 했다. 그렇게 무슨일이 있는지는 죽어도 말 안 하더니 혼자 입을 꾹 닫아버렸다. 내 속은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야, 김운학 얘기 좀 해" 하교시간이 되자마자 김운학의 뒤를 졸졸 따라 붙었다. 하지만 운학은 끝내 못 들은 척 앞으로 나아가기 바빴다.
"야, 김운학!!!" 소리쳤다.
멈칫.-
"..."운학은 그 목소리에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그 틈을 타서 운학에게 달려갔다. 꿋꿋하게 몸을 세운 운학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었다.
"말 좀 해봐, 왜 자꾸 나 피하는데" 나는 답답한 속을 두들겼다. 하지만 김운학은 단단히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됐어, 말하기 싫음 하질 마." 운학을 붙잡 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보 김운학, 혼자 잘 먹고 잘 살 던가!!! 나는 대학도 가고 E-NM 가서 동현 선배도 만날 거야!!! 너 같은 거 안 봐도 돼!!" 버럭 소리쳤다. 그리곤 쉬익쉬익 숨을 내쉬며 운학을 앞질러 걸어갔다.
.
..
한 걸음, 두 걸음 내딛었을까.
화악.-
거센 힘이 뒤에서 날 끌어 당겼다. 몸에 중심이 뒤로 쏠리자 '넘어진다'라는 생각과 동시에 단단한 무언가에 뒤통수가 닿았다. 김운학이었다.
기울어진 몸은 김운학의 가슴팍에 기댄 상태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김운학 얼굴이 보였다. 물러 터진 홍시마냥 잔뜩 찌그려진 운학의 얼굴에서 투둑.- 눈물이 떨어졌다.
"...울어?" 순간 우는 운학이의 모습에 당황했다.
왜 지가 울어? 답답해 울고 싶은 건 난데.
"...지마." 운학은 작게 중얼거렸다.
"뭐?" 운학을 향해 돌아섰다.
"... 가지 마, 여기 있어." 운학은 단단히 다물던 입을 열었다. 한 번 터진 입에 줄줄이 입 터졌다.
"대학 가지 마, 동현이 형 만나러 가지 마. 나랑 여기 있어."
“…왜?”
“좋아해“ 벌게진 홍당무가 된 운학은 뱉었다.
”좋아해, 그니까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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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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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예상했던 상황이 아닌데. 김운학의 고백은 나의 하루를 엉망진창 뒤집었다. 날... 좋아해? 그 바보 김운학이?
철컥.-
"여주야 왔니" 아빠에 목소리도 듣지 못한 채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다다닥.-
"...또 사춘기가 오려나" 아빠는 푹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뉴스 속보입니다. 지난 8월에 관측된 위성에서 지구로 향하는 다량의 운석들이 지구의 궤도 안에 진입할 것이라 예상한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운석 출돌의 사례를 없으며 예상한다면 지구를 무사히 빗겨나갈 것이라 예측하는 전문가의 소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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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방문을 걸어 잠겼다.
도대체 언제부터? 왜? 나를? 묻고 싶은 질문들이 수두룩 튀어나왔다. 그렇지만 나는 동현 선배를 아직까지... 좋아.. 하나? 말을 끝맺을수록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김운학은 내게 바보 김운학이다.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너무 코찔찔이 어린 시절부터 함께 다녔기 때문인지. 초등학생때만 해도 나보다 작고 힘도 없는 초딩 그 이상도 아니였단 말이지. 지금은...
내 키를 뛰어 넘은지 오래이고 덩치는 산만해진 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날 잡아당긴 힘이… 저릿하게 살결로 느껴졌다.
그래, 솔직히 인정할게. 네가 남자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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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기다릴게
김운학의 고백 이후 우리의 사이는 조금은 서먹해진 채 청소년의 마지막 19살을 보냈다. 그래도 나름 화해는 했달까.
"나 스카우트 받았어" 운학은 명함을 들어 올리며 자랑했다.
"뭐야, 진짜?"
"응, 이제 네 대학 따라간다는 소리 안 해"
"...허, 올 수 나 있고?" 라 말했지만 왠지 섭섭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김운학의 꿈을 응원해줘야지.
"두고 봐, 세계최강 야구선수가 되어 올테니까"
"세계최강 이러네ㅋㅋ"
"...ㅋㅋ, 그러니까 그때 되면 다시 생각해 줘"
"응? 뭐를..?"
...
"..내 고백" 운학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어?" 훅 들어 온 고백에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미쳤어, 미쳤지. 저 바보 김운학. 이렇게 바보 같으면 내가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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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살 겨울, 원하는 대학에 붙었다. 김운학은 스카우트 이후 고된 훈련으로 얼굴 한 번 보기 쉽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올해 서둘러 졸업식을 진행하였다. 내년에 있을 졸업식이 19살 겨울로 앞당겨진 것이다. 그런 탓에 오랜만에 김운학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졸업 축하해" 꽃다발을 든 김운학은 웃으며 다가왔다.
"너도, 졸업 축하해" 오랜만에 보는 김운학의 얼굴은 조금 살이 빠졌달까. 그 작은 얼굴이 더 쏙 들어갔다. 아들 군대 보낸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것 같았다. 밥은 잘 챙겨 먹나 몰라.
"오늘 가는 거야?" 운학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응, 오늘 이삿짐 챙기고 아빠랑 가야지. 이젠 이곳도 안녕이다~"후련한 듯 말했지만 속은 아쉬운 마음만 가득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김운학과 누비던 학교 복도도, 수업중에 딴짓하고 떠들던 교실도, 밤새 게임을 한 탓에 수업시간마다 졸던 김운학도, 방과후 김운학과 동현 선배의 야구 공 날아가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리울 것 같았다. 이 모든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함께한 김운학이 가장...
보고 싶을 것 같아서.
"김운학" 나는 운학을 불러 세웠다.
"응?"
"너 고백 무르면 안 된다. 나 기다릴 거니까.." 말끝으로 눈물이 맺혔다. 졸업식에서 우는 건 흔한 일인데. 왜인지 더 눈물이 난다.
"..." 운학은 한참 말을 잊지 못하더니 내게 천천히 다가와 손을 건넸다.
"손, 줘 봐" 운학은 내 손을 가져가 웬 글러브 하나를 내 손에 끼웠다. 자세히 보니 김운학의 보물이었다. 자신의 최애 사인이 있는 낡은 야구 글러브.
'이걸 왜 나를..'이라는 얼굴로 운학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보석반지는 아니지만, 네가 가지고 있어. 내가 꼭 세계 야구 선수가 되어서 올테니까. 그때... 그때가 되면 보석 반지보다 더 예쁜 거 끼워줄게." 김운학 서서히 붉어지는 저 얼굴로 잘도 프로포즈를 한다. 웃기고 있네. 저 바보 김운학... 누가 프로포즈로 야구 글러브를 끼워주냐고. 그렇지만 김운학 다운 발상이라 봐줄만 하다고 생각한 나도 바보인가.
"당연하지, 나 보석반지는 졸업했어. 더 예쁜 걸로 가져와 그럼 받아줄테니까"
운학은 피식 미소 짓더니 "응, 알겠어" 내 얼굴은 운학의 품 속에 파묻었다. 훈련한다더니 단단해진 가슴팍에 숨쉴 틈이 없었다.
"읍, 숨막혀..."
"...조금만 더" 운학은 끌어안은 내 어깨를 꽈악 붙잡았다. 부모 품에 떨어지기 싫다는 아이처럼.
...
간질간질.
나는 운학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 잠만..!" 운학은 발작 놀라 뒷걸음 치며 몸을 움츠렸다. 간지럼 많이 타는 김운학은 자빠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 모습에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건 아니지~! 분위기 잘 타고 있었는데 이러는 게 어딨어~!!" 울컥 산통깨는 김여주가 미운 김운학이었다.
오랜만에 건드는 김운학의 반응은 역시나 바보 김운학 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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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식 이후 아빠와 함께 E-NM에 도착했다. 내 인생 우주비행은 처음이었다. 아빠는 뭐 인생의 절반을 우주선에서 보냈을 사람이라 무뎠겠지만.
*
"여주야, E-NM 도착했다며?"
반가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상 통화 속 동현 선배였다.
"응, 방금 우주 정거장 지났어"
"통행 절차 끝나면 연락해, 오빠가 밥 사줄게"
"오빠는 무슨..ㅋㅋ, 일단 알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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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현선배 1년 만인가. 지구와 E-NM 사이에 통신은 어려워서 자주 연락을 못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니 왠지 반가웠다.
"여주야, 가자"
"응" 아빠를 따라나섰다. 드디어 내가 19년 인생 처음으로 E-NM에 발을 디디는 순간이었다.
E-NM은 지구와 별 다를 것 없이 비슷했다. 산소도 도시의 풍경도. 지구와 조금 다른 점은 발전 속도가 빠르다는 점. 교통 수단도 문화 생활도 좋았으면 좋았지 별로인 것은 없었다.
지구에서도 E-NM에서도 지긋지긋하게 아파트에 사는 것만 빼면.
철컥.-
"이건 아니지... 또 아파트야?" 나는 한 숨을 퍽퍽 내쉬었다.
"그래봤자 한국이 사들인 땅이야. 그 땅 덩어리 얼마 되겠니. 미국 아님 중국이면 모를까" 아빠는 허허 웃음을 지으며 농담식으로 말했다.
"...아파트는 이제 지겨워요--"
"그럼 가서 미국 국적 따야지 뭐"
"...아빠,,농담 재미없어요"
"그러니?" 아빠는 아저씨 웃음을 지으며 짐을 정리했다.
E-NM에서의 적응은 빠르게 진행됐다. 대학생, 20살이라는 젊음은 두려울 것이 없다는 말이 맞았다. 생각보다 학교 적응도 친구관계도 원만히 잘 이루었다.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면 내 일상에 김운학이 없다는 것. 그게 조금 외로웠다. 그래도 종종 뉴스에서 김운학의 소식이 들려왔다. 저 바보 김운학도 야구 생활에 잘 적응했는지 스포츠 뉴스 제 1면에 당당히 김운학의 이름을 볼 수 있으니 내가 다 뿌듯했다.
그렇게 근근이 그의 소식을 들으며 지낸지 몇년이 지났을까...
띠링.-
*
뉴스속보입니다. 지난 번 지구 궤도에 진입한 다량의 운석들이 지구를 빗겨나갈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몇몇의 운석은 지구를 향해 떨어젔다고 합니다. 지금 전 세계 각 국에서 피해 사례가 전해집니다. 피혜국으로 추정되는 나라 미국 남부와 남부 유럽 아시아에 중국, 한국 등 여러 국가에서 피해를 입은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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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떨어졌구나" 아빠는 쯧쯧 혀를 찼다.
"...운석이 떨어져요? 한국도?"
"뭐.. 뉴스에서 하는 말이 한국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고 하던데"
"...어디에 떨어졌는데요?"
김운학은 괜찮겠지? 설마 무슨 일 있겠어... 라는 말은 정말이지. 예상을 빗겨간 적이 없는지. 그 암울한 예상은 일어났다.
지구에 다량의 운석이 떨어진 이후 아빠는 급하게 지구로 향하는 출장이 잡혔다. 지구에 떨어진 운석 보고를 하는 것이 아빠의 출장 목적이었다. 아빠의 출장은 조금 길어졌다. 2개월의 출장 계획이 5개월 좀 넘짓해서야 끝이났다.
나는 돌아오는 비행 앞에 아빠를 기다렸다. 돌아온 아빠의 모습은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돌아온 아빠에게 달려가 안겼다. 너무 보고 싶었다고. 그러나 아빠의 얼굴이 어두웠다. 왜지. 5개월 만에 보는 딸의 얼굴이 반갑지도 않은가. 왠지 섭섭해졌다. 집에 와서도 말을 쉬이 꺼내지 않는 아빠의 모습이 수상했지만 뭐 그동안 힘들었겠으니 쉬게 놔두는 것이 났겠거니..
...
그때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응? 뭐야 ㅋㅋ 이제야 좀 반가워요?"
"여주야, 일단 들어.."
"응? 왜 뭔데... 왜 뜸들여?" 진지한 얼굴의 아빠가 나의 손을 꼭 잡고 말을 망설이는 모습을 보니 왠지 긴장되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번에 운석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단다" 무겁게 입을 연 아빠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알지, 뉴스에서 난리였잖아"
"그래, 그 사고에... 운학이도.."아빠는 참아 말을 잊지 못하였다. 떨리는 입술에 슬픔을 참는 아빠의 구겨진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았다. 이런 아빠의 얼굴. 엄마가 돌아가실 때에 그 얼굴이었다.
"...아니야, 아빠. 무슨.. 동명이인이겠지" 나는 부정했다. 아니야. 아닐거야. 김운학이 왜. 올해 있을 세계 대회에 야구 훈련으로 바쁠 김운학이 왜.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잖아.
"..." 아빠는 말없이 내 손에 작은 상자 하나를 쥐여주었다. 아무리 봐도 프러포즈 때 쓰는 반지 케이스였다. '이걸 왜...' 나는 상자 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 안에는 야구공 모양이 새겨진 링 반지였다.
그리고 반지 옆에 작은 편지지가 눈에 들어왔다.
편지를 차마 읽을 수 가 없었다. 하얀 편지지에 비친 검은 글씨체가 김운학이었다. 내가 김운학 글씨체를 잊어버릴리가 없다. 12년 학교생활을 너와 함께 했는데. 네 글씨체 하나 잊을 수가 있을까.
"여주야, 읽어 봐야지... 그래도 운학이가 네게 보내는 편지일 텐데"
***
여주야, 잘 지내?
나는 곧 있으면 세계권 경기를 앞두고 있어.
나 정말 세계 최강 야구 선수가 되어서 돌아올 거야. 그때 내 고백 받아준다고 약속한 거 잊지마!
나 그 힘으로 힘든 훈련도 버티고 있는 중이거든!!-3-
야구 글러브 대신 내 손에 반지를 끼워줘야겠다고 마음 먹은 지도 몇년이 흘렀어. 이제 드디어 야구 글러브 대신 반지를 전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반지 디자인에 야구공이 박혀 있긴 한데! 너도 좋아했으면 좋겠다... 문방구 보석 반지보다 비싸고 예쁜거야!!ㅎㅎ
나 경기가 끝나면 E-NM으로 갈 예정이야.
그때 이 반지 내게 끼워줄게.
우승해서 돌아갈게, 조금만 기다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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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김운학, 네가 반지 끼워줘야지.
...
나는 편지를 가슴에 묻고 주저 앉았다. 이렇게 울어 본 적이 있었나. 그 자리에서 목놓아 울었다. 문방구 보석 반지보다 예쁘면 뭐해. 네가 없는데. 이 반지 끼워줄 네가 여기 없는데. 내가 좋아할 것 같냐고. 바보 김운학... 너 같은 거 기다리지 말걸. 나 떠난 날 그때 함께 갈걸. 그러면 영영 헤어질 일 없었는데. 왜. 왜. 야구 같은 거 하지 말지. 나는 괜한 야구에 화풀이했다.
아빠는 주저 앉아 슬픔에 잠긴 나를 끌어 안았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 대한 슬픔을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여주에게는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을 일이었다. 무정한 세상이 그저 원망스러웠다.
한동안 밥도 잠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멍하니 하루하루를 지나 보냈다. 슬픔이 가시기까지.
무뎌졌나 싶으면 또다시 터져 나오고 내게 남은 추억들이 날 그리움 속에 가뒀다.
그날도 침대 위 창가에 기대어 앉아 추억에 잠겼다. 교복 셔츠 위로 김운학의 맑은 미소를, 따뜻한 온기를 품은 그의 품을, 단단하게 날 잡아주던 그 침묵을 내가 어떻게 잊고 살아가는가.
창가 앞에 두었던 야구 글러브를 멍하니 보았다. 세계 최강 야구 선수가 되겠다던 그의 꿈이 보였다. 나한테는 그런 것 필요 없는데. 너만 있으면 된다고. 아직 좋아한다고 말도 못 했는데. 전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은데. 들어줄 네가 없다.
***
김운학의 낡은 야구 글러브 위로 야구공이 반짝였다. 문방구 보석 반지보다 예쁘다더니 지 닮은 것을 사 왔나. 반지 링 위로 새겨진 야구공. 바보 김운학 야구 사랑 어디 가나. 누가 프러포즈 반지에 야구공을 새기냐고... 진짜 바보 김운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