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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딱똑딱, 가냘픈 시계 초침 소리가 차가운 둘 사이를 메웠다. 아무런 음성도 공기속에 스며들지 않아 이 정도라면 식은땀이 줄줄 흐를만도 했지만, 긴장되지 않았다. 설레지 않았다. 떨리지 않았다. 다급하고자 간절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얼만큼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못하는 냉랭함은, 대체 어디서부터 찾아온걸까. 대체 언제부터 서늘하게 둘 사이를 적셔온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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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아프지만 서로를 놓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장미이며 그런 가시에 얽혀 고통스러워 벗어나질 못한다. 꽃잎은 보라색이었다. 마젠타였다고 해도 믿을만한 아득함이었다. 처음부터 마젠타는 아니었다. 분명 새빨갛게, 본인의 혈액을 가져다 바치는 모습마냥 붉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빛깔이 어두워지더니 금방 바랬다. 마른 장미처럼 보라색이 되었다. 서로 매일 행방을 알 수 없을때마다 꽃잎처럼 마른 입술만 달싹이며 고요를 깨지 못했다. 우린 거슬러 올라갈 수 없을 만큼 말라버렸으며 삭막했다.
" 어디 다녀왔어. "
김여주,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끝에 물음표가 붙지 않는다. 일정한 톤에 일정한 표정이다. 이젠 익숙해진 듯해. 되풀이되던 질문에 마른 목소리가 갈라져 차가운 공중에 편린처럼 깨져 이리저리 튀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그를 응시하지 않았으며 그럴 일말의 생각조차 보이지 않는 듯 했다.
" 이미 알면서, 왜 물어봐. "
김민규, 그 역시 끝엔 물음표가 붙지 못했다. 그 역시 그녀를 응시하지 않았다. 서로 엇갈려 이리저리 엉킨 시선이 공중에서 흩어져 비가 내리는 듯 했다. 비가 둘 사이를 막아 마음이 닿지 않는 느낌이다. 아니, 더 이상 마른 꽃잎은 향을 내지 못하겠지. 떼어진 물음표마냥 생기가 식어버렸겠지. 앞으로 몇 번의 접전도 없었다. 서로를 만나도, 시선이 맞닿아도, 금방 앞에서 서로의 향을 맡아도, 설레지 않았다. 떨리지도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도 않았다. 유흥업소에서 서로를 마주치는 것 따위야 익숙해져버렸다. 익숙해지면 안될 터인데, 그러면 절대 안됐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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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마른 꽃잎 새로 가뭄이 들듯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굉음을 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마주쳤으며, 이번엔 그가 흔들렸다.
" 바람 좀 쐬자. "
그가 살며시 그녀의 손을 맞잡았으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잡은 손엔 온기가 없었다. 사랑이 없었기에 그녀도 흔들렸다. 둘은 밖으로 나가 쌀쌀한 공기를 마주했다. 마른 꽃잎이 차가운 칼바람에 가루를 내며 서서히 부서지는 듯 했다.
" 우리가 대체 어떤 사이야? "
그가 그녀를 나쁘지 않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물음표가 붙었다. 말라 부서진 꽃잎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묵묵부답이었으며, 그 또한 같았다. 아무도 이 터널의 끝을 알지 못했다. 터널의 끝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는 서로의 발걸음을 둘 중 어느 누구도 맞춰줄 수 없었다. 그가 마른 세수를 해댔다. 다시 한 번 말라버린 꽃잎이 부서졌다. 꽃잎이 새카맣게 변했으며,
" 끝낼래? "
곧 가루가 될것만 같았다. 역시 물음표가 붙었지만 절대 생기가 돌지 못했다. 목소리가 높아지지도 않았다. 체내의 수분이 모두 빠져나가는 듯 했다. 이미 둘은 인지했다. 서로가 약속을 잡아도 기다려지지 않고, 함께 있어도 지루하기만 했으며, 손을 맞잡아보아도 온기는 없었다. 마른 꽃잎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사랑이 모두 식었다.
" 그러자. "
그녀가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고혹적이었지만 설레지 않았다. 관능적이었지만 온기가 없었다. 마침내 가루가 되어 날아가버린 꽃잎은 공기 중을 떠돌았으며, 그게 마치 서로의 폐에 스며드는 듯 했다. 어딘가 막히는 듯 했지만 동시에 뻥 뚫렸다. 둘 중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은 맞물려있었다. 시선만은 공기 중에서 부서지지 않았다. 온기도 냉기도 없는 애매하고 애틋한 시선이 맞물렸다. 여전히 차가운 공기가 둘을 맞았지만, 지금 서로의 심장보다 차가운 건 없었다. 이미 떨쳐냈지만 정작 공식적인 결별 앞에 심장이 차게 식어들어갔으며, 심박수는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쿵 내려앉지도 않았다. 굉음이 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고요하고도 차가운 장미의 멸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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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구심이 들어 우스웠다. 그 냉랭함에 정이라도 든 것인가? 말라 바스라진 꽃잎이 그리운것인가? 왜 이제서야 아픈 것인지. 터널은 이미 끝났으며 맞물리지 못한 시선은 이제 다신 공기 중에 부서져 어느 날 밤의 유성우처럼 흩어져 내리지 못하는데. 앞서 걷다 문득 뒤돌아보면 서로에게 무심하던 서로가 있었다. 하지만 이젠 더이상 걷지 않는다. 말라 비틀어져 굉음을 낼 장미도 없으며 바깥 바람이 마냥 차갑기만 하다. 곁에 있을땐 일말의 관심조차 없던 것이 끝나고보니 물밀듯이 밀려왔다. 다시 행한 곳은 이별을 고한 유흥업소였다. 여전히 그들은 구애의 춤을 추었으며 모두들 탐욕에 찌들어있었다. 다를 바 없었다. 편하게 스며들었으며 금방 그들과 같아지려했다. 그저 저 멀리 있던 그녀의 눈동자를 관통하기 전 까지는.
" 김여주-… "
무심코 뱉어낸 그녀의 이름은 시끄럽고 기괴한 음악에 파묻혀 닿지 못했다. 그녀 또한 같았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심장이 내려앉았다. 쿵, 쿵, 쿵 심장이 울려 발 끝까지 저려오는 듯 했다. 인파 속을 헤쳐 그녀를 향해 가다 멈칫했다. 잠깐, 다시 만나 뭘 하지. 전과 같은 냉랭함만? 말라 바스라진 꽃잎이 찬 바람에 휘날리는 고요함에 스스로 뛰어들게? 아니, 저는 못했다. 불가능했다. 그녀는 결국 눈 앞에서 그날의 꽃잎과 같이 사라졌다. 손발의 저림과 동시에 심장이 쿵쾅대며 아려왔다. 터널을 눈앞에 두고있다. 다만 휩쓸려오는 두통에 그곳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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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게워내니 편했다. 옆 바닥에 주저앉곤 벽에 기댔다.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제 입술을 스쳤더니 입술이 갈라졌다. 꽃잎처럼 바스라지는 듯 했다. 바스라지다 못해 휘날려 흩어졌다. 주워담지 못할 만큼 이리저리 흩어진 꽃잎 속 생기는 걷잡을 수 없었다. 아, 환상인가. 그녀가 앞에서 저를 응시한다. 시선이 맞물렸다. 몽롱한 제 정신을 붙잡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저를 부축해 옮겼다. 도착해 대충 둘러본 곳은 건물 내부였다. 말라 흩어진 꽃잎이 속속히 모여드는 듯 했고, 곧 그게 형체를 만들어 제 모양의 꽃잎이 되었다. 새빨간 장미가 피었다. 눈 앞이 관능이자 매혹이었으며 꽃향기에 정신이 아득했다. 입술을 달싹였고, 뜨거운 공기가 둘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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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렸다. 아니, 눈을 떴다는 표현이 정확할까. 제 옆엔 그녀가 누워있었다. 서로는 같은 이불을 덮어 의지했다. 결국 꽃이 피어버리고야 말았다. 터널 앞에 서로가 서있었다. 생기 가득한 꽃잎이 둘을 감쌌으며 꽃향기가 온기와 함께 뒤섞였다. 깨어난 그녀가 그를 보며 살풋 웃었다. 냉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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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잡은 손엔 온기가 가득했으며, 함께 걷는 터널 속에서 발 맞추어 걸었다. 생기 가득하게 피어난 서로의 장미는 또 둘을 진득하게 엮어오고 있었다. 꽃잎이 서로 얽히며 향기가 물씬 섞였다. 행복하게 웃었다. 피어나는 가시를 보곤 혈액을 바칠수도 있다며 붉게 물든 장미를 따다 또 살풋 웃었다. 장미 꽃잎의 끝이 점차 보랏빛으로 변해가는 것조차 모르는 채로, 살며시 피어나는 가시가 곧 서로를 죄여오며 괴롭게 놓지 못할것을 또 전혀 모르는 채로. 우린 이 터널의 끝을 알았을 지도 모른다. 장미가 지면 터널이 끝나겠지. 장미가 져버리면, 꽃잎이 마르는 게 아니라. 장미가 때가 되어 꼭 져버리면, 그때는 꼭 ...
빨간 장미의 꽃말: 열정, 정열, 사랑의 절정
분홍 장미의 꽃말: 행복한 사랑, 사랑의 맹세
보라 장미의 꽃말: 영원한 사랑, 불완전한 사랑
검은 장미의 꽃말: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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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장미는 사계절 내내 피어 1년 내내 지지 않는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