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아이돌

01: 우리 학교에 아이돌

샤프심과 종이가 마찰하는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아 숨막힐 정도로 고요한 교실 분위기에 조용히 눈을 굴리고 있던 우석이 풀고 있던 문제집을 덮었다. 선생님은 바로 앞에서 자신을 보고 있고 주위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공부에 집중이 어려웠다. 아직 생생한 문제집 표지 위로 표지가 흐물해진 공책 하나가 올라온다. 우석은 집중하기가 힘들어질 때 이 공책에다가 글을 쓴다. 그 글은 일기일 수도 있고, 소설일 수도 있고, 그냥 아무 말이나 써놓은 글일 수도 있다. 어떤 내용이든 글자 몇 개를 적다보면 긴장이 풀려서 다시 집중이 잘 된다. 적어도 우석한테는 그렇다.


오늘은 언제 문학시간에 배운 작품에서 기억나는 구절을 써내려갔다.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그냥 말이 좋아서 써본 건데 막상 공책에 옮겨서 써보니 오글거려서 주위를 둘러봤다. 2학년 국어시간에 처음으로 접한 작품인데 가장 우석한테 콕 박힌 시였다. 장석남의 ‘번짐’.


“아, 너희 그거 아니?”


이 자습시간에 정적이 가득한 건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본능에 충실해서였다. 눈을 감지 않고 뭐라도 하고 있는 학생은 우석을 포함해도 한 손으로 셀 수 있다. 2학년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난 뒤 당연하게 주어지는 자습시간인데 너무 많은 애들이 자고 있는 게 불편했는지 음악 선생님은 입을 열어 색다른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에 아이돌그룹 멤버인 학생이 있는데, 1학년 애들 중에.”


아까 쓴 시 속 구절 순서가 뒤죽박죽인 것 같아서 공책만 쳐다보고 있던 우석이 고개를 살짝 들어 선생님을 응시했다. 같은 학교에 아이돌이라니. 아이돌이랑 자신이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도 신기했고 아이돌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도 신기했다.


“입학했을 때부터 연습해야 한다고 툭하면 조퇴하고 그랬는데 결국 데뷔는 했더라. 너희는 잘 모르는 얘긴가? 1학년 애들은 그 학생이 있는 반 복도 창문에 포스트잇 붙여놓았던데. 데뷔 축하한다고.”

“어떤 그룹이에요?”


이 얘기가 몇 명한테는 나름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방금까지 졸거나 자고 있다가 이제는 선생님이 하는 얘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뭐 대부분의 아이들한테는 그 흥미도 오래가지 못했지만 우석은 아니었다. 공책에 뭘 잔뜩 쓰느라고 선생님 말씀은 귓등으로 듣는 것 같아보였지만 사실은 그 아이돌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룹명이랑 나이, 딱 거기까지만 쓸 수 있었다. 선생님한테 그 아이돌의 이름을 듣지는 못했다.


애들이 더 이상 자기 얘기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 선생님은 자기가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돌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는데 그걸 물어보기도 뭐했던지라 우석은 다시 문제집을 펼쳐 공부나 했다. 문제들을 풀어가면서도 우리 학교를 다닌다는 그 아이돌은 누굴까 라는 생각이 계속 우석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집에 가자마자 우석은 그룹명을 검색했다. 우석보다 한 살 어린 멤버가 여럿이다. 그래서 우석이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이름을 그룹명과 함께 검색해봤더니 나오는 게 없다.


“중소기획사 신인이긴 하네. 딱히 같은 소속사에 그룹 홍보해줄 선배 연예인도 없는 아이돌.”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은 더더욱 뜨기 힘든 조건을 가진 아이돌이다. 정말 특출난 그룹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나름 아이돌들한테 관심이 있는 우석은 아직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아이돌 멤버가 불쌍해졌다. 물론 슈스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러기까지의 과정이 아마 눈물나게 힘들테니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룹에 대해 더 검색을 하던 중 바로 옆 중학교 출신 멤버를 찾아냈다. 서울 밖 중학교 출신은 이 멤버 뿐인데다 나이도 우석보다 한 살 어리다.


“얘네. 우리 학교 아이돌.”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게 확신한 우석은 그 멤버를 자세히 살펴봤다. 이름은 이한결. 키는 우석 기준에서는 나름 큰 것 같고. 피지컬이나 비주얼이나 다 괜찮았다. 그룹 내에 비주얼과 센터는 따로 있다고는 하지만. 궁금한 마음에 데뷔 뮤직비디오를 틀었다. 그 멤버가 뮤직비디오 속에서 눈에 들어올까 궁금해서.


“노래가... 막 뜰 노래는 아닌 것 같아.”


그 멤버 얼굴만 외웠다보니 뮤직비디오 속에서 한결을 찾아내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무대 영상에서도 마찬가지다. 파트가 많지는 않지만 나름 귀에 잘 들어오는 파트를 맡은 것 같았다. 문제는 나름 여러 아이돌들 노래를 들어봐서 거의 모든 아이돌 노래를 좋아하는 우석의 귀에 데뷔곡이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냥 데뷔곡으로 아주 무난한 곡이었다.


“그래도 스타트로는 괜찮으니... 나름 기대해 볼 만도 한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저건 지나치게 주관적인 평가였던 것 같다. 생판 남이지만 그래도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벌써 이한결을 응원하기 시작한 김우석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우석이 이 날 이후로 이 멤버나 그룹에 대해 열심히 찾아보았던 건 아니다. 그냥 우리 학교에 이런 아이돌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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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너 학교는 앞으로 어쩔거야? 예고로 전학갈거야?”


학교 얘기를 꺼내는 친구에 한결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 아직은 그거에 대해서 생각 안 해봤어. 우선은 계속 여기 다녀야지.”


한결이 숙소에서 학교까지 통학하는데 차로 기본 1시간이다보니 많이 힘든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툭하면 수업시간에 졸다가 지적받기도 하고 그랬다. 그러면서도 한결은 예고로 갈 생각을 깊게 하지 않았다. 그냥 이 동네에 있는 애들한테 정이 너무 많이 들었다. 이제 데뷔를 했으니 학교에 자주 나오지는 못하겠지만, 학교를 옮겨버리면 완전히 여기 애들이랑 연이 끊어질 것 같았다. 이 학교의 전교생과 친한 건 아니지만 왠지 여기를 뜨면 모든 친구들과 헤어지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아서 한결은 예고 편입을 고려하지 않았다.


“통학하는 거 많이 힘들텐데.”

“난 왕복 2시간이어도 쌩쌩하니까 네 몸 관리나 잘해. 툭하면 코피 터지는 게.”

“이씨. 걱정해줬더니.”


조금 놀렸더니 욱하는 친구에 깔깔거리던 한결은 친구의 말들을 생각하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걱정이 안되는 건 아니다. 학교 문제보다는 앞으로 아이돌 활동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데뷔만 하면 남들보다 더 앞선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까딱하면 확 뒤쳐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포스트잇 징하게도 붙였네. 아오, 이걸 언제 다 떼냐.”


살짝 우울해지려던 찰나 청소당번인 애가 투덜거리는 소리에 한결은 피식 웃었다. 한결은 이제 데뷔한지 일주일이 된 신인 중에 신인 아이돌이다. 벌써부터 앞날을 걱정하기엔 아직 한 발짝도 온전히 떼지 못했다. 앞날 걱정은 우선 몇 걸음은 더 걸어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데뷔의 기쁨이나 좀 더 누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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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고삼이라는 소리를 자꾸 듣다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기분이다. 어느덧 연말에 하는 학교 축제날이 다가왔다. 우석은 학교 축제를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각 동아리 별 체험시간에는 자유롭게 활동이 가능하지만 (사실 우석도 동아리 체험 부스를 지켜야 한다) 장기자랑 시간에는 무조건 강당에 모여있어야 하니까. 심지어 화장실도 쉽게 안 보내준다. 점심 먹고 바로 조퇴해버리고 싶었지만 그 날 조퇴하는 것도 생기부에 남기 때문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학교 축제 너무 귀찮아.”

“기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는 동아리 체험 부스 준비할 의욕이 뚝 떨어지죠.”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서 체험 부스를 준비하던 중 투덜거리던 우석은 깐족거리는 부기장한테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하나를 던졌다. 어차피 찌그러져서 쓸 수 없는 장식이다.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는지 이번에는 부기장이 엄청 투덜거렸다. 우석은 계속 투덜거리는 부기장은 무시한 채 차기 기장인 1학년 아이한테 마무리 작업을 부탁하고 교무실로 갔다. 동아리 선생님한테 방금 올해 학교 교지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전교생한테 교지 나눠주는 건 다음 주에 할거고, 우선 학교 축제 때 필요한 몇 권만 가져가.”


완전 새 책이니라 조심히 교지를 세팅하던 우석은 호기심에 한 권을 집어들었다. 몇 달 동안 생고생을 하면서 만든 교지인데 당연히 이 교지를 얼른 받아서 읽고 싶었던 우석이다. 자신이 쓴 기사나 모아온 자료들 위주로 읽던 우석은 학급별 소개 페이지에서 머뭇거렸다. 정확하는 1학년 학급별 소개 페이지에서.


“걔 이름이 있으려나.”


반별로 학생들끼리 꾸미는 페이지다보니 우선은 반에 있는 모든 아이들 이름을 적은 반이 수두룩했다. 혹시 이 중에 이한결도 있을까 싶었던 우석은 1학년 모든 반의 학급 소개 페이지를 꼼꼼히 살펴봤다. 맨 끝반에서는 랜덤으로 친구 이름으로 삼행시를 했는데 가장 눈에 띄는 삼행시가


이 이야

한 한결아

결 결국 그렇게 되었네


였다. 분명 이 삼행시는 한결이 데뷔하기 전에 누군가가 쓴 걸텐데, 데뷔할 걸 확신하고 있던 모양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디스인가 싶은 이 삼행시가 우석네 반 학급 소개 페이지보다 더 재밌었다.


“걔는 이거 받으려나. 전교생한테 나눠준다고는 하는데...”


어쩌면 한결은 교지를 나눠주는 날에 학교에 나오지 않아서 못 받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섭섭해진 우석은 교지를 내려놓으면서 중얼거렸다.


“교지 안 받을거면 학교 축제 때 공연이나 해줬으면 좋겠네. 덜 지루하게.”


그렇게 내뱉은 본인의 말에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자신이 얘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은거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