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느리면서도 빠르게 흘러갔다. 하루는 참 느리게 지나가는데 일주일, 한 달은 금방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수능이 끝난 이후의 시간은 늦게 다가오는데 수능은 금방 다가왔다.
“너 어차피 논술 아니냐?”
“최저점수.”
“아.”
수험생이라면 수능이 끝나면 마음 속 짐이 많이 덜어지는 셈이다. 수능이 더 중요하냐, 논술같은 시험 자체가 더 중요하냐 우위를 가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수능만을 바라보며 지난 1년을 보내지는 않았던 우석한테도 인생의 최종 관문 느낌이 드는 그 날이 훌쩍 다가왔다.
사실 우석은 이 날을 요란스럽게 맞고 싶지 않았다. 수능을 지금까지 봤던 모의고사들처럼 그냥 하나의 시험처럼 생각하고 싶었는데 학교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수능 전날 3학년들을 강당에 부른 것까지는 괜찮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나 되어서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을 듣는 건 좀 그랬지만 수능 유의사항을 확실하게 안내받는 건 나쁠 것 없으니까. 평소보다 훨씬 일찍 하교할 수 있는 건 아주 좋았다. 학교에 오래 있어도 하는 건 자습밖에 없으니까. 문제는 하교를 하기 위해 강당에서 나와 교문까지 걸어가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수능 출정식은 멘탈 강화 프로젝트지? 짜증나는 상황에서도 침착하라고.”
“좋게 생각해. 모르는 사람들도 날 응원해주는구나하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까지 진심없는 응원 받고 싶지 않아. 부담스럽기나 해.”
투덜거리면서 강당 밖으로 나와보니 1, 2학년 후배들이 쫙 서있었다. 각자 풍선이나 슬로건을 든 상태로 말이다. 정말 전교생이 와있는건가. 운동장이나 구름다리에도 학생들이 있는 걸로 봐서는 전교생이 다 모인 모양이다. 수능이 뭐라고.
빨리 집에 가버리고 싶었지만 서둘러 지나가기에는 후배들이 에워싸고 있는 길이 무척 좁았다. 바닥에 깔려있는 게 없어서 그렇지 수능 출정식은 무슨 연예인이 레드카펫을 하는 느낌이었다. 곧 본인도 저 길을 걸어가기는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다른 길로 빠지면 안되나 싶어졌다. 정식 하교시간은 아니라 열려있는 교문은 정문 뿐이었다. 진지하게 담을 넘어볼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우석은 친구들과 같이 구석에 있던 한결을 발견했다. 한결은 나름 수능 출정식이 재밌었는지 열심히 풍선을 흔들며 “화이팅입니다!”를 간간히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귀여워서 잠시 웃음이 터진 우석이었다.
“갑자기 왜 웃어? 아, 이한결 땜에?”
“연예인하던 애가 여기서 저러고 있으니까 좀 신기해서. 내가 연예인이고 쟤가 팬이 된 것 같달까.”
“그러니까 김우석이 연예인 병에 걸렸다고?”
“무슨 결론이 그렇게 나냐?”
강당 앞에서 오래 기다려서인지 거의 모든 3학년 학생들이 정문 밖으로 나간 후였다. 그제야 정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 우석은 괜히 한결이 있던 쪽을 돌아봤다. 자기도 모르게 그랬다.
-
“넌 수능 출정식이 재밌었냐? 풍선 엄청 흔들던데.”
“막 재밌었다기보다는 신기했어. 내가 수능 출정식에서 풍선을 흔들거라는 생각을 못해봐서.”
중학교 졸업 직전에 연습생이 되어 작년에 데뷔한 한결은 작년 수능 출정식 때 스케줄을 하느라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수능 출정식이 뭔지 정확히는 몰랐다. 그저 애들이 내년에는 수능 출정식 안했으면 좋겠다고 투덜거리던 소리나 좀 들었을 뿐이다. 확실히 재밌는 행사는 아니었지만 한결한테는 나름 뜻깊은 행사였다. 수많은 학생들 틈에 끼어서 선배들을 응원하는 자신이 다시 평범한 학생이 된 느낌이 들었다. 막 좋았던 건 아니었지만 싫지도 않았다.
“근데 이런 거에 감동을 받기도 하나 봐. 어떤 선배 울먹이던데.”
“헐. 진짜?”
“맘에 안 들어하던 선배도 있던데. 엄청 싫어하는 티 내다가 마지 못해서 걸어가더라.”
수능 출정식과 곧 다가오는 지필평가 때문에 오후 수업은 전부 자습시간이 되었다. 수능만 끝나면 고3은 너희라는 소리를 듣고는 있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건지 이들에게 자습시간은 쉬는시간이 되었다. 제발 떠들지는 말라고 선생님이 핀잔을 줘도 큰 소용이 없었다. 반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한결도 공부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이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싶어서 교과서를 피긴 했지만 단 한글자도 눈에 담지 못했다.
한결은 그냥 오늘 공부는 포기한 채 아까 수능 출정식에서 자기 쪽을 몇 번 쳐다본 우석을 떠올렸다. 우연히 뒤돌았다고 하기에는 자신이 있는 쪽을 유독 쳐다보던 우석을 떠올리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석이 한결 쪽을 바라봤다고 한결을 바라본 것이라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한결은 우석이 자신을 본 것이라 이미 결론 지어버렸다. 마치 좋아하는 가수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어준거라 주장하는 팬처럼. 그 생각은 한결이 아이돌 활동을 할 때 우석이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은 꼭 두 사람의 역할이 바뀐 것 같았다. 나만의 아이돌을 바라보는 팬과 나만의 팬을 모르는 아이돌이.
“...왜 내 팬이라고 가정하는거지.”
팬이 아닐 수도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시무룩해지는 한결이다. 꼭 팬이 아니라도 자신을 알아볼 수도 있었고, 자신을 알아봤다면 신기한 맘에 계속 쳐다봤을 수도 있었다. 지난 학기에 역사 선생님을 찾기 위해 3학년 교무실로 갔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는 바람에 교무실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지 않았던가. 한 번 한결을 알아봤고, 하도 자주 보니까 볼 때마다 금방 알아보게 된 것일테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결은 우석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었다. 지금 한결한테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였다. 이제 고등학교 졸업까지 1년 남짓 남았는데 뭘 해야하는건지 막막했다.
-
빠르게 다가온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고, 느리게 다가오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는 중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결과 발표도 났다. 그리고 이제 우석한테 남은 건 대학교 입학 준비였다. 그것도 본인이 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학교로 말이다.
“솔직히 네가 여기로 갈 줄은...”
“언제는 너라면 어디든 붙을거라고 응원해줬으면서.”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였지. 그리고 여기가 그 어디든이냐?”
어쩌다보니 승연과 같은 학교로 가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를 대학교에서도 만난다니.
“너무 싫다.”
승연의 합격통지서를 확인한 우석의 농담에 승연은 너무하다며 아프지 않을 정도로 우석의 등을 쳤다. 사실 싫을 것도 너무할 것도 없었다. 합격하지 못해서 재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 순간에는 그랬을텐데 합격통지서를 받았다면 더욱 그렇다. 온리 정시를 밀던 친구들을 놀려먹을 여유도 생겼으니.
“그러게 면접이나 논술이나 자소서나 뭐라도 좀 해보지 그랬어. 응?”
모의고사 때보다 성적이 조금은 떨어진 친구한테 장난쳤더니 돌아온 건 쌍욕이었다. 성적 조금 떨어진 게 총 두 문제 틀린건데 저렇게 시무룩할 일인가 싶었다. 솔직히 방금 우석한테 놀림은 받은 애가 우리 학교에서 수능을 제일 잘 봤다. 그래서 한 번 놀려본건데 아직 수험생인 친구는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우석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학교를 PC방으로 만든 친구들이 있는 교실로 들어갔다. 반 친구들이 담임선생님과 같이 게임하는 모습을 무려 학교 교실에서 볼 줄은 몰랐다. 이게 말로만 듣던 수능이 끝난 고3 교실이었다.
“혹시 김우석 있... 아, 교무실로 좀 와주겠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