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서점•

단| 나만 널 사랑할게.

- 넌 나를 진지하게 생각하긴 하는걸까






제작년이었다. 내 모든 것을 줄만큼 사랑했고, 그만큼 잃었던 경험은.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 그 실망을 한껏 안았던 게 바로 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모두가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로 쩔어있을 때쯤, 나도 별다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을 보낸 겨울방학에는 남들과 똑같이 걱정이 앞섰고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했다.


3월 2일 2학년 첫등굣길은 너무나 무거웠다. 10분 거리에 살았던 나는 큰 키의 남학생들 사이에서 땅만 보며 걸었다. 흔히 부르는 인싸도, 눈에 띄는 모범생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저그런 사람이었고 사교성도 워낙 좋지 못해 친구 두 명과 함께 다녔다.

두 명과 12반 중 같은 반이 될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관했다. 조회시간 전부터 아이들은 수다삼매경이었고 그 사이에서 나는 오히려 존재감을 뽐냈다. "말 없는 주연" 이 내 별명일 정도였다. 내 옆엔 한 남자애가 앉았다. 키도 훤칠하고, 얼굴부터 비율까지 죄다 연예인같아보였다. 요즘 잘나간다 싶은 왠만한 아이돌보다 더 멋있었다. 하지만 예의바르고 착한, 그야말로 바른 어린이를 선호하던 나는 그의 행동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가식적인 여자애들과, 그들이 좋아하는 그 남자애는 매번 쉬는시간마다 아이들에게서 무언가를 뺏어가곤 했다.

'그래도 쟤 연예인 하면 돈 걱정은 없겠다...' 싶은 애. 걔가 바로 내 옆자리, 내 모든 것이었던 전정국이었다.

photo"야 다음시간 뭐냐"

"....나?"

"응, 그래.너 말이야."

"..기술...! 기술실로 가면 돼..!"

"땡큐~"

이게 우리의 첫 대화였다. 그래, 매번 이런 애들은 나한테 시간표 물어보더라. 정말이다. 작년에도 이런 애가 여럿 있었는데, 죄다 마주칠 때마다 "야 담교시 뭐?" 이러면서 날 붙잡고 있었다. 전정국도 비슷했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넘기려고 했다. 그런데 전정국이 날 붙잡고 물은 뒤에 그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검은 모자 밑으로 살짝 보이는 구부러진 두 눈과 빨간 입술. 난 내가 그런 취향인지 처음 알았다. 한 일주일간은 그 얼굴이 계속 맴돌아서 미친 줄 알았다. 내가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는 가고도 남았겠다 싶을정도로 그에게 말을 걸자는 다짐을 미친듯이 했었다.


그러던 중 3월 31일, 전정국에게 말을 먼저 건 하루였다.

"정국아, 혹시 조별과제 주제 생각해본 거 있어?"

물론 별 거 아닌 질문일지라도 난 고백하는 것마냥 떨렸다.

".....몰라, 너 잘하잖아. 너 하고싶은대로 해."

괜히 이런 말 들으면 얘가 나 유심히 봤나? 나한테 설마 관심있나?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 후 우리는 과제를 위해 연락처를 교환했고 세 네번 정도 만났다. 그 시간에는 과제에만 몰두해서 정말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 후 전정국이 보내는 톡 하나하나는 너무 소중했다. 이래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photo

나한테 왜 이런 다정한 말을 해주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렇게 대해준 남자애도 별로 없었기에 더 심하게 흔들렸다. 전정국은 날 좋아하나봐. 사실 이런 생각이 들게된 계기가 하나 더 있었다.


5월 16일, 막 중간고사가 끝났던 주에 전정국에게서 연락이 왔다. 같이 놀러가자는 연락이었다. 나는 좋다고 하고 일사천리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뭔 진 모르겠지만 짝사랑이라는 건 원수 사이인 샤워도 즐겁게 할 수 있게 만드는 건가 싶었다. 금방 준비를 마치고 나오니 전정국은 좀 덜마른 듯한 머리에 청바지를 입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여자애들이 많은데 왜 나랑?' 이라고 솔직히 묻고 싶었다. 내 맘대로 오해해선 안되니까. 하지만 난 계속 날 믿고싶었다. 날 좋아하기를 간절히 바랬으니까.

우리는 그날, 꽤나 많은 걸 했다. 자전거도 타고, 카페도 가고, 옷도 샀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되게 즐거웠다. 전정국도 내가 친구 그 이상이 되는 듯이 날 대했다. 사진도 찍고, 인스타에도 사진들을 올리고 보니 난 그를 많이 좋아하고, 아니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말할 때마다 나는 경청해 들었고, 분명 그도 나를 바라보며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그를 위해 많은 것들을 먼저 제안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나는 그를 내 마음속에 항상 넣어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관계를 계속 이어가던 중이었던 7월 20일, 내 생일이 찾아왔다. 날씨는 정말 더웠고 어딜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5월보다 훨씬 친해진 전정국과 나는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밥을 먹었다. 저녁을 먹기위해 내가 좋아하는 파스타집에서 만났고, 전정국은 생일 측하한다며 조각케이크와 꽃을 선물로 사왔다. 생일축하노래의 "사랑하는 여주" 부분이 그렇게나 설레는 건지 처음 알았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원래도 조용했던 골목은 가로등만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분위기를 잡고 고백해볼까 라는 생각을 한 찰나, 무언가 내 입술에 닿았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전정국이 내 앞에서 웃고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고, 정여주."

"ㅇ....어..? 어......."

그가 그자리에서 내게 고백을 해주길 바랬다. 그러나 그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다른 얘기만 했다. 결국 관계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는 채로 집에 도착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사로잡혀 학교에 가는 발걸음은 꽤나 가벼웠다. 도서관에 도착하기 전까지 말이다. 내가 그때 책을 빌렸으면 안됐고, 그 장면을 보질 말았어야했다. 내가 사랑하는 그가, 내게 어제 입맞춤을 해오던 그가 다른 여자애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장면을.그 자리에선 눈물 한방울도 나지 않았다. 명찰에 전정국이 적혀있는 것까지 확인했지만 결국 그럴 줄 알았다. 멍청하게 고백 한 번 못해봤고, 결국 쓰레기 같은 새X에게 화 한 번 못내봤다.



그래, 다시 생각해보니 그랬다. 전정국은 나와 있을 때도 내 관심사, 내 생각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수저를 먼저 놓아준 적도, 단 한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