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른
외
사
랑
ㅣ
내 눈엔 네가 비치고 네 눈엔 해연이가 비친다.
네 눈에는 애정이, 내 눈에는 서글픔이.
숨소리조차 새어나갈까, 두 손으로 힘겹게 입을 틀어막았다. 고요한 침묵. 나만 불안했고 저들만은 기대했던 침묵. 느릿히 숨을 고른 너는, 마음을 다잡은 듯이 입을 열었다.

좋아해. 해연아.
툭. 기어코 피하고 싶던 순간을 마주하자 소나기처럼, 눈물이 손등 위를 타고 후드득 흘러내렸다. 벽 하나를 두고 혼자 비참히 무너지는 내 모습을 저들은 죽어도 모를 거다. 저릿하며 아려오는 가슴을. 애써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흐느낌을. 그 아무도 모를 거다.
아니.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 나도."
"...."
"나도 좋아해."
이런 비참함을 나만이 기억하고 되새길 거라 생각했는데.
"내일 보자 해연아. 주말 잘 보내."
생글한 웃음으로 고해연을 돌려보낸 너는,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내 석자를 읊었다. 봤지 여주야. 쿵. 쿵. 생명의 위협을 느낀 듯이, 그만큼의 공포가 점차, 천천히 날 집어삼켜간다.
"봤지? 네가 그 어떤 발악을 해도,"
"...."

"넌 죽어도 나랑 안된다는 거."
"김태형."
"이래도 좋아? 미치겠다."
"...."
"진짜 골 때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온몸을 쿡쿡 찌른다. 머리가 핑 돌고 심장은 지쳐버린 건지 미쳐버린 건지 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오직 모든 신경이 널 향해있었다.
네가 떠난 후에 난 그 세상에서 누구보다 괴롭게 흐느꼈다.
그리고 빌었다.
너도 해연이도 아닌 나에게.
제발
그만 좋아하라고.
그만 기대하라고.
그만하자고.
내 불쌍하고 처량한 외로운 외사랑의 마침표를 찍어달라고.
화근. 첫만남. 그래. 김태형과의 첫 만남은, 평범했다. 그리 대단하지도, 드라마틱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같은 반 옆자리. 그게 끝이었다. 근데, 그 평범함이라는 배경 속에서, 너의 진실한 미소가.
"잘 부탁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사고회로가 망가질 정도였다. 짧은 순간에 보인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아. 이 순간을 첫눈에 반했다,라고 모두가 정의했던가.
"... 나도."
... 그래.
나도 이 순간은, 내가 김태형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정의할 수 있었다. 아니 정의해야만 했다. 그 문장 말곤 생각나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를 첫눈에 반한 상대로 정의하면 안 됐었는데.
그 이후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나와, 눈치가 빠른 김태형. 감정을 숨기느라 급급했던 나와 무서울 정도로 감정에 솔직했던 김태형. 내 단점들을 다 알아차릴 수 있던 김태형은. 그는. 너는. 내 약점을 쿡쿡 찔러서. 그리고 웃었다. 재미있다는 듯. 그 시선까진 견딜 수 있었지만, 하루는 날 찾아와서 물었다.
넌 내가 왜 좋아?

그때 순간 시야가 뒤틀렸다. 난 애써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숨기고 싶었는데. 넌 아무렇지 않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듯이 뻔뻔한 얼굴로 싱긋 웃으며. 소름이 돋으며 몸이 딱딱히 굳어가는 느낌이었다. 난, 난...
"계속 좋아해 줘."
"... 어?"
"난 너 좋아할 일 없지만."
"...."
"계속해."
순간 울컥한 감정이 눈끝까지 휩쓸려 앞이 핑 돌았다. 모두가 수군거린다. 그 수군거림은 점점 크게 번져졌다. 그 사이에 너도 있었다.
짜증 나게 너는 그 순간마저 아름다웠으며,
원망스럽게 너는 그 순간마저 웃고 있었다.
귀와 입을 틀어막고 반을 허겁지겁 뛰쳐나왔다. 숨 고르기 버거워질 때쯤 천천히 속도를 줄이니, 쓰나미가 몰아치듯 소리 내어 크게 울었다. 이 장소가 학교였다는 것도 잊은 채. 겨우 시작된 짝사랑은, 아니 짝사랑인 줄 알았던 외사랑의 시작은.

방금 지금 겪은 감정과 다를 바 없이, 불쌍하고 처량했으며 외로웠다.
잔인한 고백을 엿듣고 상처받은 지 이틀이 지나고 월요일이 찾아왔다. 안녕. 쿵. 심장이 바닥끝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독하리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살짝 올렸을 뿐인데 순식간에 마주한 김태형의 얼굴. 나도 모르게 소리를 헉, 하는 소리를 낼 뻔했다. 놀라서가 아니라 뻔뻔함에 어이가 없어서.
"...."
"화났어?"
"...."
"그냥 무시해버리네."
"... 조용히 해."
"...."
"머리 아파."
그의 얼굴이 미묘한 변화를 일으켰지만 궁금함보다 감정에 충실했던 나는 고개를 다시 제자리로 되돌렸다. 더 이상 김태형을 마주했다간, 그리고 또다시 눈물이 흐른다면 어떤 쪽팔림을 당할지 예상이 안 가서. 쿵. 거차게 문이 열리며, 동시에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 의식하기도 전,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숨소리의 주인공은 김태형을 거세게 잡아올렸다. 고해연이었다.
"시발, 야."
"왔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서."
"뭐가?"
몰라서 물어 시발아? 듣기 거북한 욕설들이 끊기지 않고 반을 매웠다. 쑥스러움에 몸을 배배 꼬던 소녀의 모습은 어디 가고, 지금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김태형을 몰아붙이는 고해연에 당황함과 황당함이 동시에 몰아쳤다. 하루 사귀고 헤어지자는 게, 사람 새끼가 할 말이냐?
"유감스럽게도, 사람 새끼가 할 말이네."
"야!"
"진정해 해연아."
"진정? 너 진정이라고 했냐?"
"해연,"
"그래 네가 고여주 괴롭힌답시고 고백받아달래며. 받고 몇 주 동안 사귀자며. 마음 그렇게 갖고 노니까 좋냐?"
"고해연."
"이제 상황 파악이 됐나 봐? 응?"
직접 말해봐 네가 당사자도 여기 있네.
선 넘지 마 고해연.
선은 네가 존나 지나다녔고.
그만. 그만. 분명 둘 사이에 싸움인데 괴로워지는 건 나였다. 시선들이 나에게 꽂히며, 그 시선들 사이엔 불쌍함이 섞여들어있어서. 배 깊숙한 안쪽부터 울렁이더니 곳 입을 틀어막았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태형아.
"여주야,"
"태형아."
"...."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
내가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렇게 우스웠어? 내 질문에 당황한 기색의 김태형.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좋아함이 경멸로 변하는 느낌이 실시간으로 온몸을 통해 느꼈다.
"여주야."
"... 이제 너 안 좋아해."
"... 뭐?"
"믿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
"근데, 하나 확실한 거 알려줄까."
"...."
널 좋아한 순간이 뼈저리게 후회돼. 사실 지금도 내 심장은 그를 향해 뛰고 있었지만, 외면했다. 아니 외면해야 했다. 선생님한테 나 조퇴한다고 말해줘. 나 몸이 안 좋아서. 몸도 머리도,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위험해서 자리를 떴다. 난 또다시 미친 듯이 달렸고 숨이 턱 끝까지 마주했을 때 멈춰 섰다.
개새끼.
김태형 넌 정말 개새끼야.
그때와 다른 점은,
내가 지금 그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
그녀가 떠났다. 고여주가 날 등지고 나갔다. 심장이 크게 두근거리고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뛰었지만, 얼마 못 가 목 놓아 엉엉 울어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몸이 싸하게 굳었다.
난 여주가 날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 했다는 걸 알아서, 더 못 되게 굴었다. 초등학생 수준이 할 수 있을 만큼 유치했지만, 괴롭힌 이유는 단순했다. 날 좋아하지 않았으면 해서. 여태껏 날 좋아해온 애들과 다를 바 없을 거 같아, 미치도록 괴롭혔을 뿐인데.
"...."
후회한다.
그 순간을 뼈저리게 후회한다.
넌 그 아이들과 다르다고, 간절하게 들려온 외침을 무시한 나의 대가는.
쿵쿵.
뒤늦게나마 그녀를 향해 뛰는 내 심장이 말해주었다.
여주야.
고여주.

이제 내가 널 좋아하는 거 같아.
이게뭐죠.그때까지썻던글중에가장최악임요. 쨋든 합작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