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님들께서는 그냥 감상으로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그리고 네가 없는 9월이 왔다
후텁지근한 날씨, 등골을 타고 흐르는 땀, 눅눅하고 텁텁한 공기,
그리고 그 계절 앞에 서있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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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밟으며 걸었다. 숨이 턱 턱 막히는
뜨거운 공기와 드러난 팔뚝에 치덕하게 달라붙는 열기. 장마가 시작되기라도 하려는지 습한 날씨와 어지러운 햇빛.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지만 여름은 항상 미화의 계절이었다.
막상 겪을때는 좋은 기억 하나 없지만 결국 기억에 남는 건 좋았던
추억들 뿐이니.
너는 나에게 여름이었다.
그렇게 여름으로 남았다. 이제는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재능 있는 사람들은 해마다 물밀듯 들어오고, 그저 하는 것은
사람이 바다를 이루는 미술계에서 발이라도 붙여보겠다 버둥대는 일.
개중 가장 거슬렸던 건 누군가의 이름 앞에 붙는 천재라는 타이틀.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그 아이 앞에는 항상 그 타이틀이 달렸다.

"기억나지 않는 추억들을 그린다 " " 한국이 낳은 세기의 화가 "
" 뜨거운 여름날의 절정이 순식간에 눈앞에 그려진다 "
" 여름을 눈에 품은 고등학생, 화가 전정국 "
그래, 네가 잘났다면 그려대는 그 그림들은 얼마나 볼만한지 보자라며 호기롭게 보러 간 그 아이의 그림들은.. 어떠한 단어로 특정 지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작품이었다.
같은 미술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한 의문이 앞섰고, 어째서 이런 천재가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지,
하필이면 왜 내 바로 앞에서 그림자를 만드는지, 서러움이 뒤따랐다.
뒤바꿀 수 없는 자연의 순리에 그대로 꺾여 순응하는 것 같았다.
6월의 하늘은 맑고, 여름의 초입은 상쾌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고.
같은 화실에서 하루하루 너를 보는 나는 끝없는 열대야에 뒤척였다고
불규칙적인 바람에 팔랑거리는 종이들과,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는
스케치, 붓을 넣어둔 물병의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와,
내 맞은편에 앉은 너.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것들을 이미 가진 너는 어떻게 그것들을 얻었는지, 금방이라도 몰아칠것같은 파도와, 나뭇잎 사이사이 내리쬐는 햇볕
여유로움과 치열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풍경은 도대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래, 나는 그 모든것이 부러웠고, 갖고 싶었고, 그럼에도 무던히 무너졌었다고. 이따금씩 나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에 급하게 눈길을 피하다가도 울컥 치미는 서러움은 가슴속에 뜨거운 불덩이를 담은 느낌이 들었고, 길을 걷다가도 보이는 너의 흔적들은 나를 유치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 여주야, 네가 부족해서 그런게 아닌거야. 너도 너만의 화풍이 있고, 색깔이 있다? 언젠가 그걸 알아주는 계절이 너한테도 오게 될거야. "
붉은 갈색과 누런 색이 여기저기 묻은 내 손을 붙잡고 다정하게도
내 미래를 응원해주신 선생님의 말씀은 애석하게도, 그때에는 제대로
내게 도움이 되질 않았고, 그때의 나는 그저 어디에도 머물지 못한
이파리 하나가 되어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단지, 바람에 날려 아주 천천히. 여유로운 것처럼 포장한 체.
그렇게 7월이 왔다. 나는 여전히 끝없는 여름의 한가운데에 던져져
허덕이고 있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빛나는 너의 여름을 추상했다.
그 와중에도 내게 잠깐 닿았다 사라지는 너의 눈빛은 그저 동정심이었을까. 나는 항상 그랬다. 가끔씩 내 지척에서 느껴지는 너의 흔적에
격하게 반응하는 불나방처럼. 그래, 그때만 그렇게 달아오른 듯
뜨거워지고, 남은 시간은 잔열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그리고 7월 23일. 내 모든걸 쏟아부었다 생각했던 작품이 경시대회에서 보기 좋게 낙선된 날. 당연히도 대상에 오른 건 너의 작품이였고,
유독 푸른빛과 초록빛을 즐겨 쓰던 너의 작품에서 동질적이게도
나와 같은 붉은 색으로 가득 찬 작품을 보게 된 날.
그때의 내 속은 아마 만신창이처럼 무너졌을거야.
고작 색채 하나 겹친게 뭐라고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어떻게 보면
이상하다 할 만한 일은 전혀 아니겠지만, 내게는 이때까지 고사해
오던 하나의 기둥이 누군가의 손길에 아주 무능하게도 부서져 산산조각이 난 꼴이었다는걸. 이미 수없이 뭉개지고 으깨진 마음이 울렁거려
더 이상 그 곳에 있지 못하고 뛰쳐나온 날 따라온건 어이없게도,
너였지,
날 왜 따라나온거야? 이미 내 속은 다 문드러지고도 남았는데, 무슨
꼴을 더 보려고 날 잡아. 네가 나한테 할 말이란게 있어? 어쭙잖은
위로 따위 아무런 소용 없다는걸 너는 누구보다 잘 알아야지.
그간 나름 잘 관리했다 생각했던 원망의 감정이 물 밀듯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멀리로, 더 멀리로 가버리려는 나를 붙잡아 세운건 한 번도 닿아본 적 없었던 너의 손이었고, 내 손목에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을 인지해버린 이상 너랑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라고.
" 날 뭐 하러 따라나와? 왜, 네가 보기에도 내 그림이 볼품없었어? "
" 천재 타이틀 좀 다니까 이제 다 네 밑으로 보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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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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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막힐 듯 뜨거운 날씨, 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불규칙적으로 교차되는 숨결, 그리고 날 마주 보며 서있는 너.
그러니 너는 내게 여름이라고.
다른 사람들은 단편적인 추억으로 여름을 미화시켜 기억하지.
나뭇잎 사이사이 부서지며 들어오는 쨍한 햇살과, 청량한 파도 소리.
여름날의 청명함과 그날의 설렘. 모두 네가 그려낸 작품이잖아.
정작 여름을 겪을 때는 그 계절이 주는 무게감에 녹아내려 어서
피신하려고만 했으면서. 그날의 텁텁함과 눅눅함. 귀가 찢어질 듯
울어대던 매미들과 끈덕지든한 피부와 달아오른 뺨.
숨 막히는 더위는 나만 느꼈던 거라고.
차마 못 해왔던 말을 우수수 쏟아붓고 난 뒤, 찾아온 정적은 어색했다.
그래, 내가 실언했어. 그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네게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텐데, 내가 내 입장으로 너를 깎아내리기에만 급급했다고.
무더운 날씨에 내가 잠깐 이성을 잃어 너한테 미안할 말을 했는데도,
날 바라보는 너의 얼굴에는 변화 하나 없었다.
아니, ....도리어 피식 웃어 보였다.
모든 걸 다 내려놓은 듯 편안한 웃음을.

" 미안해. 내가 너무 성급했어. "
"........... "
" 그런데 이 말 만큼은 꼭 전해주고 싶어서. "
" ........저게 내 마지막 그림이었어. "
"......... "
" .....뭐..? "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음날부터 그 아이는 미술실에 나오질 않았다.
도대체 어째서? 너의 계절이 절정에 이르렀을 순간이 아니었나?
돌연 미술계에서 발을 빼버린 네게 세간의 관심이 쏠렸지만 그것 또한 한순간이었고, 사람들은 어느새 다시 나타날 천재를 기대하며 술렁이고 있었다.
그저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며 순식간에 바뀌는 사람들의 태도에 머리가 깨질듯한 위화감이 드는 건 나 뿐인듯 했고.
그 아이가 나오지 않는 미술실에서 나는 여전히 그림을 그렸다.
이제는 열어놓지 않은 창문에 탁한 공기와 점차 빨라지는 노을을 보며
그저 나의 그림을 그렸다. 학교에서 간간이 마주치는 너의 모습은
내게 싱숭생숭한 기분을 안겨주었지만, ...가까이 다가가 안부를 물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었기에 그저 스치듯 걔의 존재만을 인지할 뿐.
그리고 8월 7일, 처음으로 나의 작품이 경시대회에서 입선했다.
분명 기뻐야 하는 일이었지만... 어째서 행복하지가 않은가.
그저, 그 아이가 사라져 버린 자리에 내가 뒤이어 선 기분이었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상황이 와닿지 않았다. 나는 아직......
그때 그 아이에게 했던 말을 사과하지 못했다.
8월 23일, 불과 한 달 전에는 어색하다, 붕 뜬것 같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기좋게 낙선된 나의 작품이 대상의 자리에 오른 날.
이제 사람들은 그가 아닌 나를 추상했고, 내가 그려낸 작품들을 추켜세우며 과시했다. ....어째서...? 분명 행복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나만 다른 세상에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세상은 9월을 목전에 두고 있고, 치덕하게 달라붙었던 땀을 말리는 조금은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어렴풋이 너의 생일이 9월이라는 말을 들었었던것 같은데.
이제는 학교에서조차 보이지 않는 너의 행방을 물어보려 미술실에
들렸을 때, 선생님께서는 내겐 한 번도 보여주시지 않았던 환한 미소를 띠시곤 내게 말씀하셨지.
" 여주야, 드디어 너의 계절이 왔어! 너는 이제 마음껏 열매를 맺기만 하면 되는거야. 네 노력이 이제 빛을 받았다. 축하하고, 마음껏 즐겨 "
" ....감사합니다. 근데 선생님. ........
전정국은 왜 요즘 안보여요....? "
" 응? 걔는 갑자기 왜, "
" ... 아, ..이제 9월이기도 하고.. 걔 생일이 9월이라는 얘기를 얼핏 들었던것도 같아서... 그래도 같이 있었었잖아요. "
" 여주야, 이미 한 물 간 애를 뭐 그리 마음에 담아두니,
그리고 걔 이제 우리 학교에 없어. 7월 경시대회 끝나고 좀있다가
전학갔단다. "
" 네...? "
" 걔 계절은 이미 다 갔지. 이미 떠났고, 이제 없는 애를 세상에 누가
그리워하니? 너도 이제 그만 신경 꺼. 다음 대회 준비해야지. "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것을,
세상에 두개의 계절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다른 계절이 오게 된다면 그 전의 계절은 그렇게 사라져버리는게,
그게 자연의 순리였다는 걸.
그리고 네가 없는 9월은 너무 공허해서.
아, 이제 보니 네 작품들은 모두 여름을 품고 있었구나.
네가 여름을 그려낸게 아니라 그저 너 자체가 여름이었어.
너는 그저 너의 조각 중 하나를 그림에 옮겨담았을 뿐이구나.
...여름이 지나면 당연히도 가을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그리고 내가 그 가을이었다는 걸 너는 알고 있었을 테고.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난, 이제 어디서조차 찾을 수 없는 너의 조각들을 찾으며 울음을 터트렸다고.
햇살을 받아 미끈히도 빛나던 나뭇잎들은 이제 누렇게 색이 바래 내 발밑으로,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고.
나는 너의 흔적들을 지워버리는 존재라고.
깨달은 모든 진실들이 사무치게 괴로웠다. 문득 흘러 떨어지는 눈물에
하얀 도화지에 이슬이 맺혔다.
9월 8일. 어떤 이슬은 너무 무거워 풀잎을 휘게 한다고.
어떤 눈물도 너무 무거워 차마 나를 무너지게 한다.
가을의 시작이었다.
네가 없음으로써 말미암아 오는 진정한 가을의 시작.
이제 나는 너를 잃은 공허함으로 점차 쓸쓸해져 가는 도화지를 채우겠지. 너의 흔적을 떨어트리며, 너의 기억을 지워버리며.
물론 나 또한 언젠가 겨울이 오면 잊힐 존재에 불과하겠지만.
함께 잊힌 존재라면, 우리. 그때는 조금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너의 여름에 내가 발을 담글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도 너는 내게 여름이 되어줄까.

_9월 23일, 어째서 이런 천재가 이제야 나왔는가!
붓 끝에서 가을을 그려내는 화가, 추여주.
_10월 8일, 그녀의 그림에도 이슬이 내렸다. 3번 연속 경시대회 대상
지금 미술계가 주목하는 신예 화가! 다음 작품은?
_10월 23일, 단풍의 절정! 새로운 화풍으로 돌아온 화가 추여주.
그녀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_11월 7일, 돌연 자취를 감춘 추여주?
그녀의 빈자리를 채울 화가는 또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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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그리고 네가 없는 9월이 왔다.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