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어. 난 이제 끝났어 이여주..."

어제 그렇게 김석진을 마주쳐 놓고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집으로 도망치 듯 들어와 버렸다.
그래서 떨어뜨린 상자는 걔가 갖고 있을 거다. 아마도...
학생 때 만나고 다신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엔 세상은 너무 좁았다.
하지만 나는 오늘 학교에 가야 했다.
첫날부터 지각을 할 순 없지.
현관문에 귀를 바짝 대고는 밖에 김석진이 없나 확인했다.
"음. 아무 소리도 안 나는 걸 보니 없나 보군."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여주야."

망했다.
<첫사랑은 아니지만: 네가 싫은 두 번째 이유>

문 앞에 김석진이 서 있다.
진짜 김석진이다.
우리가 몇 년 만에 보는 거더라...
"여주야. 왜 나 피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이유는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네가 나 차서? 그래서 피하는 거 맞지?"

김석진은 납득한다는 듯이 입을 삐죽 내밀고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아주 잘 알고 있네. 하기야 김석진 쟤 눈치 하나는 대한민국 와이파이 급으로 빨랐으니까.
"잘 지냈어 여주야? 우리 안 본지 꽤 됐잖아."
"아 뭐 그럭저럭..."
"대학은 어디 다녀?"
김석진 얘는 왜 이렇게 질문이 많아. 내가 밉지도 않나?
"나 여기서 10분 거리에 있는 ㅇㅇ대학교 다녀."
"너는?"
"나는 대학 안 가고 바로 취업했어."
"그렇구나..."
무미건조한 대화들을 오고 갔다.
"어... 난 학교 가야 돼서 나중에 보자!"
"잠깐만 여주야!"
"번호 안 바꿨지? 연락해도 돼?"

저런 얼굴로 물어보면 어떻게 거절하냐고...
"아, 응 번호 안 바꿨어. 연락해도 돼."
내가 왜 전남친이랑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좋다. 너를 다시 만난 게.
애초부터 만날 운명 아니었을까.
하지만 전남친은 전남친.
나는 이 자리를 빨리 피하고 싶어서 재빨리 번호를 주고
뒤도 안 돌아보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나 진짜 갈게. 다음에 봐!"
"갈 때 뒤 안 돌아보는 건 예전이랑 똑같네.."

"그때 네가 한 번만 뒤돌아봐줬으면
널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각자의 치열한 삶 속에서 너덜너덜해진 나와는 달리,
여주 너는 변함없이 빛나고 있었다.
너는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 아닐까.
근데 어쩌지 여주야. 난 아직 네가 좋아.
이런 내가 널 다시 잡아도 되는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