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보이는 건 까만 바다뿐이었고,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만이 들렸다.
줄리앙을 자주 만나거나
통화를 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렇게 그곳에 서서 한참 동안
바다를 내려다봤다.
수평선 끝이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보니
점차 날이 밝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휴대폰도 시계도 없이 나와서
몇 시쯤 됐는지도 알지 못했다.
내가 가진 이 죄책감이 어느 정도 사라지면
그에게 정식으로 작별 인사를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정아 씨!!!!”
등 뒤에서 훈지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훈지 씨.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요?”
“당신이야말로… 언제 여기까지 온 거에요?
하루 종일 먹은 것도 없었는데
이렇게 멀리까지 오면 어떡해요.”
그는 말을 멈추고,
허리를 숙인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있는 쪽으로 내려갔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얼굴은 땀 범벅이었다.
“훈지 씨… 왜 이렇게 땀을…”
나는 그의 이마와 목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아 주었다.
“온 마을을 다 헤맸어요.
몇 시간을 뛰어 다녔는지 알아요?”
“아까 깊이 잠든 거 같아서 나왔는데...
언제 깼어요?”
“서너 시간 전쯤에 깨서 보니
옆에 없길래 화장실 갔나 했어요.
너무 안 오길래 화장실 가보니 없어서요.
그때부터 밖으로 나와서 얼마나 헤매고 다녔다고요.
밖에서 쓰러진 건 아닌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요.”
“내가 어린 애도 아닌데
뭘 그렇게까지 찾아 다녀요.
잠이 안 와서 나왔어요.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고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무사하니까 됐어요.”
그는 잠시 나를 살펴 보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어디 앉아서 좀 쉬었다 내려가요.
나 바로는 못 내려갈 것 같아요.”
“저쪽 벤치로 가서 앉아요, 우리.”
우리는 벤치에 앉아 계획에도 없던
프리힐리아나의 일출을 함께 마주했다.
“힘들긴 한데 이렇게 같이 일출도 보고
좋은데요?”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일출을 바라보았다.
훈지 씨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뗐다.
“혹시…
줄리앙에게 죄책감 갖고 있는 건 아니죠?”
“내가 아니었다면…
줄리앙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내가… 줄리앙을 만나지 않았거나…
줄리앙과 만나면서...
훈지 씨를 보러 한국에 가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사실은…
한국에서 훈지 씨 만나고
줄리앙 부모님 뵈러 파리에 갔을 때…
그 사람이...
내가 말도 없이
약속도 어긴 채 당신 만나러 한국 갔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하고 넘어가자고 했었어요.
그런데 내가... 헤어지겠다고 했어요.”
“그 때 줄리앙과 헤어지지 않았으면…
나와도 다시 만나기 힘들었던 거잖아요.”
“… 내가 처음부터 잘못한 거에요.
훈지 씨를 잊지 못 한 상태에서
줄리앙이 사귀자고 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잖아요.”
“줄리앙도 당신과 만나면서 추억이 생겼잖아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에요.”
“줄리앙이 호텔에 머물고 있었을 때
내가 찾아갔더라면 어땠을까요..?”
가서 좋게 설득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매몰차게 밀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가 돼요.”
“그 당시에는 줄리앙을 포기 시켜야 했으니
호텔에 갔어도 좋은 말로 설득하기는
힘들었을 거에요.”
“나 때문에…
더 아팠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요..."
"훈지 씨가 옆에 있는데
이런 모습 보여주는 것도 미안해요.”
“너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있어서 당신이 덜 힘들고,
짧게 아프면 좋겠어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훈지씨...
내가 얼마나 못된 생각을 한 줄 알아요?"
"무슨 생각이요...?"
"훈지 씨가...
지금 내 곁을 떠난 게 훈지 씨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런 생각 했어요.
정말이지 이게 얼마나 끔찍한 생각인 줄 알면서도
훈지 씨가 내 곁을 떠났다 생각하면
지금처럼 버틸 수도 없을 거 같아요...
나...정말 이기적이죠...?"
줄리앙에게 미안한 마음이
눈물이 되어 흘러 내렸다.
"그럴 수 있어요.
사람은 다 이기적이에요.
나도... 그랬을 거에요."
"내 곁을 떠나면 안 돼요... 알았죠?
내가 가도 된다고 할 때...
그 때 가요..."
"가라고 해도 안 갈 건데요.
나 황소고집인 거 몰라요?"
그는 미소 지으며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잠시 여행 다녀 오는 건 어때요?
새로운 곳을 다니다 보면
슬픔을 잊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아직은 여행이 내키지 않았지만,
훈지 씨에게까지 내 슬픔을 전달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다른 도시로 여행 가요.
훈지 씨도 스페인은 여기 밖에 모르잖아요.”
우리는 떠오르는 태양을 함께 맞이한
첫 번째 아침을 뒤로 하고
서로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며 언덕에서 내려왔다.
“어~? 약속 안 지킬 거에요?" <116화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