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영웅/ 수호시은] 속도와 거리 사이에서

속도와 거리 사이에서 3화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교실 안은 아직도 소란스러웠고 대부분의 애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서 연시은은 혼자 남아 창가 쪽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풀고 있었는데,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일정하게 반복되는 그 조용한 공간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섞이면서 분위기가 미묘하게 깨졌다.

“야, 아직도 하냐.”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는 목소리였고, 시은은 한 문제를 끝까지 풀고 나서야 펜을 멈췄다.

 

스토리 핀 이미지

“시간 남아서.”

“점심 안 먹었냐.”

“먹었어.”

“혼자?”

“…상관없잖아.”

수호는 대답 대신 시은 앞에 앉았고, 의자를 뒤로 기울인 채 발로 바닥을 툭툭 차면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야, 너 요즘 이상하다.”

“뭐가.”

“나랑 계속 붙어 다니잖아.”

“알바 때문이지.”

“그거 핑계지.”

시은은 눈을 들었다.

잠깐 시선이 마주쳤고, 그게 생각보다 오래 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느낌.”

“근거 없는 거 싫어.”

“그래서 더 맞을 때 많다.”

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 시선을 다시 문제집으로 내렸다.

그런데도 집중이 안 됐다.

펜이 멈췄다.

“야.”

“…왜.”

“오늘은 알바 안 해도 된다.”

시은이 말했다.

“왜.”

“비 와서 콜 적어.”

“그래서?”

“굳이 안 해도 돼.”

수호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와, 이거 뭐냐.”

“…”

“나 배려해주는 거냐.”

“아니.”

“그럼.”

시은은 잠깐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시간 아까워서.”

“아, 또 돈 얘기네.”

“맞아.”

“근데 너 지금 집중 안 하잖아.”

그 말에 시은의 손이 멈췄다.

“…무슨 소리야.”

“너 아까부터 한 문제도 못 풀었거든.”

“…”

“틀렸지?”

시은은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책을 덮었다.

수호가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야, 나랑 나가자.”

“어디.”

“운동장.”

“싫어.”

“나 심심해.”

“혼자 가.”

“같이 가.”

“왜.”

수호는 잠깐 고민하는 척하다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너랑 있으면 덜 심심해서.”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나왔는데, 이상하게 무시가 안 됐다.

시은은 잠깐 멈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5분만.”

“와, 바로 나오네.”

“시끄러워.”

 

스토리 핀 이미지

운동장은 비가 막 그친 상태라 바닥이 조금 젖어 있었고, 사람이 거의 없어서 오히려 조용했는데 수호는 아무 생각 없이 중앙까지 걸어가더니 그대로 바닥에 털썩 앉았다.

“야, 앉아.”

“젖었어.”

“괜찮아.”

“안 괜찮아.”

“그럼 서 있어.”

시은은 결국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고, 수호는 뒤로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야, 시은아.”

“…왜.”

“너 왜 이렇게 혼자 다 하려고 하냐.”

“무슨.”

“공부든 뭐든.”

“내 일이니까.”

“그래도 좀 나눠.”

“싫어.”

“왜.”

“귀찮아.”

“거짓말.”

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수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야.”

“…왜.”

“너 나랑 있으면 편하냐.”

질문이 예상 밖이라, 시은이 잠깐 멈췄다.

“…왜 그런 걸 물어.”

“그냥.”

“…”

“대답 안 할 거냐.”

시은은 잠깐 시선을 피했다가, 낮게 말했다.

“…모르겠어.”

“그럼 생각해봐.”

“…”

“난 편한데.”

그 말은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시은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바람이 불었고, 젖은 흙 냄새가 올라왔다.

“야.”

수호가 다시 불렀다.

“…왜.”

“오늘 알바 하지 말고.”

“…”

“그냥 좀 놀자.”

“…”

“나랑.”

그 말이 끝나고, 시은은 처음으로 아무 계산도 하지 않고 잠깐 서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5분 더.”

수호가 웃었다.

“야, 그거 연장된다?”

“안 돼.”

“된다니까.”

“안 된다니까.”

말은 그렇게 했는데

둘 다,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은 안 끝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