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막무가내는 처음이지

소개팅에서 전남친 만난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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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나 잊었구나.”


새 인연 찾으러 여기까지 오고. 그 두 마디가 비수처럼 심장에 꽂히는 듯했다. 차마 그게 아니라고는 말 할 수 없었다. 친구 소개팅이었는데 대신 나온거라며 변명해봤자 뭐해. 내 처지만 더 곤란해질 뿐. 그리고 그 말을 얘가 믿기나 하겠냐고. 

그럼 난 이제 뭐라 할까.



“…너도, 마찬가지잖아.”

“…”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만난 지 한참 되어서야 두 눈을 마주한 우리. 검은 눈동자에 서로를 향한 원망을 가득 담고 있었다. 어쩌면 그리움일 수도 있는, 원망의 감정이 서린 그와 나의 눈은 많이도 닮아 있었다. 코 끝이 찡해오자, 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나를 향한 그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잖아. 너도 어쨌든 나처럼 소개팅에 나온 건 맞으니.



“…”


일관된 침묵 속, 그가 갑자기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짧은 연결음 끝에 그가 뱉은 말.



“미안. 오늘 못 하겠다.”


전화기 너머 당황한 듯한 수신자의 목소리가 옅게나마 들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는데. 이내 전화를 끊더니 내게 말을 건네는 그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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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일어날게요. 미안해요.”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카페 밖으로 나갔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난 뭘 했지. 당황스러워서 넋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가 나간 지 1분 가까이 되었을까. 가까스로 마음을 부여잡았다. 안 돼. 널 이렇게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그토록 소중했던 우리의 재회가 이래서는 안 됐다.

그 마음 하나로 가방을 챙겨 허겁지겁 출입문을 향해 갔다. 여전히 밖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산통에 있는 우산은 2개. 우산을 챙길 새도 없이 그냥 나간 건가. 더 이상 생각할 겨를 없이 나는 내 우산을 챙겨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까보다 더 많이 내리는 비의 무게가 어쩐지, 견딜 수 없이 무거운 기분이다. 어딜 간 건지 너의 행색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우선 멀리는 못 갔겠지 싶어 큰 길쪽으로 뛰었다. 그랬더니 머지 않아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더라. 작은 골목길로 들어가는, 온통 젖은 네가.

힐이 흙탕물에 얼룩져 제 색을 잃어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정면만 응시했다. 그가 향하는 곳을 향해. 그리고 마침내 그가 들어선 좁은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는 비로소 빗소리가 줄어들었다. 머리 위에 간신히 비를 피할 수 있는 가림막이 있었다. 그래도 몇 방울이 새어 들어오긴 했지만. 그리고 그 아래의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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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머리를 뒤로 넘기고선 담배 하나를 입술 사이에 물고 있더라. 불을 붙이려다, 나를 본 건지 가만히 응시하다 이내 담배를 바닥에 던져 짓밟았다. 솔직히 놀랐다. 담배라면 가까이도 안 하는 너였는데. 1년도 채 안 된 시간에 너에게 일어난 변화는, 날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가면 어떡해.”

“…”


그 일은 뒤로 하고 일단 내가 할 말은 해야겠다.




“네 말만 하고 가버리는 게 어딨어.”

“…미안해요.”

“……너는 무슨, 맨날 미안하대.”

“…”


턱 끝까지 차오르는 미묘한 감정을 억누른 채 말을 이었다. 때마침 하늘을 찢는 천둥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 지,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다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 볼 정도였다. 우리의 상황에 딱 어울리는 배경음악이긴 했다. 별로 원치는 않았다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구차하지만, 상처 입은 너에게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었다. 순간, 아까 너의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미안하다고. 오늘은 안 될 것 같다는 너의 말.



“…나도 내 소개팅 아니었어.”

“…”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이다.



“친구 부탁으로 나온 거야.”

“…”

“보아 하니 너도 그런 것 같고.”


못 믿겠다는 듯한 그의 얼굴. 믿거나 말거나 상관은 없었다. 어쨌든 내 마음만 후련해지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럴 거다. 

여전히 우산을 펴고 있던 나는 손끝에 여전히 힘을 준 채 내 앞에 있는 그를 향해 기울였다. 이미 빗물에 젖은 그가 더이상 젖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담배는 늦을 수록 끊기 힘들어져. 알지?




“내가 그렇게 싫어도 우산은 가지고 갔어야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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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볼 것 같아서.”



아직도 나는 누나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아서 그래. 오래됐지만 아직도 그래. 얼굴 마주하고 앉아 있는게 나한테는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요. 싫은 게 아니라, 아직도 미련 남은 내가 싫어서.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하는 그의 눈시울은 어느덧 붉어진 지 오래. 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울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뇌리에 박혔다. 여전히 날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이 내 앞에서 울고 있다. 가슴이 아렸다.






























그와 헤어진 날.
그리고 그 다음 날까지.
그 주를 넘어 그 달까지.
주변 지인들 말에 의하면 내가 정말 죽기라도 하는 줄 알았을 정도로 폐인같이 살았다. 무얼 먹질 않으니 살은 빠질 대로 빠져서 몰골은 만신창이가 됐고,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한 달 가까이 입원까지 했다. 사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살았다. 이별이 이렇게까지 사람에게 해로울 수 있음을 처음 알게 해준 사랑이었다.

3년의 연애를 막을 내릴 만큼의 대단한 결별 사유는 없었다. 모든 건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었다. 사소한 다툼이 쌓이고 쌓여 우리는 기어코,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망각하는 순간에 이르렀다. 너무 편한 사람을, 너무 편하게 대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너무 편한 사람일수록, 더욱 생각하고 배려해야 했는데.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서툰 사랑을 했다.

이별 당시에는 앞으로 서로를 안 보면 미운 정 고운 정 다 떨어질 줄 알고 말을 꺼냈다. 하지만 꼭 그런 게 아니더라. 그 다툼으로 우리의 3년을 가리기엔 턱없이 작은 방해물이었다. 드넓은 해수욕장의 모래 위, 어울리지 않는 돌멩이가 거슬려 바다로 던졌을 뿐인데. 

그 돌 하나가 파도를 불렀다.

그 돌은 사실 파도를 부를 만큼 무거운 돌이 아니었다. 늘 바다에 파도는 존재했고, 우연히 타이밍이 맞았던 게 전부다. 작은 오해가 부른 거대한 파도와 같았다. 그 일을 후회할 땐,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이제야말로 정말 그 말을 해야 할 때인가 보다. 사귈 동안 내가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그 말을. 이제는 내가 해야 한다.




“……미안해.”

“…”

“내가 전부 다… 미안해.”


내가 덩달아 눈물이 났다. 안 되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데. 내가 택할 선택지는 도피뿐이었다. 더이상 네가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뒤를 돌았다. 옷에 한기가 맴돌았다. 몸이 떨렸고, 너는 그런 나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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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요.”



가지 마, 부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