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어지자

.

꿈을 꾸었다. 그 꿈 속에서의 우리는 웃었다. 이국적인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정겨운 한국 라면을 먹고,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사람이 한인 마트에서 김치를 사오던… 아주 평범했던 삶의 일부를 보았다. 서로를 향해 웃었고, 술잔을 부딪혔다. 환기하려 열어둔 창문에서는 길가의 차 경적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가 조화롭게 섞여 들어왔다. 그리고 익숙한 재즈의 선율에 이끌려 창밖을 내다볼 때면, 저녁의 황금빛 에펠탑이 반짝였다.
김태형은 이따 놀러갈 계획을 세우고 교통편을 알아보느라 핸드폰을 놓지 않았고, 전정국은 스테이크가 맛있었는지 그새 내 접시를 탐했다. 박지민은 몽마르트 언덕 아래 기념품샵에서 산 재즈 LP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무지한 호기심을 핑계로 너희를 아프게 하는 일도 없었겠지. 파리의 봄은 찬란했다. 우리도… 그랬을까?
눈을 떴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전정국의 얼굴이었다. 그는 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의 볼을 쓸어주었다. 나의 뺨을 따라 흐르는 눈물을 보고 그는 괜찮냐는 한 마디만 내게 물어왔다. 자다가 우는 건 또 처음이었다. 그리고 정말… 불행하게도 통증이 서서히 밀려오는 듯했다. 불규칙한 호흡 소리에 오히려 더 놀란 전정국은 나를 끌어안았다. 많이 아프지.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큰 창문. 그 너머에 탁 트인 바다의 전경. 물결에 비친 햇살은 별빛처럼 반짝였고, 모래 역시 하얗게 햇살을 머금었다.
의식이 희미했다. 원래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햇살과 바다, 모래사장 위의 아이들이 희뿌옇게 번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금 떴다. 눈에 힘이 없었다. 그보다 놀라운 건…
전정국이 울고 있다.
그의 숨결이 뜨거웠다.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이번엔 되려 내가 놀라서, 그를 밀어냈다. 야… 왜 울어.
“조금만 더 일찍 병원 갔어야지.”
“…”
“일찍 알았더라면…”
내가 널 잃을 일도 없었잖아.
.
방문을 열고 나가니, 아침 식사 준비가 한창인 박지민과 김태형이 보였다. 잘은 못 들었지만 대화를 주고 받는 것 같았다.
“일찍 일어났네, 둘 다.”
“…일찍이라기엔 해가 중천인데?”
벽시계의 긴 시계바늘은 1을 가리켰다. 그들이 준비하는 건 아침 식사가 아니라 점심이었던 것이다. 죽을 때가 되면 잠이 많아진다더니. 평소 불면증에 시달리던 내가 이렇게까지 잘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랍기만 했다. 하루하루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내가 도울 건?”
“그냥 앉아 있어.”
단호한 어조의 박지민에, 나는 할 수 없이 아일랜드 식탁 위에 걸터 앉았다.
“전정국은. 아까 네 방 들어가던데.”
“…쉿.“
울었어. 전정국이 듣지 못하도록 최대한 속삭여서 대답했더니… 글쎄.
“뭐?”
경악하듯이 소리를 지르는 김태형. 서둘러 그 입을 막았다. 박지민 역시 놀라는 눈치였다. 그때 마침 방을 나오는 전정국이었음을. 그새 마음을 추스른 걸까, 언제 울었냐는 듯이 멀쩡한 상태로 걸어나오길래 마음 한 쪽이 쓰라렸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이 있다. 감정 표현 하나 안 한다고 한동안을 그렇게 미워해온 나인데, 어쩌면 너는. 너 역시 너무 여려서 나에게 모든걸 내어주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누구보다도 나에게 상처를 많이 입었기에, 나에게 너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래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구나.
이제서야 답을 찾은 것만 같다.
태형의 입을 가리던 손에 힘이 풀렸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보였다. 아… 이제야 알 것만 같다. 난 눈을 가린 채 너희를 입막음하고 있었구나. 난 나의 잘못도 자각하지 못하고 너희를 미워했고, 그럼에도 사랑받길 원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내게 주는 관심을 가지고 싶었어. 내가 너희에게 저지른 잔인한 짓을 멈추지 않은 채, 너희에게 너무 큰 애정을 바랐다. 이러면 안됐는데.
.
점심식사 후, 해가 조금은 기울어진 시각. 보지 못했던 바다의 새로운 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박지민이 손수 내려준 커피를 두 손에 쥐고서 밖으로 나섰다. 짠 소금물 냄새가 뭐 이리도 감동적이게 느껴지는지. 헛웃음이 나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평소에 이런 곳에 좀 올 걸. 난 이런 시간도 미루고 대체 뭘 했지?
커피가 달았다. 달콤한 향기가 입안에서 계속 맴돌았다. 잔은 따뜻했고, 날은 아직 추웠다. 그리고… 저만치 멀리 보이는 연분홍빛 나무. 들뜬 마음에 잔을 잠시 야외 테이블에 내려놓고 슬리퍼가 벗겨지기 직전인 상태로 조금씩 뛰었다. 작지만, 꽃을 피우고 있는 나무의 앞에 멈춰섰다.

벚꽃이었다. 이번 생에는 정말 못 보고 갈 줄 알았는데. 작게나마 피어있는 꽃송이들이 예뻐서 기뻤다. 그동안은 이렇게 꽃을 가까이서 볼 일이 없었는데. 이 나무가 가장 일찍 꽃을 피웠다. 네 덕분에 내가 행복하게 됐다. 구름과 같은 촉감의 꽃잎을 만져보았다. 조금만 더 힘을 주었다간 떨어질 것 같았다. 참 연약한 꽃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나무가 흔들렸고, 내가 건드린 꽃잎이 끝끝내 바람에 날렸다. 한동안을 공기저항에 휩쓸려 이리저리 날아다니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 내려앉았다. 그새 먼지가 붙은 꽃잎을 주워 주머니 안에 넣었다. 너는 나와 닮았을까. 아니면 세 남자들과 닮아있을까.
.
지평선 너머로 해가 잠식되어가고 있다. 무수히 많은 파도는 해를 삼켰다. 겨우 남은 태양의 끝부분만이 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마지막 힘을 있는 힘껏 내어서. 그 덕에 하늘이 빨갛다. 그 하늘을 그대로 비추는 바다 역시 붉은 색감으로 물들었다. 우리는 일렬로 나란히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박지민, 나, 전정국, 김태형 순으로 앉아 나는 지민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전정국과 김태형은 상대적으로 먼 거리였다.
편안한 숨이 밀려들어왔다. 파도가 치며 모래사장을 뒤덮듯, 깊은 숨이 폐부를 타고 몸을 환기시켰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있다.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그 간격이 길어졌다. 숨이 차진 않았다. 편안했다. 그의 어깨에 기대어 쉬는 모든 숨들이 평온했다. 귓가로 김태형과 전정국이 말다툼하는 듯한 단어들이 들어오다 말았다.
“지민아.”
“응.”
“미안해.”
지민의 숨이 순간적으로 멎는 듯했다. 내가 기댄 어깨가 갑자기 미동 없이 굳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그의 어깨 역시 오르락내리락했는데.
“정말 미안해.”
“곧 죽겠다. 안하던 말을 다 하고.”
“넌 좋은 사람이야. 알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심장에 돌덩어리가 얹힌 듯 마음이 무거웠다. 태형이한테도, 정국이한테도 많이 미안하지. 근데 너한텐 특히 더. 나한텐 네가 과분했거든. 살짝 웃으며 분위기를 풀려 하자, 지민이 입을 열었다.
“안다니 다행이네.”
“재치는 여전하고.”
“진단서를 봤어.”
보려던 건 아닌데, 너무 잘 보이는 위치에 있었어. 그래서 알았어 너 아픈 거. 그가 말했다. 잠시 생각하다, 내 시한부 진단서 종이를 말한다는 걸 깨달았다. 예상을 못했던 건 아니다. 충분히 들킬만도 했으니까. 그와중에 눈이 감겼다. 아직 잠들기는 싫은데. 이 순간을 눈에 더 담아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눈을 감으면, 다시 뜰 수는 없으리라는 걸.
주머니를 더듬어 아까 주웠던 벚꽃잎을 그에게 건넸다. 그새 끄트머리가 갈색빛으로 변해있었다. 나무에 의지할 때만 해도 분홍빛이던 그 꽃잎이, 의지할 나무를 잃어버리고 생기 없이 말라갔다. 꽃잎을 받아든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의미인지 알았던 걸까. 그렇다고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고마워.”
“…”
“둘한테도 전해줘. 미안하다고.”
“…”
“내 집에 편지 있어.”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애를 써서 울음을 참아보려 하는 것 같았다. 덩달아 간신히 매달리던 내 눈물이 떨어졌다. 숨을 한 번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나중에 가서 꼭 읽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마지막엔 얼마나 아픈 통증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편안했다. 행복했고, 평화로운 그 순간에 나는 눈을 감았다. 사람은 죽을 때 끝까지 남는 감각이 청각이라 그랬던가. 바닷소리가 점점 작아졌고,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감각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내 귀에 속삭였다.
사랑해.
.
안녕, 나의 청춘.
안녕, 나의 사랑.
지독하게도 이기적이었던 내 시간들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의 지난 시간들을 후회해. 너희들이 없는 곳에서나마 나는 그 벌을 받겠지? 그러니 너희는 잘 살아야 해. 내가 질투하고 시기할 정도로 성공해서 좋은 여자 만나고, 행복하게 살아. 그리고 언젠가 날 잊게 되면, 그땐 내가 마음 놓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 날 잊어. 우리의 아픈 시간들을 간직하는 사람은 나 하나로 족하니까.
안녕. -이안이가
.
이안이 눈을 감았다. 지민은 이안이 말이 없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이안을 쳐다볼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제 어깨에 기대있는 이안은 평온해보였다. 지민은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이안의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랑해. 동시에 그의 참고 참던 눈물이 후두둑 이안의 볼에 떨어졌다.
그제서야 조금 떨어져 있던 태형과 정국이 지민의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다. 지민은 고개를 들어 둘을 응시했다. 태형과 정국은 지민이를 한 번, 그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이안이를 한 번 보았다. 네 사람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이안은 어제 보여주었던 파리에서 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