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 앞에는 좌의정 댁에서 먼저 보낸 하인들이 서 있었고 사랑채에는 아버님이 평소보다 일찍 자리를 잡으셨다.
소화는 내 머리를 빗으면서도 몇 번이나 방문 쪽을 힐끔거렸다.
“빗으로 내 머리 뽑을 생각이야?”
손이 멈췄다.
“…죄송합니다.”
“긴장했어? 손이 떨리잖아.”
소화가 빗을 내려다봤다.
정말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기씨는 안 떨리십니까?”
나는 거울 속 내 얼굴을 바라봤다.
“떨려.”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요.”
“어제 밤에 이미 충분히 떨었거든.”
잠도 거의 못 잤다. 좌의정이 온다.
한노아의 할아버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혼례를 반대한다면 미루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오히려 앞당겼다.
그것도 손자인 한노아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조건을 걸러 오시는 거다.’
노아의 말이 떠올랐다.
‘나를 꺾을 조건.’
그리고.
‘아니면 그대를.’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소화가 머리에 비녀를 꽂았다.
“됐습니다.”
“이상해?”
“아닙니다. 아주 단정합니다.”
“너무 단정하면 만만해 보이지 않을까.”
소화가 거울 속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아기씨는 가만히 계셔도 별로 만만해 보이진 않으십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좋은 뜻입니다.”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다.
짙은 남색 치마에 옅은 회색 저고리. 장신구도 최소한으로 했다.
좌의정에게 예쁨 받으러 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싸우러 가는 자리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러 가는 자리였다.
방문을 열자 차가운 아침 공기가 들어왔다.
마루 끝에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한노아였다. 팔짱을 낀 채 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왜 여기 계십니까.”
그가 나를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기다렸다.”
“저를요?”
“응.”
“왜요.”
“같이 가려고.”
나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제 옆에 계세요.’
그걸 정말 문자 그대로 지킬 생각인 모양이었다.
“공자님. 어제 제가 옆에 있어달라고 한 건.”
“알아.”
노아가 먼저 말했다.
“대신 싸워달라는 뜻은 아니었겠지.”
그가 웃었다.
“그 정도는 알아듣는다.”
“그러면 오늘 제가 말하게 해주세요.”
“그러지.”
“제가 대답하기 전에 끼어들지 마시고요.”
“노력해보지.”
“노력이 아니라 약속이요.”
노아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어렵군.”
“벌써 못 하겠습니까?”
“할 수 있다.”
그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대가 허락하기 전에는 끼어들지 않으마.”
“좋습니다.”
“다만.”
역시 그냥 넘어갈 인간이 아니다.
“뭡니까.”
“내가 정말 참기 힘들면.”
“참으세요.”
“아직 말 안 끝났는데.”
“어차피 참기 힘들면 말하겠다는 소리잖아요.”
노아가 잠깐 나를 보더니 웃었다.
“이제 내 말을 너무 잘 아는군.”
“몇 년을 당했는데 모르면 바보죠.”
“그럼 다행이고.”
그가 내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나란히 사랑채로 향했다.
몇 걸음쯤 걷다가 노아가 불쑥 물었다.
“무섭나?”
나는 앞을 보며 대답했다.
“조금.”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된다.”
“안 갑니다.”
사랑채가 가까워졌다. 마루 아래 낯선 신발들이 보였다.
“ㅇㅇ아. 오늘 무슨 말을 듣든, 그 말이 네 값은 아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사람들이 네 집안을 말하고 신분을 말하고 네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를 말해도.”
노아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게 너를 정하는 건 아니야.”
가슴 어딘가가 아주 조용히 내려앉았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물었다.
“그런 말씀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청국”
“거짓말”
“들켰네.”
역시.
나는 피식 웃었다.
조금 전까지 굳어 있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노아가 먼저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갈까.”
이번에는 내가 먼저 한 걸음을 내디뎠다.
“가요.”
*
좌의정은 생각보다 늙어 보이지 않았다.
물론 머리카락에는 희끗한 빛이 돌았고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있었다.
그런데 눈이 이상할 만큼 맑았다.
사람을 오래 들여다보는 눈.
마주 앉은 사람의 말보다 그 뒤에 숨은 생각을 먼저 보려는 사람의 눈이었다.
아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 딸입니다.”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깊게 절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감.”
“그래.”
짧은 대답이었다.
“고개를 들거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좌의정의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
한참이었다.
정말 한참.
사람 얼굴에 뭐가 그렇게 많이 적혀 있다고 저렇게 읽으시는지.
나도 모르게 허리를 조금 더 곧게 폈다.
그때 옆에서 노아가 말했다.
“할아버지.”
나는 즉시 노아를 쳐다봤다.
끼어들지 말라 했는데.
노아가 내 시선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좌의정의 눈이 우리 사이를 한 번 오갔다.
“네가 입을 다무는 날도 오는구나.”
“오늘만입니다.”
“그것도 기특한 일이지.”
둘이 닮았다.
정말 싫게 닮았다.
좌의정이 다시 나를 바라봤다.
“네 아비에게 들으니 글을 읽는다더구나.”
“조금 읽습니다.”
“그림도 그린다고.”
심장이 순간 멎었다.
아버님을 바라볼 뻔했다.
간신히 참았다.
좌의정은 내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왜 놀라느냐.”
“…여인이 그림을 그리는 일을 좋게 보지 않는 분이 많으시니까요.”
“내가 그리 말했느냐.”
“아직은 아닙니다.”
그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옆에서 노아가 고개를 숙였다.
웃는 것 같았다.
지금 웃음이 나와?
좌의정이 물었다.
“붓을 잘 잡느냐.”
나는 잠시 생각했다. 겸손하게 말해야 할까.
아버님 앞에서는 늘 그랬다.
아직 부족합니다.
재주라 할 정도가 아닙니다.
그저 취미일 뿐입니다.
여자가 자기 솜씨를 말할 때 안전한 대답은 늘 작아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잘 잡습니다.”
아버님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노아도 나를 봤다.
좌의정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
“제법 자신이 있구나.”
“못하는 것을 잘한다고 하진 않습니다.”
“그럼 네 아비만큼 그리느냐.”
이번에는 조금 고민했다.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예.”
좌의정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은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젠가는 네 아비보다 잘 그릴 생각인가.”
나는 아버님을 바라봤다. 아버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좌의정을 바라봤다.
“그러고 싶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제야 알았다.
아.
나 방금 너무 솔직하게 말했구나.
이미 늦었다.
좌의정이 찻잔을 들었다.
“좋다.”
의외의 말이었다.
“사람이 재주를 가진 것은 허물이 아니지.”
찻잔이 다시 상 위에 놓였다.
“다만 그 재주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아는 것은 다른 문제다.”
왔다.
나는 손가락을 조금 말아쥐었다.
좌의정이 말했다.
“혼례는 예정대로 열흘 뒤에 치를 것이다.”
노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제까지 스무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열흘로 줄였다.”
“이유를 여쭤도 됩니까.”
“윤가에서 다시 움직이고 있다.”
처음으로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나는 노아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굳었다.
좌의정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청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쪽에서는 혼사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 생각했겠지.”
“저는 끝났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네가 끝냈다고 세상이 함께 끝내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혼례를 당기실 이유는 없습니다.”
“있다.”
좌의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혼약은 말로만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납채가 오가고 혼기가 정해지면 그 뒤의 말은 이전과 무게가 달라지는 법이다.”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니 혼례를 당긴 것 자체에는 다른 뜻이 없다.”
노아가 물었다.
“그럼 직접 오신 이유는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좌의정은 이번에는 나만 바라봤다.
“이 아이 때문이다.”
예상했는데도 손끝이 차가워졌다.
“내 손자가 너를 고집하는 이유를 보러 왔다.”
“할아버지.”
노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움직였다.
아주 작게.
손바닥을 아래로 눌렀다. 기다리라는 뜻.
노아가 그것을 봤다. 입을 다물었다.
좌의정의 눈이 다시 우리 사이를 스쳤다.
모르는 척했지만 분명 봤다.
“혼인은 둘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했다.
“특히 이 집안의 혼인은 더 그렇다.”
알고 있었다.
둘 사이에 놓인 것은 마음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쌓아놓은 보이지 않는 벽.
“네가 한씨 집안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네가 무엇을 하든 네 이름보다 먼저 우리 집안을 볼 것이다.”
“예.”
“네 실수는 네 실수로 끝나지 않을 것이고.”
“예.”
“네 아비의 일도, 네 친정의 일도 때로는 우리 집안의 일이 될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모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안다는 것과 겪는 것은 다르다.”
그 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묻겠다.”
좌의정이 말했다.
“혼례를 치른 뒤에도 붓을 잡을 생각이냐.”
옆에서 노아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
“예.”
대답했다.
좌의정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내가 놓으라 한다면.”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방 한쪽에 앉은 아버님이 보였다.
평생 붓을 잡은 손, 먹이 밴 손톱.
궁에서 명이 내려오면 밤을 새워 그림을 그리고도 자기 이름 하나 마음대로 남기지 못했던 사람.
그리고 어머니.
‘여자가 붓을 쥐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붓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남들이 묻게 되는 것이 문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그걸 들키는 일이 더 위험하다는 걸.
그래서 숨겼다.
아버님에게.
남들에게.
때로는 나 자신에게까지.
그런데 이상했다.
한노아에게 들킨 뒤부터 더 숨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좌의정을 바라봤다.
“놓지 못합니다.”
아버님의 손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노아는 숨조차 크게 쉬지 않았다.
좌의정이 물었다.
“왜.”
“좋아하니까요.”
“그림이?”
“예.”
너무 단순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
“제가 잘하는 일이기도 하고.”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좌의정은 아무 말이 없었다.
“대감께서 한씨 집안의 법도를 배우라 하시면 배우겠습니다.”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떨리지 않았다.
“어른을 공경하라 하시면 그리하겠습니다. 집안의 체면을 가벼이 여기지도 않겠습니다.”
잠깐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붓을 놓으라고 하시면.”
처음으로 손끝이 떨렸다.
나는 무릎 위에서 손을 꽉 쥐었다.
“그건 못 하겠습니다.”
“혼례가 깨질 수도 있는데도?”
노아가 이번에는 정말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보다 먼저 말했다.
“예.”
내 대답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혼례가 깨질 수도 있다. 며칠 전이었다면 그 말에 심장이 먼저 내려앉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무서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되진 않았다.
좌의정이 나를 한참 바라봤다.
“노아가 너 때문에 청까지 갔다.”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몇 년을 버렸다.”
그 말에 처음으로 속에서 무언가 올라왔다.
“저도 버렸습니다.”
방 안이 얼어붙었다.
아.
이건 조금 세게 말했나.
하지만 이미 나온 말이었다.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좌의정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무엇을.”
나는 침을 삼켰다.
“몇 년을요.”
노아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
“공자님만 잃은 것이 아닙니다.”
말할수록 오래 묵은 감정이 조금씩 올라왔다.
“저도 아무것도 모른 채 기다렸습니다.”
좌의정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이 사라졌다.
“아팠고.”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미워했고.”
그리고.
“그래도 잊지 못했습니다.”
노아가 숨을 아주 작게 들이켰다.
아차.
저 인간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는데.
나는 급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공자님이 저 때문에 무엇을 버렸다는 말씀으로 제가 제 것을 버려야 한다고 하시면.”
좌의정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긴 침묵.
아버님도. 노아도. 좌의정도.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지금 조선에서 제일 높은 벼슬아치 중 한 사람에게 공평을 따지고 있는 건가.
맞네.
큰일 났다.
그때.
“푸흐.”
소리가 났다.
나는 옆을 홱 돌아봤다.
한노아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깨가 흔들렸다.
“미안.”
웃고 있다.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아니.”
나온다.
분명 나온다.
좌의정이 차갑게 말했다.
“노아야.”
“예.”
노아가 겨우 얼굴을 들었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무엇이 그리 우습지.”
“제가 몇 년을 버렸다는 말이 조금 억울해서요.”
“뭐?”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노아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버렸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그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대 때문에 보낸 세월이면 버린 게 아니니까.”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인간은 정말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좌의정 앞이다. 네 할아버지 앞이라고.
좌의정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래서 너를 못마땅해하는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입이 가볍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고칠 생각이 없지.”
“필요한 말까지 참는 것보단 낫다고 배웠습니다.”
“누구에게.”
노아의 시선이 잠깐 내게 왔다.
“방금요.”
나는 눈을 감았다.
제발.
좌의정은 한동안 손자를 바라봤다.
그러다 다시 나를 향했다.
“내가 네게 붓을 놓으라 한 이유가 단순히 여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잠시 생각했다.
“아닙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좌의정이 말했다.
“네 그림이 밖으로 나가면 네가 누구인지 알려진다.”
나는 조용히 들었다.
“도화서 화원의 딸.”
그 말이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중인의 여식이 좌의정 집안의 종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굳이 떠들고 싶어 하는 이들이 생길 것이다.”
노아의 얼굴이 굳었다.
좌의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것을 빌미로 노아를 치려는 자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요.”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그래서 제 아버지가 부끄러운 사람입니까?”
아버님이 나를 바라봤다.
좌의정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리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숨기라는 말씀 아닙니까.”
“정치는 옳고 그름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저는 정치를 모릅니다.”
“그래 보이는구나.”
“하지만.”
나는 아버님을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제 아버지가 부끄럽지 않다는 건 압니다.”
아버님의 얼굴이 굳었다.
“왕실의 그림을 그리고 나라의 기록을 남기고 평생 자기 일을 해온 사람입니다.”
목이 조금 메었다.
그래도 계속 말했다.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버지께 배운 것입니다.”
사실 직접 배웠다고 할 수는 없었다.
훔쳐봤다.
따라 그렸다.
혼났다.
또 그렸다.
그런데 그것도 결국 배운 것이었다.
“그걸 숨겨야만 들어갈 수 있는 집이라면.”
입술이 조금 떨렸다. 이번 말은 무서웠다.
정말 무서웠다.
그래도 했다.
“저는 그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노아가 천천히 나를 바라봤다.
좌의정은 미동도 없었다.
“혼례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냐.”
나는 대답하기 전에 노아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정할 때까지 정말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보자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혼례는 하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노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왜 네가 놀라. 당신이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공자님과.”
말하고 나니 민망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숨길 수는 없었다.
“한노아 공자님과 혼례를 치르고 싶습니다.”
노아가 입을 열었다.
나는 바로 말했다.
“지금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입이 다시 닫혔다.
좌의정의 눈이 희미하게 가늘어졌다.
“그런데.”
나는 말을 이었다.
“그 혼례를 하기 위해 제가 제 아버지를 부끄러워해야 하거나.”
한마디.
“제가 좋아하는 일을 버려야 하거나.”
두 마디.
“제가 누구인지 숨겨야 한다면.”
세 마디.
“그렇게까지 해서 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 말하고 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바닥에는 땀이 났다.
무릎이 조금 떨렸다.
그런데 얼굴만큼은 들고 있었다.
좌의정이 물었다.
“노아가 그래도 너를 택한다면.”
이번에는 노아가 답했다.
“택합니다.”
나는 그를 노려봤다.
“공자님.”
“이건 나한테 물으셨잖아.”
맞는 말이라 더 짜증 났다.
좌의정이 손자를 바라봤다.
“집안과 척을 지고도?”
“할아버지.”
노아가 웃음기 없이 말했다.
“제가 이 집안에서 얻은 이름도 지위도 버리겠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좌의정의 눈빛이 달라졌다.
“저도 제 자리를 지킬 겁니다.”
노아가 말했다.
“다만 그 자리에 서기 위해 이 사람을 깎아낼 생각은 없습니다.”
가슴이 조용히 뛰었다.
“그게 할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한씨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면.”
노아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는 제가 부족한 것이겠지요.”
“노아야.”
“예.”
“네가 아직도 청에서 배운 것이 없구나.”
“많이 배웠습니다.”
“무엇을.”
노아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늦으면 잃는다는 걸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좌의정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뜻밖에도 웃었다.
아주 작게.
정말 한순간이었다.
“둘이 아주 잘 만났구나.”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게 칭찬인가. 아닌 것 같은데.
“하나는 고집이 세고.”
좌의정이 노아를 봤다.
“하나는 더 세고.”
이번에는 나를 봤다.
역시 칭찬 아니었다.
“대감.”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혼례는…”
“예정대로 한다.”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노아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
“왜.”
“방금까지는 붓을 놓으라 하셨잖습니까.”
“놓으라 했지.”
“그런데요.”
좌의정이 태연하게 차를 들었다.
“싫다잖느냐.”
“…….”
“…….”
이번에는 나와 노아가 동시에 말이 없어졌다.
좌의정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직접 보러 온 것은 말을 잘 듣는 아이인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찻잔이 내려왔다.
“네가 왜 저 아이를 버리지 못했는지 보러 왔다.”
노아의 표정이 굳었다.
“몇 년 전에는 몰랐다.”
좌의정이 말했다.
“그때 내게 이 아이는 그저 도화서 화원의 딸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윤가는 더 큰 힘을 줄 수 있었고.”
그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그게 너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노아의 턱이 굳었다.
“그래서 제게 혼약을 깨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그리고 제가 거절하니 청으로 보내셨고요.”
“그건 네 선택이었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을 하나만 남겨두셨죠.”
공기가 팽팽해졌다.
나는 처음으로 노아와 좌의정 사이에 놓인 몇 년을 보는 것 같았다.
나만 상처받은 것이 아니었다.
노아도. 어쩌면 저 노인도.
자기 방식으로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좌의정이 나를 바라봤다.
“내가 잘못 본 것이 하나 있더구나.”
“무엇입니까.”
“저놈이 청까지 가서도 포기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나는 노아를 바라봤다.
그는 할아버지만 보고 있었다.
“돌아오면 정신을 차릴 줄 알았지.”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내가 무심코 말했다.
노아가 나를 봤다.
“그대.”
“왜요. 사실이잖아요.”
좌의정이 이번에는 정말 웃었다.
짧은 웃음이었다.
“그래 보이는구나.”
노아는 억울한 얼굴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좌의정이 아주 조금 덜 무서워졌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표정이 다시 가라앉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심해라.”
나와 노아가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
“윤가는 물러나지 않았다.”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목소리였다.
“혼례가 열흘 뒤라고 해서 그 열흘이 조용할 거라 생각하지 마라.”
노아가 물었다.
“무슨 움직임이 있습니까.”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
“할아버지.”
“확실하지 않은 것을 말해 네 판단을 흐릴 생각은 없다.”
좌의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알아내라.”
노아도 일어섰다.
“그 말씀을 하러 직접 오신 겁니까.”
“그것도 있고.”
좌의정의 시선이 내게 왔다.
“신부 얼굴도 볼 겸.”
“…….”
이 집안 남자들은 왜 다 이렇지.
좌의정이 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이야.”
“예.”
“붓을 계속 잡고 싶다 했지.”
“예.”
“그럼 잘 그려라.”
나는 눈을 들었다.
“어설프게 그려서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할아버지.”
노아가 어이없다는 듯 불렀다.
나는 잠시 좌의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가 지나갔다.
몇 걸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노아야.”
“예.예.”
“열흘 안에 또 도망가면.”
노아의 얼굴이 굳었다.
“이번엔 내가 잡으러 청까지 간다.”
나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노아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럴 일 없습니다.”
좌의정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알아.”
그 한마디를 남기고 마루를 내려갔다.
좌의정이 돌아간 뒤. 나는 한동안 사랑채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정확히 말하면—이제야 떨렸다.
“소화야.”
문밖에서 기다리던 소화가 급히 들어왔다.
“예, 아기씨.”
“나 물 좀.”
“예.”
“찬 걸로. 아주 찬 걸로.”
소화가 황급히 나갔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말 미쳤다.
좌의정한테 뭐라고 한 거지.
공평하지 않다.
붓 못 놓는다.
그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아.”
나는 그대로 상 위에 이마를 박고 싶었다.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멋있던데.”
고개를 들었다.
한노아가 웃고 있었다.
“공자님은 조용히 계세요.”
“왜.”
“지금 제가 얼마나 큰일을 저질렀는지 생각 중이니까.”
“큰일?”
“좌의정 대감께 말대꾸했습니다.”
“응.”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랬지.”
“그런데 왜 그렇게 평온하세요?”
노아가 내 앞에 앉았다.
“할아버지가 마음에 들었을 때 나오는 표정을 봤으니까.”
나는 눈을 깜빡였다.
“마음에 드셨다고요?”
“응.”
“저를요? 어디가요?”
노아가 잠시 생각했다.
“말 안 듣는 부분”
“…….”
“우리 집안 내력인가 보지.”
“저 한씨 아닙니다.”
“열흘 뒤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웃음이 조금 났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도 몰랐다.
잠시 뒤 내가 물었다.
“..정말 아무 말도 안 하셨네요.”
노아가 나를 바라봤다.
“답답하지 않았습니까.”
“죽는 줄 알았다.”
웃음이 터졌다.
“특히 붓 놓으라는 말씀 하셨을 때. 그때는 정말 끼어들 뻔했다.”
“왜 참으셨어요.”
노아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네가 말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내가 대신 말하는 순간 할아버지 눈에는 네가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되니까.”
나는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
“그건 싫었다.”
노아가 말했다.
“네 옆에 서겠다고 했잖아.”
내가 했던 말.
그걸 이 사람은 나보다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뒤가 아니라.
앞도 아니라.
옆.
“공자님. 오늘은 조금.”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했다.
“고마웠습니다.”
노아가 눈을 깜빡였다.
정말 놀란 얼굴이었다.
“그렇게 놀랄 일 입니까?”
“아니 그..”
그가 헛기침했다.
“그대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라서.”
“취소할까요?”
“절대”
대답이 아주 빨랐다.
노아가 웃었다.
“기분 좋네.”
“티 내지 마세요.”
“그건 어렵겠는데.”
“왜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겠습니다.”
“또?”
“물 마시러요.”
“물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
마침 소화가 쟁반을 들고 들어오다가 멈췄다.
“…….”
나는 소화를 바라봤다.
“왔네.”
나는 물그릇을 낚아채듯 들었다.
한 번에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지만 얼굴은 전혀 식지 않았다.
*
아버님은 점심이 지나서야 나를 화실로 부르셨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버님은 창가에 앉아 계셨다.
앞에는 종이도 붓도 없었다.
“앉거라.”
나는 조용히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말을 들을지 알고 있었다.
아침에 너무 나섰다. 좌의정에게 무례했다.
여인이 붓을 놓지 않겠다는 말을 그렇게 대놓고 해서는 안 됐다.
아버님의 체면까지 들먹였다.
혼날 이유는 충분했다.
나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아침 일은 죄송합니다.”
“무엇이.”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제가 대감께 너무…”
“네가 틀린 말을 했느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님은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무뚝뚝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얼굴.
“아버님.”
“네가 내게 그림을 배웠다고 했지.”
심장이 철렁했다.
“그건…”
“내가 언제 가르쳤느냐.”
역시.
“죄송합니다.”
“훔쳐본 것도 배운 것이라면.”
아버님이 말했다.
“맞는 말이겠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버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 쪽으로 걸어가 오래된 궤 하나를 열었다.
그리고 작은 상자를 꺼냈다.
내 앞에 놓았다.
“열어봐라.”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붓이 있었다. 오래된 붓.
붓대 끝에는 작은 매화 한 송이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문양을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편지를 쓰실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 것입니까.”
“그래.”
손을 뻗다가 멈췄다.
“왜 이걸 저한테…”
“네 어미도 그림을 그렸다.”
나는 아버님을 바라봤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잘 그리지는 못했다.”
“…그 말씀 어머니께 하셨습니까?”
“했다.”
“싸우셨겠네요.”
“사흘간 말을 안 하더구나.”
나도 모르게 웃었다.
아버님의 입가도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네가 붓을 잡는 걸 처음 본 날 네가 일곱 살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럼…”
“네가 몰래 화실에 들어와 종이를 훔쳐간 것도 알았다.”
“…….”
“내 붓을 망가뜨린 것도.”
“그건 소화가…”
“그때 소화는 우리 집에 오기도 전이다.”
아. 끝났다. 십 년 넘은 거짓말이 지금 들켰다.
“죄송합니다.”
“됐다.”
아버님이 붓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막으려 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재주가 없었다면 차라리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자꾸 나아지더구나.”
아버님의 손가락이 상자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
“그래서 더 겁이 났다. 재주가 있으면 쓰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 붓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남들이 묻게 되는 것이 문제다.’
“네 어미가 죽기 전에 내게 하나 부탁했다.”
아버님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갈라졌다.
“저 아이 손에서 붓을 억지로 빼앗지는 말아달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
“네가 숨기면 숨기는 대로.”
아버님이 나를 바라봤다.
“다만 네가 먼저 세상에 내놓겠다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
눈앞이 조금 흐려졌다.
나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제가 계속 그려도 괜찮으십니까.”
아버님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말했다.
“오늘 네가 이미 답했지 않느냐.”
나는 눈을 들었다.
“내 허락이 없다고 놓을 손이더냐.”
“…아닙니다.”
“그럼 됐다.”
아버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 내 딸이라고 말했으니 못 그리면 안 된다.”
나는 웃다가 눈물을 닦았다.
“좌의정 대감이랑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님의 얼굴이 즉시 굳었다.
“그 사람과 나를 엮지 마라.”
웃음이 더 났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버님 앞에서 이렇게 웃는 것이
나는 상자 속 붓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아주 가벼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에 올리자 묵직했다.
어머니의 손이 닿았던 물건.
아버님이 몇 년 동안 보관했던 물건.
그리고 이제 내 손에 온 붓.
“잘 쓰겠습니다.”
아버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질 무렵.
나는 마루에 앉아 새 붓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새 붓은 아니었다.
아주 오래된 붓.
그런데 내게는 오늘 처음 생긴 붓이었다.
“그게 그 붓인가.”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 필요도 없었다.
“공자님은 남의 집을 왜 이렇게 제집처럼 돌아다니십니까.”
“곧 처가가 될 집인데.”
“아직 열흘 남았습니다.”
노아가 내 옆에 앉았다.
“열흘밖에 안 남았지.”
나는 붓을 다시 내려다봤다.
노아가 물었다.
“장인어른께서 주셨나?”
“아직 장인어른 아닙니다.”
“열흘.”
“그 말 한 번만 더 하면 혼례 하루 미룹니다.”
노아가 입을 다물었다.
효과가 아주 좋았다.
잠시 뒤 그가 붓을 바라봤다.
“좋은 붓이네.”
“어머니가 쓰시던 겁니다.”
노아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조금 사라졌다.
“그랬군.”
“아버님이 알고 계셨대요.”
“뭘.”
“제가 그림 그리는 거.”
“그럴 줄 알았다.”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알았어요?”
“그대는 숨기는 걸 생각보다 잘 못해.”
“저 몇 년 동안 안 들켰거든요.”
“내 얼굴 그린 족자를 화실 서랍에 넣어놓고?”
“한공자.”
“알았다.”
그가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그 이야기는 안 하지.”
나는 붓으로 그의 팔을 툭 쳤다.
노아가 붓을 보더니 물었다.
“그걸로도 내 얼굴 그릴 건가.”
“아니요. 산수화 그릴 겁니다.”
“내가 산보다 못하나.”
“비교할 걸 비교하세요.”
“그럼 꽃?”
“공자님.”
“새?”
“조용히 좀 하세요.”
그가 웃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붓을 상자에 넣었다.
노아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상해서 옆을 보니 나를 보고 있었다.
“아까 한 말. 혼례하고 싶다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
그걸 잊고 있었다.
아니.
잊은 척하고 있었다.
“좌의정 대감 앞에서 한 말입니다.”
“나도 들었는데.”
나는 시선을 피했다.
“상황상 한 말이에요.”
“응.”
“오해하지 마세요.”
“안 한다.”
“정말입니다.”
“알았다.”
너무 순순하다.
이 인간이 순순하면 불안하다.
“왜 웃습니까.”
“그대가 나랑 혼례하고 싶다잖아.”
“…….”
“생각보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공자님.”
“응.”
“아까 제가 고맙다고 한 것도 취소하겠습니다.”
“그건 안 돼.”
“왜요.”
“이미 들었다.”
“그럼 혼례하고 싶다는 말도 들은 걸로 끝내세요.”
“그건 열흘 뒤에 실현할 거라서.”
나는 붓 상자를 들고 일어났다.
“갑니다.”
“어디.”
“공자님 없는 곳.”
노아가 따라 일어났다.
“같이 가지.”
“왜요!”
“네 옆에 있으라고 했잖아.”
“그건 어제!”
“언제까지라고는 안 했는데.”
나는 멈췄다.
노아도 멈췄다.
“공자님.”
“응.”
“규칙 하나 추가할까요.”
“뭔데.”
“사람 말 꼬투리 잡지 않기.”
“그건 내가 너무 불리한데.”
“그러니까 넣자는 겁니다.”
노아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했다.
“거부.”
“왜 공자님한테 거부권이 있습니까?”
“서로 정하는 규칙이니까.”
맞는 말이다.
짜증 난다.
나는 먼저 걸었다. 노아가 뒤에서 따라왔다.
몇 걸음 뒤 그가 불쑥 말했다.
“ㅇㅇ아.”
“왜요.”
“오늘 네가 내 옆에 서겠다고 한 것.”
나는 걸음을 늦췄다.
“그런 말 안 했는데요.”
“했어.”
“언제요.”
“나와 혼례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뒤돌아봤다. 노아는 웃고 있지 않았다.
“고맙다.”
이번에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낮게 덧붙였다.
“내가 기다린다고 해서 네가 반드시 와야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가슴이 이상하게 아렸다.
몇 년 전 나는 기다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리고 지금 이 사람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돌아볼지, 다시 믿을지, 자기 옆에 설지 강요하지 않고.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다 온 건 아닙니다.”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아직 공자님한테 화난 것도 많고요.”
“그것도 알고.”
“물어볼 것도 많습니다.”
“물어.”
“나중에요.”
“응.”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래도 조금은.”
말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 얼굴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민망해졌다.
“뭐라도 말하세요.”
“말하면 도망갈까 봐.”
“…잘 아시네요.”
“그러니까 참는 중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노아가 따라오지 않았다.
이상해서 돌아봤다.
그는 그대로 서 있었다.
“안 옵니까?”
노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도 말하고 나서 깨달았다.
아.
내가 지금—같이 오라고 했네.
“왜 그렇게 봅니까.”
노아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아무것도.”
“웃지 마세요.”
“안 웃었는데.”
“웃고 있잖아요.”
“기분이 좋아서.”
“됐습니다. 오지 마세요.”
“이미 늦었다.”
노아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옆에 섰다.
정말.이 인간은 한 번의 틈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게 그리 싫지 않았다.
*
그날 밤
소화와 혼례에 가져갈 물건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이건 가져가실 겁니까?”
소화가 오래된 책을 들었다.
“응.”
“이것도요?”
“그것도.”
“그럼 이 상자는…”
“그건 두고.”
하나씩 정리할 때마다 실감이 났다.
열흘. 이 방에서 자는 것도 이제 열 번 남았다.
평생 그대로 있을 것 같았던 것들이 갑자기 ‘두고 갈 것’과 ‘가져갈 것’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이것도 가져가세요?”
소화가 작은 상자를 들었다.
나는 재빨리 빼앗았다.
“그건 내가 할게.”
“뭔데요?”
“아무것도 아니야.”
한노아의 족자였다.
소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수상한데.”
“네 짐이나 싸.”
“제 짐은 다 쌌습니다.”
“왜 네가 나보다 빨라?”
“저는 숨겨둔 게 없으니까요.”
“…….”
요즘 얘가 자꾸 나를 이긴다.
그때 밖에서 하인이 소화를 불렀다.
잠시 뒤 다시 들어왔는데 손에 작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기씨.서찰이 왔습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누구한테.”
“그게…”
소화가 이상한 얼굴을 했다.
“보낸 분이…”
나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낯선 필체.
그런데 봉투 아래 적힌 이름은 알고 있었다.
손끝이 멈췄다.
윤서련.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윤가 아기씨 맞습니까?”
소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봉투를 뒤집었다.
봉인은 멀쩡했다.
“누가 가져왔어.”
“윤가의 하인이랍니다.”
“지금 어디 있는데.”
“서찰만 전하고 바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심장이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낮에 좌의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윤가는 물러나지 않았다.’
나는 봉인을 뜯었다.
안에는 짧은 편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단정한 글씨였다.
나는 첫 줄을 읽었다. 그리고 움직이지 못했다.
소화가 내 얼굴을 살폈다.
“아기씨?”
나는 편지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혼례가 열흘 뒤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전에 한 번 뵙고 싶습니다.
한 공자님 없이.
두 사람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여기까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나는 마지막 두 줄을 다시 읽었다.
‘청국에서 한 공자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전부 듣지 못하신 듯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소화가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편지를 내려다봤다.
청국. 한노아가 내게 아직 말하지 않은 것.
윤서련은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세 번째 규칙
‘서로 숨기고 싶은 것은 억지로 들춰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뒤에 붙었던 조건도 기억났다.
‘내가 숨긴 것 때문에 그대가 다치게 된다면
그대가 묻기 전에 내가 말하겠다.’
나는 천천히 편지를 접었다.
이상했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대신 아주 선명한 생각 하나가 들었다.
한노아에게 물어볼 것인가.
아니면
윤서련을 먼저 만날 것인가.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촛불이 길게 흔들렸다.
나는 손 안의 편지를 바라봤다.
오늘 아침 나는 좌의정 앞에서 내 자리를 말했다.
한노아의 뒤도 아니고 누구의 아래도 아닌 자리.
그렇다면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대신 정해준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 사람이 떠났던 몇 년 내가 모르는 한노아 그리고 윤서련이 알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일 윤가에 사람 보내.”
소화의 눈이 커졌다.
“답장을 보내시려고요?”
나는 다시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다.
“만나겠다고 해.”
이번에는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노아에게도 윤서련에게도 그리고 내가 아직 모르는 이야기에도.
다만 한 가지, 편지를 접는 순간 문득 생각했다.
한노아 당신이 약속한 세 번째 규칙.
이번에는—
정말 지킬 수 있겠지.
8화 내가 설 자리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