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3세가 꽃집에 빠진 이유

8. 재벌3세가 꽃집에 빠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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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오후5시

 

 

 

 

26

“조심히 들어가요. 집 도착하면 문자 보내고요.”

 

 

석진을 보낸 여주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신발을 벗고 불을 켰다. 익숙하지 원룸의 냄새. 하루를 마무리하던 조용한 공기. 현관을 지나 안쪽으로 한 걸음 들어서는 순간, 발바닥에 묘한 감각이 전해졌다. 바닥이 차가웠다. 그리고 젖어 있었다. 여주는 그대로 멈췄다. 어..이러면 안되는데..?

 

고개를 숙이자 바닥에 얇게 고인 물이 보였다. 처음에는 물을 흘렸나 싶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자 물이 발목 쪽으로 번졌다. 그제야 시선이 욕실로 향했다.

 

드르륵. 아주 작고 끈질긴 물소리.

문을 여는 순간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면대 아래 배관 쪽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여주가 원룸을 들어올 때 상상한 가장최악의 상황을 실제로 보는 셈이다. 욕실 바닥은 이미 흥건했고 물은 문턱을 넘어 방 쪽으로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여주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급하게 수건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하지만 물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아… 뭐야 이게.. 진짜...”

 

 

망했다.

말은 나왔지만 머릿속은 하얘졌다. 밸브를 잠그려 손을 뻗었지만 바닥이 미끄러워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수건을 몇 장 더 던져봤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오늘 밤 안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여주는 금방 알아챘다.

 

여주는 욕실 문 앞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물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바닥을 적시고 있었고, 그나마 수건이 제 역할을 잘해줘서 물이 새는 건 진정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흘러나온 물이 발목에 닿아 차가운 감각이 점점 분명해질수록 현실감도 같이 올라왔다. 이게 잠깐의 사고가 아니라는 걸,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휴대폰을 들었다 내려놨다. 다시 들었다.기사님 번호를 검색하다가 손을 멈췄다. 이 시간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빌라나 아파트도 아닌.. 관리실 같은 건 애초에 없는 오래된 원룸이었다. 예전에 수압 문제로 한 번 애를 먹었을 때, 집주인이 직접 사람을 불러야 했다는 이야기가 기억이 떠올랐다. 여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연락처 목록에서 집주인 이름을 눌렀다. 통화 버튼 위에서 잠깐 멈칫하다가, 메시지 창으로 방향을 바꿨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밤늦게 죄송해요. 집 욕실 세면대 아래 수도관에서 물이 새는 걸 방금 확인했어요. 임시로 수건이랑 걸레로 막아두긴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새서 바닥이 좀 엉망이에요. 오늘 안에 수리는 어려울 것 같아서 내일 기사님 부르셔야 할 것 같아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갑자기 몸에 힘이 풀렸다. 답장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보다, 이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여주는 다시 욕실을 한 번 보고, 방 안을 둘러봤다. 바닥으로 번진 물은 이미 침대 쪽까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여기서 자는 건 무리였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자, 다음 고민이 바로 따라붙었다. 그럼 어디서 자야하는지...

 

여주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가, 젖은 바닥을 보고 다시 일어섰다. 친구 집이 몇 군데 떠올랐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연락하기에는 애매했다. 괜히 설명해야 할 것도 많아질 것 같았다. 모텔이나 숙소를 검색해볼까 싶다가도, 물에 젖은 바지와 신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괜히 웃음이 났다. 오늘 하루가 정말 이렇게 끝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때 휴대폰 화면이 다시 켜졌다. 집주인의 답장은 아직 없었다. 대신, 아까 날 데려다준 그의 이름이 화면 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석진

 

 

여주야 푹 쉬어.

 

 

집에 도착 후 보낸 문자인 건가. 여주는 잠깐 그 이름을 바라봤다. 아까 골목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예민해도 이해해달라던 표정이 자연스럽게 겹쳤다. 귀찮게 하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이 다시 스쳤다. 하지만 이번엔, 그 뒤에 다른 문장이 붙었다.

그래도 이건 혼자서 버틸 상황은 아니지 않나. 그래도 나름....

 

여주는 휴대폰을 꼭 쥐었다. 어디서 잘지 결정하는 문제보다, 지금 이 상황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순간 같았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긁고 있었다. 잠깐만 더 생각하자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여주는 눈을 질끈 감고 휴대폰을 들고 문자를 보냈다.

 

 

지금 집이에요?

 

 

아직. 거의 다 왔는데 왜?

 

 

여주는 길게 문장을 썼다. 중간에 몇 번 지웠다가 다시 썼다. 결국 가장 사실에 가까운 말만 남겼다.

 

 

그게... 오늘은 여기서 못 잘 것 같아요. 수도가 새서 집이 물 바다에요..

 

 

보내고 나서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 답이 바로 오지 않으면 어쩌지. 괜히 부담 주는 건 아닐까. 여주는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하지만 여주의 걱정과는 달리 석진의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다친 데는 없어?
미끄럽지 않아?

 

 

안 다쳤어요.

 

 

거기 그대로 있어.
내가 다시 갈게.

 

 

여주는 그 문장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예상 못 한 말은 아니었는데 막상 눈앞에 놓이니 현실감이 확 올라왔다. 아까 골목에서 헤어질 때 분명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접히면서 다시 그를 부르게 될 줄은 몰랐다.아.. 괜히 연락했나 미안해지네.. 라고 생각하는 여주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하지만 괜찮다고 말하려다 멈췄다. 이미 괜찮지 않은 상태였다. 여주는 결국 솔직하게 썼다.

 

 

지금 오면 늦을 텐데요. 괜히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서요. 미안해요

 

 

답장은 짧고 단호했다.

 

 

이 시간이라서 더 가야 돼. 금방 가. 기다려

 

 

여주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한숨처럼 웃었다. 왜 이렇게 단정적일까. 미안해 할 틈도 주지 않는 말투였다. 여주는 잠깐 욕실을 다시 봤다. 물소리는 여전히 같았고 집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그제야 인정했다. 오늘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여주는 천천히 답장을 보냈다.

 

 

그럼 조심해서 와요. 신발 신고 들어와요 바닥 젖어서 미끄러워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 빠졌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었다. 수도는 여전히 새고 있었고 잘 곳도 정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숨쉬기가 아까보다 수월해졌다. 여주는 젖은 바지를 걷어 올리고 수건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발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엔 기다림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곧 누군가 이 집 안으로 들어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27

잠시 후, 현관 쪽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렸을 때 여주는 이미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차가운 밤공기보다 먼저 석진의 시선이 들어왔다. 집 안을 한 번에 훑는 눈이었다. 바닥, 욕실 방향, 젖어 있는 수건들. 신발을 신고 들어오라는 여주의 말에 그는 말 없이 계속 안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처는 잘 했네.”

“네. 수건으로 완전 쎄게”

 

 

석진은 대답 대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욕실로 먼저 걸어가 문을 열었고, 여주는 그 뒤에 서서 그가 안을 들여다보는 걸 지켜봤다. 석진은 허리를 굽혀 배관 쪽을 확인했고, 손전등 대신 휴대폰 불빛을 켜서 아래를 비췄다. 물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석진은 욕실 문을 닫자마자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확인하는 동작이 너무 익숙해서, 여주는 그제야 이 사람이 어떤 세계에서 살아왔는지 다시 실감했다. 고민하는 손놀림이 아니었다. 확인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이건 기사 불러야 해요. 제가 내일 아침에..”

 

 

여주의 말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 석진이 이미 통화를 연결하고 있었다. 통화음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받았다. 석진은 욕실 쪽을 힐끗 보며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세면대 아래 배관, 누수, 원룸, 밤중. 말은 길지 않았고 감정도 없었다. 대신 마지막에 아주 담담하게 덧붙였다.

 

 

“지금 바로 가능한 사람으로.”

 

 

잠깐의 침묵. 여주는 상대방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지만, 석진의 표정이 변하지 않는 걸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비용은 상관없어 두 배든 세 배든”

 

 

그 말에 여주의 눈이 커졌다.

 

 

“석진 씨—”

 

 

통화는 곧 끝났다. 석진은 휴대폰을 내리며 말했다.

 

 

“기사 한 명 출발했대. 30분 정도.”

 

 

여주는 잠깐 말을 잃었다. 상황이 해결되는 속도보다, 그걸 너무 당연하게 처리하는 태도에 더 당황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진짜로요. 집주인한테도 연락은 해놨고..”

 

“내가 원해서 이러는거야. 내가 너 좋아서”

 

 

한없이 다정한 말이었다. 음 플러팅인가? 여주는 반박하려다 멈췄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 앞에서는 괜히 애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분명 2살차인데 ..

 

 

 

 

 

28

석진은 여주의 표정을 잠깐 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말을 더 보태지 않았다. 대신 젖은 수건을 발끝으로 밀어 욕실 쪽으로 정리하고 아까 소나기가 내리던 걸 생각하며 현관 옆에 세워둔 우산을 집어 들었다. 집 안에 더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선 사람처럼 움직임이 빨랐다.

 

잠시 후 초인종 소리가 났다.

 

이번엔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다. 일정한 간격. 급하지 않지만 기다리지도 않겠다는 신호였다. 여주가 문을 열자 작업복 차림의 기사와 그 뒤에 서 있는 남준이 보였다. 남준은 안을 힐끗 보자마자 상황을 대충 파악한 얼굴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샜네요.”

 

 

기사의 말에 석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품 교체 필요하면 바로 하세요.”

 

 

남준은 여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냐고 묻는 대신 눈으로만 확인했다. 여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 정리는 제가 볼게요. 기사님 끝날 때까지.”

“네? 괜찮아요 제가 있을게요. 미안해요. 밤늦게.”

“아니에요. 미팅도 끝났고 마침 근처였어요. 남는게 시간인데요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준은 이미 소매를 걷고 있었다. 기사와 짧게 말을 주고받으며 욕실 쪽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익숙했다. 여주는 그 장면을 보다가 괜히 더 미안해졌다. 석진은 그 사이 여주의 코트를 집어 들었다. 물에 젖지 않은 쪽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내밀었다.

 

 

“나가자.”

 

 

“이렇게 두고 가도 돼요? 남준씨는요?”

“신경 안써도 되”

 

 

그 말이 이상하게 단단했다. 여주는 더 묻지 않았다. 코트를 입고 현관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전 남준이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끝나면 석진이 통해서 연락할게요. 당분간은 여기서 못 지낼것 같네요.”

“아.. 아무래도 그렇겠죠?”

“네. 오늘은 일단 가시고 짐은 나중에 챙기러 와요.”

 

 

여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에 대답을 들은 듯 남준은 기사님에게 말을 걸며 문을 닫았다.

 

 

 

 

 

 

 

 + 여주 집 샘플

 

 

대충 이런 느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